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재명 정부가 추진하는 ‘장기 연체채권 채무조정 프로그램’이 ‘배드뱅크’ 설립 재원 분담을 둘러싼 금융권 내부 갈등 탓에 제동이 걸렸다. “누가 얼마나 내느냐”를 두고 은행, 보험, 카드, 저축은행 등 업권별 협회가 평행선을 달리고 있다.
5일 금융업계에 따르면 은행연합회, 생명·손해보험협회, 여신금융협회, 저축은행중앙회 등 각 업권 협회는 지난달부터 배드뱅크 설립 출연금 4000억원에 대한 분담 협의에 들어갔으나 한 달 남짓 매듭을 짓지 못했다.
한 협회 관계자는 그린포스트에 “아직 논의가 진행 중인 사안이어서 이렇다 저렇다 얘기할 수 있는 게 없다”라고 말을 아꼈다.
이재명 대통령은 지난 대선 때 코로나19로 빚을 진 소상공인·자영업자의 채무 탕감·조정을 공약했다. 이에 금융위원회가 장기 연체채권 채무조정 프로그램 마련에 나섰고, 세부 방안을 3분기 중 발표할 예정이다.
지난달 정부는 2차 추가경정예산 4000억원을 배드뱅크 설립 재원으로 배정했고, 금융위는 나머지 4000억원을 금융업계에서 조달하기로 했다. 사회적 책임 이행 차원에서 금융업계가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형태다.
표명상 ‘자발적 출연’이지만, 실제 업권별 출연 비율을 놓고 눈치싸움이 벌이는 모습이다. 특히, 비(非)은행 협회를 중심으로 은행권 출연금을 제외한 나머지를 고르게 분담하는 안과, 특정 조건에 따라 다르게 분담하는 안이 맞서는 것으로 알려졌다.
일각에서는 소상공인·자영업자 대출 비중이 높은 은행권이 3500억원 정도를, 나머지 업권에서 약 500억원을 내는 방안을 논의하는 것으로도 알려졌다.
이와 관련해 금융위는 “장기 연체채권 채무조정 프로그램과 관련해 (금융 업권별) 출연 금액은 확정되지 않았으며, 금융권 기여 여부·규모는 금융권의 자발적 의사에 따라 결정될 예정”이라고 밝혔다.
배드뱅크 설립 출연금 조달(분담) 방식이 결정되지 않을수록 정부 계획에도 차질이 불가피하다. 금융위원회는 오는 8월 한국자산관리공사(캠코)를 중심으로 배드뱅크 설립을 마무리하고, 10월부터 본격적인 채권 매입을 개시할 계획이다.
금융당국은 업계가 자율적으로 분담 비율을 확정하기까지 기다리겠다는 방침이지만, 지금까지 뚜렷한 돌파구가 보이지 않는 상황이다.
한 금융권 관계자는 “업권별 분담 문제가 깔끔히 정리되지 않으면 향후 추가 분담 논의나 유사 사업 추진 시 또다시 갈등이 반복될 수 있다”며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는 만큼 정부 차원의 조정도 한 방법”이라고 말했다.
캠코는 이번 달 업권별 릴레이 간담회를 거쳐 내달 초 금융협회 간 매입 협약을 체결할 전망이다.
한편, 정부가 빚 탕감 정책으로 도덕적해이(모럴헤저드)를 부추긴다는 지적에 관해 전문가들은 장기 연체자가 처한 구조적 어려움에 주목한다.
개인회생파산 전문 이지연 변호사는 지난달 금융위 간담회에서 “장기 연체자가 된 원인을 오롯이 개인의 책임으로 볼 수 없다”라며 “장기 연체자들은 급여나 계좌 압류, 채권사들의 극심한 추심 등으로 정상적인 소득활동이 어려워 더욱 고통스러운 상황으로 내몰린다”라고 설명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