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년 만의 대형 M&A로 B2B→B2C 구조 전환 시도
누적 2000억 적자 위기··· 애경 인수로 체질 개선 전략
전통 제조업서 소비재 브랜드로 근본 변화 시도

한때 재계 36위까지 올랐던 태광그룹이 생존의 기로에 서 있다. 17년 만에 재개한 대형 인수합병(M&A)으로 애경산업 인수에 4000억원대 후반을 베팅한 이번 딜은 ‘M&A 귀재’ 이호진 전 태광그룹 회장 시절의 영광을 되찾기 위한 절박한 도박이자, 전통 제조업에서 소비재 브랜드 사업으로의 ‘마지막 탈출구’가 될 전망이다. 단순히 이번 딜은 외형 확장을 넘어 그룹 차원의 근본적 체질 개선을 위한 생존 전략으로 분석된다.
8일 업계에 따르면 태광산업의 현실은 참담하다. 지난 2022년부터 3년 연속 영업손실을 기록하며 누적 적자가 2000억원을 돌파했다. 올해 2분기 기준 매출은 4646억원에 그쳤고 영업손실은 189억원을 기록했다. 주력사업인 석유화학과 섬유 업계의 구조적 침체로 매출도 2022년 2조3950억원에서 지난해 1조8950억원으로 급감했다.
한때 그룹을 이끌던 PTA·프로필렌 등 석유화학 부문의 반기 영업손실만 201억원에 달했다. 이에 따라 중국 법인 스판덱스 생산 라인과 울산 프로필렌 생산 공장 가동을 중단하는 등 구조조정에 속도를 내고 있다.
업계에 정통한 한 관계자는 “보유한 현금 자산을 활용해 사업 구조를 개편해야 한다는 절박함이 높았다”며 “4조1589억원의 이익잉여금을 바탕으로 한 1조5000억원 규모의 공격적 투자 계획의 첫 번째 프로젝트”라고 분석했다.

B2B 소재 중심 한계, B2C로 돌파구 모색
태광그룹이 애경산업에 주목하는 핵심 이유는 기존 기업간거래(B2B) 중심 사업구조를 기업간 소비자간 거래(B2C)로 전환하는 전략적 교두보 역할 때문이다. 태광산업의 매출 상당 부분이 폴리에스터 원사, 필름, PTA 등 소재 중심의 B2B 산업구조에 편중되어 있어 경기 민감성과 업황 의존도가 극도로 높았다.
애경산업은 루나, AGE 20's 등 뷰티 브랜드와 케라시스, 2080, 바세린, 트리오 등 생활용품 브랜드를 고르게 보유하고 있다. 홈쇼핑, 온라인몰, H&B스토어, 대형마트, 해외 면세점 등 옴니채널 기반 유통망도 갖춰 "즉시 편입 가능한 매물"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태광그룹이 과거 유선방송 사업자 인수로 티브로드를 출범시킨 경험과 T커머스, TV홈쇼핑 등의 기존 인프라도 시너지 창출에 유리한 요소다.
기존 분석에서 애경산업의 높은 중국 의존도(화장품 수출의 약 80%)를 약점으로 지적했지만, 태광그룹은 이를 오히려 기회 요인으로 해석한다. 2024년 기준 중국 매출 1642억원(전체 매출의 24%)은 뒤집어 보면 미국과 유럽, 동남아시아 등 다른 지역 확장 여지가 충분하다는 의미다.
실제로 애경산업은 일본에서 브랜드 ‘루나’가 4배 성장을 기록했고, 올해 4월 글로벌 K뷰티 유통 플랫폼 ‘실리콘투’와 업무협약을 체결해 AGE20‘S를 미국시장에 본격 진출시켰다.
최근 삼일PwC경영연구원에 따르면 글로벌 화장품 시장은 2027년 770조원에 달할 전망이며, K뷰티는 지난해 사상 처음 수출 100억원을 돌파하며 성장세를 이어가고 있다.
위기를 기회로, 다시 주목받는 이호진 리더십
태광그룹의 애경산업 인수가 주목받는 이유 중 하나는 전통 제조업 강자의 운영 노하우와 소비재 브랜드의 결합 가능성이다. 태광산업은 세계 최고 수준의 정밀화학 제조 능력을 보유하고 있다. 1500억원을 투자해 울산 청화소다 공장을 증설, 2027년까지 연간 생산능력을 6만6000t에서 13만2000t으로 확대해 글로벌 톱 3로 도약할 계획이다.
국내 화장품 기업 중 자체 생산공장을 보유한 곳은 아모레퍼시픽과 LG생활건강 정도뿐인 상황에서, 애경산업의 충남 청양공장(생산능력 17만9355t)과 태광산업의 정밀화학 제조 노하우가 결합되면 원료부터 완제품까지의 통합 생산 시스템 구축이 가능하다.
애경산업 인수는 이호진 전 태광그룹 회장의 경영 복귀 가능성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지난해 5월 횡령·배임 혐의 구속영장이 기각된 이후 14년 만에 회사를 방문한 것으로 알려졌다.
과거 ’M&A 귀재‘로 불리며 그룹을 재계 36위까지 끌어올렸던 이 전 회장의 경영 공백으로 태광그룹은 현재 재계 순위 50위까지 밀린 상황이다.
현재 이 전 회장의 사법리스크가 상당 부분 해소되면서 그룹 내 책임경영 강화와 신사업 추진 동력을 확보한 상태다. 이번 M&A가 그룹 재도약의 신호탄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인다.

2조5000억 베팅, 태광의 전례 없는 승부수
태광그룹은 애경산업 인수를 시작으로 2조5000억원 규모의 동시다발적 M&A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부동산 자산운용사 1위 이지스자산운용(인수 예상 금액 5000억원 이상) 인수에 계열사 흥국생명이 도전장을 내고, 메리어트 남대문 호텔 인수 우협에도 선정되는 등 다각화 전략을 동시 추진 중이다.
태광이 과거처럼 계열사가 직접 회사를 인수하지 않고, 지난해 12월 설립한 자회사 티투프라이빗에쿼티(티투PE)를 전면에 내세웠다는 것이다. 사모펀드 구조를 활용하면 외부 자금을 펀드 형태로 조달해 재무 부담을 줄이고, 기존 사업과 연관성이 적은 산업에도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다.
다만 중국 시장 의존도와 브랜드 경쟁력 강화가 주요 과제다. 업계 한 관계자는 “중국은 여전히 매출 비중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만큼 포기할 수 없는 시장”이라며 “하지만 일본이나 미국의 비중이 점진적으로 커지고 있는 만큼 향후 중국에 대한 의존도를 줄여나가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애경산업의 브랜드가 해외에서 K뷰티에 기대하는 신선함을 갖고 있지 않다는 지적도 있다. 하지만 탄탄한 제조능력과 유통망을 바탕으로 태광그룹의 자본력과 글로벌 네트워크가 결합되면 브랜드 파워 강화가 가능할 것으로 전망된다.
업계 한 전문가는 “태광그룹의 애경산업 인수는 단순한 사업 확장을 넘어 그룹 생존을 위한 근본적 체질 개선 프로젝트”라며 “3년 연속 적자에 시달리는 본업의 한계를 극복하고, B2B 중심에서 B2C로의 사업 구조 전환을 통해 ’제3의 창업‘을 실현하려는 전략적 의도가 명확하다”고 말했다.
이어 “애경산업 인수가 성공적으로 마무리될 경우 한국 재계에서 위기를 기회로 전환한 모범 사례로 평가받을 가능성이 높다”면서 “동시에 국내 K뷰티 업계 판도에도 상당한 변화를 가져올 것”이라고 덧붙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