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정우가 들려주는 ‘아가씨’ 그리고 백작 메이킹 스토리

영화 '아가씨'의 백작 하정우 [사진=CJ엔터테인먼트 제공]

 


요즘 배우 하정우가 자주 듣는 질문이 있다. 영화 ‘아가씨’의 백작 역, 3번째 주인공인데 괜찮은가요? 예상보다 비중이 작다는 얘기다. 그의 대답은 명쾌하다, “알고 시작한 건데요”. 조금 더 이어지면 “영화에 출연할 때 분량을 따지진 않아요. 로버트 드니로도 주연했다가 조연했다가 해왔잖아요. 출연 분량의 많고 적음은 있겠지만 배역의 크고 작음은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조금 더 이어지면 “알게 모르게 하정우라는 이름에 무게감이 생겼어요. 그건 제게도 독이 됩니다. 여전히 쌈마이(삼류)라는 것, 시키면 뭐든지 다하는 배우라는 걸 ‘아가씨’를 통해 보여 드리고 싶은 마음도 있었어요”.

진짜 그렇다. 뭐든지 했다. ‘아가씨’(감독 박찬욱·제작 모호필름 용필름·배급 CJ엔터테인먼트)에서 하정우는 엉덩이를 두 번 깐다, 엉덩이에 채찍도 맞는다. 단 한 순간도 멋 부리며 화보 찍지 않고(데뷔 이래 가장 멋진 비주얼임에도) 폼 나게 살아보려 수단 방법 가리지 않는 사기꾼, 초고수의 프로페셔널로 시작해 초보 아마추어처럼 흔들리는 백작을 연기했다.

기자라는 직업이 그렇듯, 백작의 출연 분량에 대한 질문도 딴에는 관객과 팬을 대표해 물은 것이다. 어쩌면 필자를 비롯한 여러 기자들의 오해였는지 모르겠다. 관객은, 하정우를 사랑하는 팬들은 이미, 영화 속 노출 빈도를 따지지 않는 하정우의 연기철학을 알고 지지하고 있다는 게 여러 기사에 달린 댓글들을 통해 확인된다. 그들은 이미 ‘아가씨’ 속 백작을 좋아하고 즐길 준비가 돼 있다. 어쩌면 이제 하정우는 배우로서 본인의 성장에 도움이 되는 역할과 팬들이 원하는(원한다고 생각했던) 기다림의 갈증을 충분히 풀어 ‘드릴 수’ 있는 역할 사이에서 더 이상 고민하지 않아도 될 듯싶다. 팬은 스타를 닮아간다고 하정우를 아끼는 관객들의 자세가 진지하고 성숙하다.

배우 생활 10년을 즈음해 영화인 하정우를 ‘리셋’시켜 준 ‘아가씨’, 어떤 일들을 직접 해 본 우리도 다 아는 일이지만, 작업을 수행하다 보면 애초 목표하지 않았던 성과들이 그 과정에서 잉태된다. ‘아가씨’의 백작도 그랬다. 백작을 어떻게 만나 어떻게 만들며 어떤 것들을 얻었는지, 그리고 ‘아가씨 그 후’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백작 하정우의 입을 통해 들어볼까.

영화 '아가씨'의 백작 하정우 [사진=CJ엔터테인먼트 제공]

 


◇ 아가씨와의 만남

“영화 ‘암살’ 고사 뒤풀이 자리였어요. 류성희 감독과 박찬욱 감독님이, 류 미감께선 ‘암살’의 미술감독이시니까요, 놀러 오셔서 삼겹살을 구워 먹었어요. 류 미감께서 ‘이런 역할 있는데 해 볼래?’ 말씀하셨고, 박 감독께서 시나리오를 보내 주시겠다고 했어요. 정확히 날짜를 짚어 주셨죠, 딱 두 달 뒤 10월 15일에 보내 주시겠다고요. 10월 15일 아침, 박 감독님 말씀이 갑자기 딱 떠오르는 거예요. 오전 9시, 10시에요. 신기한 건 바로 그때 문자가 왔어요, ‘어제 각색 끝냈다, 첫 번째로 보내는 거다’라고요. 읽었는데 얘기가 너무 재미있어요. 제가 그전에 핑거스미스 원작 소설이나 영국 드라마를 보지도 않았는데, 너무 재미있는 거예요. (백작에 대한) 각색 방향은 감독님께서 저의 전작들을 보셨구나, 특히 ‘멋진 하루’나 ‘비스티 보이즈’ 속 캐릭터나 말투, 행동들 그걸 녹여내셨구나 싶었어요. 그날 저녁 사무실에 얘기했지요, 하고 싶다.”

배우라면 새로운 캐릭터를 계속 선보이고 싶지 않을까. 전작들의 흔적이 보이는 역을 흔쾌히 선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김민희, 조진웅, 김태리의 신선한 모습과 달리 어디서 본 듯한 캐릭터가 부담이 될 수도 있지 않은가.

“흔적이라고 할 수는 없고요. 감독님 방식으로 변주해 내신 거지요. 부담감은 없었어요. 새로운 모습은 다른 작품에서 보여 드릴 수도 있는 것이고, 박찬욱 감독님의 작품 안에서 같이 작업을 한다는 것만으로도 가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또 이번 작품 하나로 팔자를 고쳐 보겠다거나(웃음) 이번 영화로 수상을 노려보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기 때문에 더욱 그렇습니다. 아웃풋(새로운 캐릭터) 자체보다는 새로운 작업방식에 대한 관심이 더 컸습니다.”

이번 아니면 끝이라는 절박감으로 만들어 내는 캐릭터, 생성 과정 자체를 즐기며 만들어가는 인물. 두 작업 방식에 우열을 가릴 순 없는 노릇이지만 결과의 차이가 문득 궁금하긴 하다. 흔히 배우마다 다른 방식이다 보니, 하정우에게서 전자의 결과를 보기란 어렵지 싶지만.

그래서 새로운 작업방식을 만났을까.

영화 '아가씨'의 백작 하정우 [사진=CJ엔터테인먼트 제공]

 


◇ 백작과 친해지기

“6월 중순 크랭크인인데 2월부터 리딩을 시작했어요. 보통 촬영 시작 전에 상징적으로 한두 번 읽거든요. ‘아가씨’는 스무 번쯤 읽었어요. 독특한 거는 (정서경) 작가님이 동석을 하세요. 말을 더듬거나 씹히거나 다른 말이 튀어나온 것 등을 다 기록해서 다음 버전에 반영하세요. 아나운서 스피치처럼 단어의 장음, 단음까지 다 체크해 주셨어요. 한 편의 연극을 준비하는 것 같은 방식이고 기간이었지요, 보통 짧게는 3개월 길게는 6개월에 걸쳐 연극을 무대에 올리잖아요.”

하정우도 영화 ‘롤러코스터’나 ‘허삼관’을 연극처럼 준비했고, 촬영 당일에도 현장 리허설을 중시했다. 박찬욱 감독의 방식을 전해 듣노라니 오버랩이 됐다.

“처음에는 당황했어요. 야구로 치면 스프링 캠프부터 전력투구를 시키는 거잖아요. 감독님의 디렉션과 모든 것을 애초에 배우들에게 이해시키고 방향성을 잡게 하고 훈련을 시켜서 촬영에 임하게 하시더라고요. 저도 그런 작업방식을 좋아하는데, 다시 한 번 환기가 됐어요. 기본기를 다시 트레이닝 받는 느낌이었고…, 제 개인적으로는 도움도 되고 환기도 되는 작품이었습니다.”

하정우가 연기한 고판돌은 본래 제주도 무당과 머슴 사이에 태어난 인물이지만 나고야 출신 백작 행세를 하기에 유창한 일본어가 필수다.

“개인교습을 1주에 4번 받았어요, ‘암살’ 끝나자 마자부터 ADR(Automatic Dialogue Replacement·영화의 이미지에 맞게 대사나 동선의 호흡을 재녹음하는 것) 할 때까지 1년 가까이 했어요. 한글로 한 음 한 음 적어서, 글자 하나하나를 읽는 것을 시작으로 단어 하나하나 배워 나갔지요. 감독님은 일본어 리딩 따로, 전체 대본 리딩을 따로 체크하셨는데 모호필름 사무실 벽면에 배우별로 일본어 학습 진도 ‘날짜별 도표’가 붙어 있었어요(웃음). 언제 출석했고,, 결석한 날엔 압박이 와요, 보충수업을 항상 해요,”

“모호필름에 일본어 배우러 1주에 4번 가고 다른 일로 가고 그러다 보면 일주일 내내 가는 거예요, 연극하러 극단에 매일 가 듯이요. 그러면 박 감독님을 만나고 (정정훈) 촬영감독님과 (류성희) 미감님을 보는 거죠. 수업 끝나면 박 감독께서 ‘밥 먹고 가’ 하세요. 앉아서 밥 먹다 태리 오면 태리랑 얘기하고 민희 오면 또 민희랑 하고, 진웅 형 오면 한 잔 하고, 크랭크인 3개월 전부터는 매일 그랬던 같아요.”

스프링캠프부터 전력투구하고, 일본어 수업을 계기로 감독과 배우, 제작진이 영화에 대한 의견을 매일 나누는 환경이 자연스레 형성됐으니 캐릭터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가 공유된 것은 당연지사. 하정우의 이야기를 듣노라니 반투명했던 인물들,, 히데코 아가씨, 백작, 코우즈키 이모부, 하녀 숙희가 점점 선명한 입체로 형상화 됐다.

영화 '아가씨'의 백작 하정우 [사진=CJ엔터테인먼트 제공]

 


◇ 백작이 되다

박찬욱 감독은 배우에게 눈높이 하나, 눈동자가 움직이는 시야 폭 하나를 주문하는 감독으로 유명하다. 갑갑하지 않았을까.

“전혀 그렇지 않아요, 연출을 해 봐선지 그렇게 주문하는 감독의 배우를 향한 마음을 조금은 안다고 할까요. 촬영 때면 연출부가 조사까지 체크해요. ‘는’이 빠졌어요, ‘는’으로 발음하시면 안 될 것 같아요, ‘은’으로 해 주세요. 하지만 감정선은 건드리지 않아요, 이미 리딩 때 공유되기도 했고요. 물론 일본어 선생님 3명이 참관하시고, 그 분들이 고개를 끄덕여야 OK 컷 사인이 나는 건 분위기 살벌했죠. 하지만 반복적으로 담금질, 학습, 연습, 실행할 수 있어서 좋았어요. (박찬욱 감독이 카메라 1대로 촬영하는 것도) 정말 오랜만에, 원래 이렇게 찍었었지, 옛날 기억이 나서 좋았고요.”

결코 쉽거나 편하다고만 할 수 없는 박찬욱 감독과의 작업의 면면을 즐긴 하정우. 박 감독은 하정우에게 어떤 백작이 되어 줄 것을 요구했을까.

“감독님의 깊은 속내는 모르겠지만, 제가 생각한 부분은 그렇습니다. 두 여배우 아가씨와 하녀, 코우즈키라는 캐릭터 사이에서 관객한테 다가갈 수 있는 브리지(bridge·가교) 역할을 저에게 주셨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백작의 캐릭터를 그렇게 그린 것이고, 저 역시 감독님 작품이 상업적으로 관객에게 다가서는 데 있어 브리지 역할을 하고자 했어요. 기존 캐릭터의 반복을 보셨다면 그런 이유이고, 가능하면 쉬운 표현을 통해 (이해하기) 쉬운 인물이 되고자 했어요. 영화에 쉼표가 될 수도 있고, 세 배우들 사이에서 윤활유 역할을 할 수도 있고, 축구로 하면 미드필더로 뛰며 보탬이 되고 싶었어요.”

백작은 먼저 두 여주인공 사이에 서 있다. 하녀 숙희와 모종의 음모를 꾸미고 아가씨 히데코와 또 다른 거래를 한다. 하정우가 말한 대로 두 여주인공과 코우즈키, 백작 외에 또 다른 주인공의 사이에도 서 있다. 코우즈키를 도울 것처럼 다가서지만 그가 세 번째 부인으로 찜해 놓은 히데코의 남편이 됨으로써 가장 큰 분노를 일으키고, 두 여인과 각개로 편을 먹어 코우즈키를 배신하려지만 정작 한 편이 되는 건 두 여자이고 배신당하는 건 자신이다.

무엇보다 백작은, 또 그를 연기한 하정우는 ‘아가씨’와 관객 사이, 박찬욱 감독과 관객의 사이에 서 있다. 영화 속 인물들의 사이에 서서 스토리와 관계, 그를 통해 빚어지는 긴장감을 키웠고 낯설게 느낄 수 있는 히데코와 숙희, 코우즈키라는 캐릭터를 관객에게 바짝 데려다 줬다. 하정우는 또 ‘아가씨’가 박찬욱 감독의 흥행작이 되기를 열망했고, 자신이 작은 역할이라도 할 수 있다면 감독의 ‘손과 발’이 되고 싶다고 자청했다. 그런 까닭에, ‘비스티 보이즈’(2008)의 재현이나 ‘멋진 하루’(2008)의 조병운의 여운이 느껴지는 백작의 캐릭터를 기꺼이 더 백작스럽게, 지나치게 영민하거나 과하게 훈훈하지 않게, 어딘가 비어 보이지만 하정우 특유의 개성 넘치는 캐릭터로 소화했다.

영화 '아가씨'의 백작 하정우 [사진=CJ엔터테인먼트 제공]

 


◇ 영화에선 사제처럼, 스크린 밖에선 배우처럼

감독의 손과 발을 자청하는 하정우가 대중의 눈에 어떻게 보일지 궁금하다. 평가는 논외로 하고, 하정우는 그런 사.람.이다. ‘더 테러 라이브’(2013)를 찍으며 제작사 씨네2000의 이춘연 대표가 빚을 갚고 안정된 공간을 마련하기를 소원하는 사람이고, 이제 막 ‘신과 함께’의 촬영을 시작하며 김용화 감독의 힘찬 재기를 소망하는 사람이다. 아니, 인.간.이다. 그는 늘 사람 사이에 있기를 원하고, 기왕이면 그 관계에서 자신이 작더라도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심성을 지녔다. 누가 알아주기를 바라는 게 아니라 그러지 않는 게 더 불편한 사람이다.

10년이라는 시간 동안 하정우라는 배우를 관객으로서, 기자로서 지켜보며 ‘이 사람은 참, 스스로에게 미션을 주는구나’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사제도 아니면서, 마치 사제처럼 사명감을 가지고 영화에 임한다. 영화 속에서 배우로서 멋짐을 빛내도 모자랄 판에 기왕이면 작품 내외적으로 어떤 역할을 하고자 분투한다.

역으로 스크린 밖에선, 영화 홍보를 위한 각종 자리에서는 참으로 배우처럼 군다. 최대한 멋진 의상을 준비하고 외모를 가꿔 무대에 선다. ‘아가씨’ 영화 포스터에선 하정우라는 이름이 세 번째, 무대인사 등 행사에서는 첫 번째에 자신의 이름을 올리는 의미를 알고 역할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T.P.O라 하던가. 영화를 위해서, 관객을 위해서 시간, 장소, 상황에 맞춰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아는 셀프 사제이자 배우다.

영화 '아가씨'의 백작 하정우 [사진=CJ엔터테인먼트 제공]

 


◇ ‘아가씨’ 그 후,‘터널’ 그리고 ‘신과 함께’

직장인처럼 매일 제작사 사무실을 출근하고 배우로서 반복적으로 담금질, 학습, 연습, 실행을 통해 마치 신인처럼 기본을 다진 하정우. 그 과정에서 ‘아가씨 효과’라고 부를 만한 근본적 변화가 싹을 틔웠을까. 백작으로는 미처 다 발산하지 못한, 더 큰 에너지가 생성됐을 법한 수련을 거쳤다.

“풍선을 쥐고 있으면 터지잖아요. 그 다음 작품에서 폭발이 왔어요. 영화 ‘터널’은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작업했어요. 물론 김성훈 감독님의 시나리오에 가이드라인이 있었지만 즉흥연기 방식으로 접근했고 김 감독님도 열어 주셨어요. (즉흥연기로 현장감을 살렸다고 평가받는) ‘더 테러라이브’가 준비한 것 60% 현장 40% 정도였는데, ‘터널’은 70%를 즉흥연기로 소화했어요. (‘아가씨’가 카메라 1대로 촬영했다면) ‘터널’은 카메라 4, 5대를 놓고 롱테이크로 10분, 15분을 찍었어요. ‘터널’에서의 전혀 새로운 연기 패턴, 박찬욱 감독의 ‘아가씨’ 경험을 거친 영향입니다. 김용화 감독의 ‘신과 함께’도 또 다른 접근 방식으로 강림에게 다가서리라 생각합니다.”

“흐름이 좋다”고 말하는 하정우에게서 기분 좋은 기운과 자신감이 느껴졌다. 두 달만 지나면 만날 수 있는 ‘터널’, 2017년 여름부터 선보이기 시작할 ‘신과 함께’ 1·2편. ‘아가씨’를 통해 배우로서 리셋 버튼을 누른 하정우의 연기가 어서 보고 싶다. 우선, 볼수록 새로운 매력이 찾아지는 ‘아가씨’를 한 번 더 만나야겠다, 일로 보는 기자가 아닌 즐기려 보는 관객으로서.

dunastar@eco-tv.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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