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명 극장에서 재미있게 봤다 싶은데 TV에서 마주쳤을 때 두 번 볼 영화는 아니다 싶어 단 1초도 머무르고 싶지 않은 양 채널을 홱 돌리게 되는 경우가 있다. 반면 극장에서, TV에서 이미 수차례 봤음에도 다시금 채널을 멈추고 빠져드는 영화도 있다. 뻔하지 않아서, 다시 봐도 충분히 재미있어서 다른 걸 보느니 이걸 보게 되는 영화. 전자의 사례는 생각보다 많고 후차는 기대보다 드물어서 반복 관람의 미덕을 갖춘 영화를 발견하는 일이란 작지 않은 기쁨이다.

사람으로 치면 ‘볼매’, 볼수록 매력 넘치고 새로운 장점이 자꾸만 보여 마음이 가는 영화를 최근 한 편 더 발견했다. 박찬욱 감독 연출의 ‘아가씨’(감독 박찬욱·제작 모호필름 용필름·배급 CJ엔터테인먼트)이다. 144분의 짧지 않은 러닝타임을 채우는 화면 가운데 단 한 장면도 허투루 만들지 않은 영화, 자신의 모든 연출작 중 “가장 공을 들여 만든 작품”이라는 박찬욱 감독의 말이 허언이 아니다.

양식과 일본식과 한식의 공존, 서로 이질적인 건축물과 의상, 인테리어와 소품들이 어우러지고 충돌하며 만들어내는 압도적 분위기,,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화면 구석까지 꽉 찬 미장센,, 하정우 김민희 김태리 조진웅의 완벽하게 준비된 아름다운 실연[play],. 영화 ‘색,계’를 방불케 하는 파격적 정사 신과 속이고 죽여야 내가 사는 상대에게 사랑을 느끼고야 마는 위험한 감정이 주는 긴장미. 기존의 박찬욱 영화가 장면, 장면 여러 장의 잔혹하고도 독특한 화폭을 선사했다면 이번에는 ‘아가씨’라는 공간 속에 한결 아름답고 부드러워진 박찬욱풍의 숨결을 불어넣었다. 2차원 평면에서 3차원 입체로 한층 풍성해졌다.

영화 '아가씨' 메인 포스터 [사진=CJ엔터테인먼트 제공]

 


박찬욱 감독은 한 땀 한 땀 공을 들여 만든 ‘아가씨’를 통해 어떤 얘기를 하고 싶었던 걸까.

“우리 역사에 있어 근대성의 도입을 개인의 내면화된 감정을 통해 다뤄보고 싶었어요. 역사적 사건을 통해 고찰하는 방식도 의미 있지만, 이제는 개인의 내면을 통해 들여다 볼 때가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일본인 귀족 아가씨 히데코(김민희 분)가 사는 조선의 대저택에는 각자의 근대성 실현을 위해 힘쓰는 사람들이 몰려든다. 역사의 진보, 진 일보를 개인의 자유가 확대되어 온 과정이라고 한다면 봉건적 사상과 체제에서 벗어나 어제보다 자유롭고 자신이 원하는 바를 쟁취하고 싶은 사람들이 ‘아가씨’의 인물들이다.

히데코의 이모부 코우즈키(조진웅 분)는 조선인 아내를 버리고 아들이 없는 집안의 둘째 딸(문소리 분)과 결혼하며 국적과 신분을 세탁한다. 히데코를 낳다 죽은 엄마, 아빠의 존재는 설명되지 않지만 아가씨는 고아다. 아내가 죽고 없는 지금, 코우즈키는 조카 히데코와의 결혼으로 귀족 집안의 재산을 독점하려 한다. 혼인으로 얻은 막강한 재산으로 코우즈키가 추구하는 것은 지식욕이다. 컴퓨터가, 모바일이 우리 손에 주어졌을 때 성(性)을 가지고 놀며 그것의 쓰임에 친해졌듯이 코우즈키의 책에 대한 탐닉의 관심은 음서(淫書)로 집중돼 있다.

히데코 집안의 재산을 노리는 이가 한 명 더 있으니 백작(하정우 분)이다. 일본 나고야의 백작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 또한 조선인이다. 말 한 마디면 세상 여자 누구든 후릴 만큼 옴므 파탈의 매력남으로, 히데코를 유혹해 재산을 빼앗을 전략을 세우지만 흔들리지 않는 눈빛을 지닌 아가씨를 보고 전술을 수정한다. 전술은 보다 복잡하고 정교해진다. 히데코의 재산으로 백작이 하고 싶은 것은 ‘폼생폼사’의 삶이다. 백작 스스로 밝히듯 돈 자체에는 관심이 없다, 가격을 보지 않고 와인을 시킬 수 있는 여유와 품격을 원한다.

백작의 전략에 기용된 동업자가 하녀 숙희(김태리 분)이다. 1000번을 무탈하게 도둑질하다 딱 한 번 걸려 교수형을 당한 어머니의 뒤를 이어 소매치기가 된 숙희는 구가이(이동휘 분)에게 도장 위조도 배우고 자물쇠 따는 법도 배우지만 자신이 원하는 만큼 삶은 나아지지 않는다. 백작의 제안을 받고, 한 밑천 챙겨 조선을 뜨겠다는 야심을 갖고 있는 인물다운 대범함과 침착함으로 비밀 업무를 수행해 가지만 계획에 없고 예상치 못 했던 감정에 마주한다. 태어날 때부터 뒤틀린 팔자를 바꿀 수 있는 건 돈이라고 생각했는데, 자신이 속여야 할 아가씨에게 연민을 넘어 사랑을 느낀다.

숙희가 공주처럼 모시고 아기처럼 보살피는 ‘애기씨’ 히데코는 이모부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고 싶다. 다섯 살에 조선에 온 후 대저택 바깥으로 한 발짝 나가본 적없는 히데코. 늙은 이모부와의 결혼도 싫고 지시에 따르지 않으면 언제든 가해지는 체벌도 싫지만, 가장 싫은 건 사랑에 대한 혐오를 키우고 여자로서, 인간으로서의 감정을 메마르게 하는 음서 독회다. 노골적으로 남녀의 신체와 성행위가 묘사된 소설을 이모부의 손님들 앞에서 실감나게 읽고 신사들의 마음을 쥐고 흔들면서도 정작 자신은 미동도 없던 히데코, 그런 아가씨의 마음을 흔드는 이가 있었으니 하녀 숙희다. 아가씨에게 있어 암울한 어제에서 벗어나 오늘 하고 싶은 것은 ‘사랑’이다.

영화 '아가씨' 메인 포스터 [사진=CJ엔터테인먼트 제공]

 


네 명의 주인공뿐 아니라 저택의 집사(김해숙 분)에게서도 근대성, 자유 의지는 확인된다. 남편에게 버림받은 여자로 한탄하거나 자책하며 살아가는 봉건적 선택 대신, 남편이 제왕처럼 지배하는 세계에 스스로 들어와 집사로서 하녀들에게 부리는 작은 권력을 만끽한다. 전 남편의 새로운 부인을 그와 함께 능멸하고 비웃는 재미도 쏠쏠하다. 영화 ‘아가씨’ 속 인물들에게는 숙희가 나고 자란 장물거래소 ‘보영당’ 식구들로부터 저택의 하녀들, 찾아오는 손님들까지 저마다의 몸부림, 오늘보다 좋은 내일을 향한 욕망들이 보인다.

남성 중심적 봉건사회에서 벗어나 새로운 내일을 추구하는 여러 인물들의 꿈 중에 박찬욱 감독이 선택한 가장 아름다운 근대성은 ‘사랑’인 듯  읽힌다. 히데코와 숙희의 사랑. 왜 하필 동성애인가. 개인적 소회지만, ‘아가씨’ 속에서 펼쳐지는 정사를 보고 있노라면 성별이 중요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사랑하는 두 사람이 평등해 보이는 몸의 나눔, “이렇게 수다스러운 정사 신은 없었다”는 박찬욱 감독의 말처럼 성행위라기보다 친밀한 대화처럼 느껴지는 사랑 장면이 따뜻하기만 하다.

영화 '아가씨' 관계 포스터 [사진=CJ엔터테인먼트 제공]

 


동성애를 그린 이야기는 많은데 왜 세라 워터스 원작의 영국소설 ‘핑거 스미스’였을까.

“뾰족이 튀어 나와 아가씨의 입속을 괴롭히던 어금니를 하녀가 금속 골무를 낀 손가락을 넣어 갈아 주는 장면이 있어요. 소설을 읽으면서 이 장면을 영화로 보고 싶다, 라는 생각을 갖게 됐어요. 어찌 보면 감독은 어떤 한 장면을 꼭 보여 드리고 싶어서 긴 이야기를 시작하지요. 사실 오래 전 영화를 만들고 싶었는데, 선뜻 자신이 서질 않더라고요. 일단 포기했다가 ‘스토커’를 먼저 하고 나니 이제는 미룰 수 없겠다, 영화로 만들고 싶다는 마음이 차올라서 시작했습니다.”

감독의 열망이 고스란히 옮겨진 덕분일까. 나무 욕조에 들어앉은 아가씨의 향기 나는 목욕, 입속 고통을 아기처럼 호소하는 히데코, 엄마처럼 조심스럽고 보드랍게 이를 갈아주는 숙희, 이보다 농밀하고 친밀한 사랑의 대화가 있을까. 천천히 놀리는 숙희의 손가락과 고통에서 평화와 행복으로 바뀌는 아가씨의 표정, 주고받는 두 사람의 숨소리는 관객의 무딘 감각을 깨우고 가슴을 벅차오르게 한다. ‘아가씨’가 선물하는 명장면 중 하나다.

제69회 칸국제영화제에서 팬들의 사인 요청을 받은 박찬욱 감독 [사진=CJ엔터테인먼트 제공]

 


박찬욱 감독에게 물었다. 두 번 보니 더 재미있고 세 번, 네 번을 봐도 미처 못 본 것을 새로 발견할 수 있을 것 같은 ‘꽉 찬’ 영화를 만든 이유가 무엇인가요.

“감독에게는 꿈이 있지요. 100년까지는 아니라 해도 한 10년은 소장해 두며 꺼내 보고 또 보고 싶은 영화, 관객에게 그런 큰 아낌을 받는 작품을 만들고 싶다는 소망이요. 제가 세상에 내놓는 열 번째 장편영화입니다, 해 볼 때가 되지 않았나 생각했습니다.”

덕분에 관객은 호사를 누리게 됐다. 눈도 즐겁고 귀도 즐거운 영화, 눈과 귀를 한껏 열어 끌어안고 싶은 영화. 박찬욱이 심어놓은 모든 것을 다 알아채고 싶은 도전과 자극을 받게 되는 ‘아가씨’. ‘공동경비구역 JSA’ 이후 흥행보다는 작가주의 감독으로 인식돼 온 박찬욱, 한국영화의 진 일보를 위해 애써온 그의 노력이 더 늦기 전에 관객의 사랑으로 보답 받기를 바란다, 기왕이면 좋은 배우, 훌륭한 스태프와 함께 2배 이상의 제작시간 속에 공들여 빚은 이 영화로. ‘아가씨’는 6월 1일 당신을 만나러 간다, 마음의 문을 열어 반갑게 맞아 주시길.

dunastar@eco-tv.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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