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미·유럽 등 우선권 양보 원전 1기당 9000억 구매계약 체결
한수원, "웨스팅하우스와 합작회사로 美 300기 원전 시장 진출"
"과도한 양보" 비판에 " MANGA( 美 원전 다시 위대하게) 출발점" 주장도

한국수력원자력이 미국 웨스팅하우스와 맺은 원전 지식재산권 분쟁 합의를 두고 불평등 계약이냐 전략적 선택이냐는 논란이 나오고 있다.
산업통상자원부와 한수원은 미국이 원전 300기를 2050년까지 건설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고, 글로벌 신규 원전 시장을 위한 전략적 선택이라고 설명한다. 미국과의 조선 협력처럼, 'MANGA(Make American Nuclear Power Great Again)' 을 노릴 수 있다는 것이다. 한편, 전임 정부가 체코 원전 수주를 위해 불리한 조항을 무리하게 수용했다는 비판도 거세다.
◇ 웨스팅하우스에 우선권 양보…북미·EU 등 단독 수주 불가
업계에 따르면 올해 1월 체결된 합의문에는 한수원이 원전 단독 수주 활동을 할 수 없는 국가가 명시된 것으로 전해졌다. 북미와 체코를 제외한 유럽연합(EU), 일본, 영국, 우크라이나 등에서는 웨스팅하우스에 우선권을 부여하고 사실상 수주를 포기하는 내용이 담겼다. 실제로 합의 직후 한수원은 스웨덴, 슬로베니아, 네덜란드 등에서 연이어 철수했다.
웨스팅하우스는 체코 정부가 지난해 7월 두코바니 원전 5·6호기 건설 사업 우선협상대상자로 한수원을 선정하자 최신 한국형 원전 APR100이 자사의 원천 기술에 기반한 것이라며 지식재산권 소송을 제기했다. 이에 체코 정부는 한수원과 계약을 미뤘다. 결국 한수원과 웨스팅하우스는 지난 1월 지식재산권 분쟁을 마무리하기로 합의했다. 비밀 계약에 따라 양측은 조건을 공개하지 않았으나, 이번에 일부 내용이 언론을 통해 알려졌다.
합의문에는 향후 50년간 원전 1기당 6억5000만 달러(약 9000억원) 규모의 물품·용역 구매 계약을 웨스팅하우스와 체결하고, 별도로 1억7500만 달러(약 2400억원)의 기술 사용료를 납부한다는 조항도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물품 및 용역 구매 계약 약속이 이행되지 않을 경우 1기당 4억 달러(약 5600억원) 규모의 보증 신용장도 발행하는 등 '백지수표' 성격의 조건까지 붙었다. 또한 소형모듈원전(SMR) 수출 시 웨스팅하우스의 기술 자립 검증을 통과해야 한다는 조항도 들어갔다.

◇ 무리한 협의에 전임 정부 책임론까지 등장
이 같은 계약 내용이 알려지자 전임 정부가 체코 원전 수출이라는 성과를 거두기 위해 무리한 합의를 체결한 것 아니냐는 비판이 확산되고 있다.
실제로 이번 합의는 올해 1월에 한수원·한전과 웨스팅하우스가 '글로벌 합의문'을 체결하면서 이뤄졌다. 한수원의 기존 해외 원전 수주가 웨스팅하우스의 기술·지식재산권 분쟁으로 인해 막히고 실적 달성에 난항을 겪자 체코 사업을 위해 분쟁을 급하게 마무리한 결과라는 것이다.
한수원이 체코 원자력발전소 수출을 위해 주요 시장을 웨스팅하우스에 넘겨주고, 과도한 로열티를 제공하는 계약을 맺었다는 의혹이 커지면서 대통령실도 진상 파악을 지시했다. 국회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도 한수원을 향해 '굴욕 계약', '매국 행위'라며 강하게 비판했다.
다만 체코 두코바니 원전 1기 사업비가 13조원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웨스팅하우스에 주기로 한 원전 1기당 기술 사용료 2400억원은 전체 사업비의 약 1.85%다. 수익성이 떨어지더라도 원천 기술이 없는 한국으로선 불가피한 선택이었다는 설명이다. 김정관 산업부 장관이나 황주호 한수원 사장이 공통적으로 "계약은 정상적"이라고 말하는 이유다.
황주호 사장은 웨스팅하우스에 50년간 로열티를 지급하는 등의 계약을 맺었다는 논란과 관련해 "받아들이는 입장에서는 정당하다고 생각할 수 없다"면서도 "그러나 그 수준을 저희가 감내하고도 이익을 남길 만하다"고 말했다.
◇ 美 시장 진출 위한 불가피한 선택
원전업계는 현실적으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계약 내용은 이미 합의 당시 유출된 내용으로, 웨스팅하우스와의 분쟁이 해결되지 않으면 원전 수출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는 것이다.
다만 2017년 파산을 겪고 미국 내 프로젝트에서도 잇따라 난항을 겪은 웨스팅하우스의 설계·조달·시공(EPC) 경쟁력이 여전히 낮다며, 무리하게 양보할 이유가 없었다는 반론도 제기된다. 웨스팅하우스는 파산으로 인해 미국 내 주요 프로젝트인 보그틀 3·4호기, VC 서머 2·3호기 건설 과정에서 비용 문제로 어려움을 겪었다.
여기에 한수원은 웨스팅하우스와 합작투자 회사를 세우는 방식으로 미국 원전 시장에 진출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전략적 선택이라는 의견도 우세하다. 웨스팅하우스가 원천 설계 기술을 가지고 있지만 시공 역량이 없어 대규모로 원전 건설을 하려면 건설과 시운전 분야에 강점을 지닌 한수원 컨소시엄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상황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은 지난 5월 2050년까지 자국 내 원전 설비 용량을 400GW(기가와트)로 늘리는 내용을 담은 행정명령에 서명한 것도 미국 시장 진출을 위해 웨스팅하우스와 협력이 필요하다는 의미를 갖는다. 트럼프 대통령은 2050년까지 원자력 발전량을 지금의 4배로 늘리기로 했다. 이는 원전 300기를 새로 짓는 초대형 원전 프로젝트를 뜻한다.
미 행정부가 자국의 원전 확충을 위해 시공 능력에 강점을 가진 한국의 적극적 참여를 희망한다는 뜻을 우리 정부에 전한 것도 이를 뒷받침한다. 미국은 설계 등 원천 기술을 갖추고 있지만 1979년 스리마일섬 원전 사고 이후 신규 건설 인허가가 장기간 중단되면서 자국내 공급망이 사실상 붕괴됐다.
업계 관계자는 "물품 및 용역 구매 계약은 어차피 국내 기업에서 조달하기 어려운 분야라 한국에 크게 불리한 조건도 아닐 것"이라며 "미국 시장 진출 기회를 기대할 수 있지만 지분 비율 등에서 불리한 조건을 받을 수도 있다는 우려가 있어 지켜보고 있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