첨단산업 육성 100조원 약속하면서도 상법·노동법 개정 추진
“성장·규제 투트랙” 산업계 혼란··· 새 패러다임 전환점 시사

이재명 대통령이 대선 정국의 중심에 서면서 국내 산업계는 새로운 변화의 분기점에 섰다. 첨단산업 육성에 대한 강력한 드라이브와 함께, 노동·지배구조 규제 강화에 대한 신호가 동시에 감지된다. 인공지능(AI)·반도체 등 첨단산업에 100조원 규모 투자를 약속하는 한편, 기업 지배구조 개선과 노동권 강화를 위한 규제도 동시에 강화하는 투트랙 전략을 구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기존 정부의 ‘성장 우선’ 정책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접근법으로, 산업계의 경쟁 구도와 적응 전략에 중대한 변화를 예고하고 있다. 업계에서는 “육성과 규제를 동시에 추진하는 모순적 정책”이라며 “포용적 성장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라는 분석이 엇갈리고 있다.
‘AI 강국’ 100조 투자 의지··· 전략은 아직 ‘미완성’
이 대통령의 첨단산업 육성 전략의 핵심은 ‘모두의 AI’ 프로젝트다. 전 국민이 고성능 AI를 무료로 사용할 수 있게 함으로써 방대한 데이터를 축적하고 산업 혁신을 도모하겠다는 구상이다. 기존의 기업 중심 지원 정책과 달리 수요 창출을 통한 시장 확대에 중점을 둔 접근법이다.
반도체 분야에서는 생산세액공제 최대 10% 적용이라는 파격적 혜택을 제시했다. 단순한 세제 혜택을 넘어 국내 생산 기반 강화를 통한 공급망 안정화 전략의 일환이다. RE100(재생에너지 100%) 인프라 구축과 연계된 정책 패키지는 탄소중립 시대 장기 경쟁력 확보를 겨냥한 것으로 풀이된다.
지역별 특화 전략도 눈에 띈다. 광주·전남권에 10조원 규모의 ‘AI 시범도시’를 조성하고, 사천을 군용기 제조 중심으로, 인천을 해외 복합 유지·정비·보수(MRO) 중심으로 특화하는 계획이다. 수도권 집중에서 벗어나 지역별 산업 생태계를 구축하려는 의도로 해석된다.
하지만 업계 전문가는 “100조원으로 AI 3대 강국을 만들겠다는 계획은 있으나, 세부 전략은 부족해 보인다”며 “대규모 투자 계획이 실제 성과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보다 정교한 실행 전략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지배구조 개선 vs 경영권 위축··· 재계 “소송 남발 우려”
이 대통령이 추진하는 상법 개정은 소액주주 권익 보호를 명분으로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한국 기업의 지배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꿀 것으로 예상된다. 이사의 충실 의무 대상을 회사에서 주주로 확대하고, 집중투표제 활성화와 감사위원 분리 선출 확대를 추진하는 것은 경영진 의사결정 과정에 새로운 견제 장치를 도입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재계에서는 “소송 남발과 기업의 혁신 의지 훼손 같은 부작용은 불 보듯 뻔하다”며 우려를 표하고 있다. 단기적 주주가치 극대화 압력이 장기적 혁신 투자를 저해할 수 있다는 근본적 딜레마를 안고 있다.
글로벌 행동주의 펀드의 경영권 공격 가능성도 높아질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대한상공회의소 보고서에 따르면 감사위원 1명 분리선출 이후 지주회사들의 내부지분율 행사가 크게 제한됐으며, 2인 이상으로 확대할 경우 이런 리스크가 더욱 커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노동정책도 대폭 강화된다. 근로기준법의 5인 미만 사업장 확대 적용과 노란봉투법 도입이 핵심이다. 전체 사업체의 86.3%에 해당하는 538만개 사업장과 767만명의 종사자에게 직접적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된다. 노란봉투법은 하도급 노동자의 원청 기업에 대한 단체교섭권을 허용하고, 노조 파업으로 인한 손해배상 청구 시 기업의 입증 책임을 강화하는 내용을 담고 있어 기업의 노사관리 비용 증가와 경영 불확실성 확대가 우려된다.
상충되는 정책 목표··· ‘정교한 설계’ 성패 가를 것
이 대통령의 산업정책에서 가장 복잡한 과제는 첨단산업 육성을 위한 규제 혁신과 기업 지배구조·노동권 강화를 위한 규제 강화를 동시에 추진해야 한다는 점이다. 본질적으로 상충할 수 있는 정책 목표들을 조화시켜야 하는 고도의 정책 설계 능력을 요구한다.
핵심은 산업별, 기업규모별 차별적 접근이 될 것으로 보인다. 첨단산업 분야에서는 '네거티브 규제' 도입을 통해 혁신 친화적 환경을 조성하는 반면, 전통 산업과 대기업에 대해서는 사회적 책임 강화를 요구하는 투트랙 전략이 예상된다.
반도체특별법에서 논의되는 노동시간 적용 제외 문제는 이런 딜레마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양노총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첨단산업의 글로벌 경쟁력 확보를 위해서는 일정 부분 유연성이 필요하다는 산업계 요구를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가 관건이다.
다만 역설적으로 노동정책 강화가 기업들의 자동화와 디지털화 투자를 가속화하는 촉진제 역할을 할 수도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인건비 상승 압력이 기업들의 생산성 혁신을 유도하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SK하이닉스가 장시간 노동 없이도 2024년 4분기 영업이익 역대 최고치를 기록한 사례가 이를 뒷받침한다.
업계 관계자는 “이 대통령의 산업정책이 첨단산업 육성과 규제 강화라는 상반된 정책 방향의 조화는 쉽지 않은 과제이지만, 성공할 경우 한국 산업의 질적 도약을 가능하게 할 것으로 전망된다”며 “정책의 일관성과 예측가능성을 확보하면서도 급변하는 글로벌 환경에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는 정교한 정책 설계가 성패를 가를 것”이라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