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실가스 감축 의무 명시…피해국 손해배상 청구권 인정···
한국, 1인당 배출량 OECD 4위…전환 속도 '더딘 걸음'

국제사법재판소(ICJ)가 기후변화 대응 의무를 소홀히 한 국가들에 대해 국제법 위반 책임을 물을 수 있다는 획기적 의견을 23일(현지시간) 발표했다. 기후변화로 피해를 입은 국가가 가해국을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는 법적 근거도 마련됐다.
유엔 최고 법원인 ICJ는 이날 네덜란드 헤이그 본부에서 열린 심리에서 이 같은 내용의 권고적 의견을 발표했다. 법적 구속력은 없지만 향후 전 세계 기후 관련 소송에서 강력한 준거가 될 것으로 전망된다.
이로써 미국, 일본, 한국 등 1인당 탄소배출 상위 국가들에 대해 국제법 위반 책임을 묻는 소송도 제기될 수 있어 산업 선진국들에 '경고등'이 켜졌다는 분석이다.
◇온실가스 감축 '법적 의무'로 격상
이오사와 유지 ICJ 재판장은 이날 15명 판사 만장일치로 채택한 133쪽 분량의 의견서에서 "국가는 기후에 해를 끼치는 모든 활동에 대해 법적 책임을 져야 한다"고 명시했다.
의견서는 "모든 국가는 온실가스 배출 저감과 기후변화 적응 조치를 취해야 할 법적 의무를 진다"고 분명히 했다.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 상당한 주의(due diligence)로 의무를 이행해야 하며, 이를 게을리할 경우 국제법 위반으로 간주된다고 경고했다.
특히 ICJ는 민간 부문 활동에 대해서도 국가가 법적 책임을 질 수 있다며 "국가는 기후 위기를 조장하는 기업 활동을 규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자국 관할 기업의 배출 책임까지 언급해 민간 부문 역시 국가 의무 이행에서 자유롭지 않음을 분명히 했다.
의견서는 배상 책임의 구체적 근거도 제시했다. 기후변화로 피해를 입은 국가(해수면 상승 피해 도서국 등)는 주요 온실가스 배출국을 상대로 국가 간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경우 피해국은 원상회복, 보상, 만족 등 완전한 배상을 받을 권리를 갖는다. 위반국은 불법 행위를 즉시 중단하고 재발 방지 조치를 제공해야 한다. 배상 책임은 '불법 행위와 피해 사이에 충분한 인과관계가 있을 때' 적용된다.
◇선진국 책임론 부각…민관 구분 없어
의견서는 탄소 배출로 기후변화 책임이 큰 선진국의 의무를 특별히 강조했다. "'공동의, 그러나 차별된 책임과 역량' 원칙에 따라 고배출 국가는 보다 높은 수준의 기후 행동 의무를 진다"고 명시했다.
ICJ가 기후 위기와 관련해 국가의 법적 책임을 명확히 규정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기존 국제조약의 해석 수준을 넘어 조약 불이행이 실질적 국가 책임과 배상 책임으로 연결될 수 있음을 공식화한 의미가 크다.
◇기후소송 3000건 시대…판례 영향력 확산
이번 의견은 법적 구속력은 없으나 향후 국제기구와 각국 법원이 기후 관련 사안을 심리할 때 유력한 해석 기준이 될 전망이다. 현재 세계 각국에서 3000건 이상의 기후 소송이 진행 중인 상황에서 피해국의 소송 근거가 크게 강화될 것으로 보인다.
파리협정 등 기후조약의 '책임 분담' 원칙을 근거로 고배출국과 선진국, 국제적 대기업에 직접 책임을 물을 수 있는 길이 넓어진 셈이다. 각국 정부와 대기업의 기후정책 강화 압력이 커질 전망이다.
ICJ 의견 발표 직후 주요국 인권위원회와 시민사회에서 감축 목표 재설정 요구가 즉각 제기되고 있어 각국 정부의 온실가스 감축 목표와 정책 수정도 불가피할 것으로 분석된다.
◇한국, '기후악당' 오명 벗을 전환점 될까
글로벌 데이터 플랫폼 데이터커먼즈에 따르면 한국의 1인당 탄소배출량은 세계 17위, OECD 국가 중 4위다. 이번 ICJ 의견서 발표로 한국에 대한 국제적 압박이 거세질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글로벌 기후변화대응지수(CCPI)에서 한국은 63위로 최하위권에 속한다. 국제환경단체 '기후행동네트워크'(Climate Action Network)는 지난해와 올해 2년 연속 한국을 '기후악당'(Fossil of the Day)으로 선정했다.
유엔은 한국에 2030년까지 2017년 대비 50% 감축을 권고했으나 한국은 40% 감축 계획만 제출한 상태다.
한국의 청정에너지 전환 속도도 더디다는 평가다. 글로벌 에너지 싱크탱크 엠버(Ember)가 발표한 '2025 글로벌 전력 리뷰'에 따르면 2024년 전 세계 전력 생산에서 청정전원 비중이 40.9%를 기록해 사상 최초로 40%를 넘었다. 태양광과 풍력 중심의 재생에너지 확대가 견인했다.
반면 한국은 이런 세계적 흐름과 동떨어져 있다는 지적이다. 지난해 한국의 화석연료 발전 비중은 60% 수준이었다. 태양광 발전 비중은 5%에 불과했고 풍력발전은 0.5% 수준에 머물렀다. 풍력발전량은 3년간 1%만 늘어나 신재생에너지 발전 속도가 글로벌 평균에 크게 못미치고 있다. 한국의 재생에너지 발전 비중은 10%로 세계 평균(32%)의 3분의 1 수준이다.
◇헌재 결정으로 이미 '경고등'
헌법재판소는 지난해 국내 환경단체와 청소년들이 "탄소중립기본법이 실효성이 부족하고 미래세대 권리를 침해한다"며 제기한 헌법소원에서 이 법 제8조 제1항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다. 정부의 기후 위기 대응이 미흡해 국민의 기본권, 특히 미래세대의 환경권을 침해한다는 취지였다.
한 환경단체 관계자는 "한국이 '기후악당' 국가라는 오명에서 벗어나려면 과감한 탄소감축 계획을 세우고 실천해야 한다"며 "그래야 한국이 국제법 위반 국가로 전락하는 것을 막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