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역 '묻지마 살인사건'이 발생한 화장실 입구 [사진=김택수 기자]

 

23살 여성이 잠시 화장실을 갔다가 일면식도 없는 한남자의 칼에 살해 당했다. 단지 여자라는 이유로 무자비한 폭력의 대상이 된 것이다.

지난 17일 새벽 1시 20분, 강남역 인근 상가의 '남녀공용 화장실'에서 20대 초반 여성 A씨가 숨친 채 발견됐다.

A씨는 흉기로 왼쪽 가슴 부위를 3~4차례 찔려 피를 흘리며 변기 옆에 쓰러져 있었다.

경찰은 사건 발생 9시간만에 강남역 일대를 수색해 30대 남성 용의자 B씨를 검거했다. 당시 그의 바지오른쪽 주머니에는 길이 32.5cm의 칼이 있었다.

용의자 B는 잔혹한 사고를 저지르고도, 강남역 일대의 인파 속으로 조용히 몸을 숨겼을 것으로 보인다. 그것도 뒷 주머니에는 칼을 소지한 채 말이다.


살인사건 피의자의 예상 도주로 [사진=김택수 기자]

 

예상 도주로를 걸어보면, 어디하나 인파가 없는 곳이 없다. 범행 현장은 강남 대로변과 인접해 1분도 채 소요되질 않는다.

많은 인파 속에 혹시 스쳐지났을지 모를 용의자를 떠올리면, 가슴이 서늘해져온다.

사건현장에서 남향인 강남역 10번 출구로 걸음을 옮기면서 마주친 행인들의 시선에는 평상시와 사뭇 다른 왠지 모를 경계의 눈빛이 느껴지기도 했다.


사건 이후 한산해진 강남역 대로변 [사진=김택수 기자]

 

길을 지나는 사람의 수도 부쩍 줄었다. 금요일인 이날 강남 거리풍경은 명절연휴에 고향 떠난 도시 풍경처럼 한산한 느낌마저 들었다.

사건현장에서 400미터쯤 걸었을까. 서서히 인파가 몰려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강남역 10번 출구였다. 이미 10번 출구 캐노피 우측은 색색의 포스트잇으로 물들어 있었다. 무자비한 폭력으로 목숨을 잃고 떠난 고인을 추모하는 글들이 붙어 있었다. 한송이 포스트잇 추모꽃을 보는 듯 하다.


피해여성을 추모하는 포스트잇들 [사진=김택수 기자]

 

현장의 포스트잇에는 "내가 될 수 있었다" "여성혐오를 멈춰주세요. 죽고싶지 않아요" "저는 아직 죽지 않았습니다" "돌 맞은 사람이 던진 사람보다 조롱받고 고통받는 세상, 그곳에서라도 행복하셨으면" 등의 글들이 나부꼈다.

추모글 중에는 "당신은 태어났기 때문에 이유없이 받는 생명의 위협을 느끼며 살아본적 있나요. 나는 살아 남았다"라며 붉은 리본이 붙어있기도 했다.


누군가 가져다 놓은 추모 문구 [사진=김택수 기자]

 

한 외국인 여성은 길을 지나다 한참을 멈춰서 있더니, 이내 입을 가리고 눈물을 흘리며 가던 길로 발길을 돌렸다.

누군가는 조용히 '그대, 슬픔을 묻지 마라' 라는 제목의 시집을 놓고 가기도 했다.

자리를 떠날 무렵, 백발의 한 할머니는 조용히 몸에서 주섬주섬 종이 한 장을 꺼내 주변사람들에게 테이프를 찾아달라 요청했다.

그 종이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다음 여성은 누구인가요"


추모 분위기에 동참하는 행인들 [사진=김택수 기자]

 

한편 박원순 서울시장은 강남역 인근에 마련된 추모 현장을 보존하겠다고 밝혔다.

19일 현장을 방문한 박 시장은 23세인 피해자를 기리기 위해 23초간 묵념을 하고 "죄 없는 여성이 그런 일을 당할 수 있는 사회라면 해결책을 마련해야 한다"며 "서울시는 슬픔으로 물든 추모현장을 많은 분들이 추모할 수 있도록 잘 보존하겠다. 보행이 불편하더라도 많은 분들이 포스트잇을 붙일 수 있도록 행정적으로 조치하겠다"고 말했다.

온란인 포털사이트에는 '강남역 추모 집회'카페도 개설됐다. 카폐운영자는 "오는 21일 오후 5~7시 서울 지하철 강남역 10번 출구 인근 공터에서 '침묵시위'의 형식으로 집회를 여는 안을 확정했다"고 20일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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