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21학번을 꿈꾸는 청년들에게
[기자수첩] 21학번을 꿈꾸는 청년들에게
  • 이한 기자
  • 승인 2020.12.03 09:25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19년 인생 중 가장 중요한 순간과 마주한 '예비 21학번'에게...

[그린포스트코리아 이한 기자] 몇 년 전 얘기다. 기자는 사석에서 고등학교 3학년 담임교사를 한 명 만났다. 그 교사는 최근 대학수학능력시험을 치른 학생의 진로 상담 문제로 고민 중이었다. ‘고려대학교 스페인어과를 보낼지, 아니면 연세대학교 영문과에 보낼지’ 결정하지 못해 머리가 아프다고 했다.

그 자리에 동석한 지인들이 저마다 한마디씩 거들었다. 어디가 더 취업에 유리한지, 어느 곳이 입학 안정권인지를 두고 다양한 의견을 쏟아냈다. ‘어차피 상위권 대학이니 둘 다 비슷하고, 결국 유학을 어디로 다녀오는지가 더 중요하다’라는 의견도 있었다. 하지만 그 자리에 있던 사람 중 누구도 그 학생이 무엇을 잘하고 어디에 가고 싶어 하느냐고 묻지 않았다. ‘점수 맞춰 대학 고르는’ 경향이 많이 줄었다고는 해도, 한편으로는 입시전쟁 현실이 여전한 것 같아 씁쓸했다.

24년 전 수능 날 아침이 생각난다. 그때 기자는 서울 한 사립고등학교에 재학 중인 수험생이었다. 고등학교 시절 학교 신문 만드는 동아리에서 활동했다. 기자가 되는 게 꿈이었고 신방과 신입생이 되는 게 목표였다.

수능 날 아침, 고사장 앞으로 후배들이 응원을 왔다. 그 추운 날 아침 일찍 현수막까지 만들어 시험장 앞에 나와준 동생들이 고맙고 대견했다. ‘아는 건 다 맞고 찍는 것도 모두 정답이어라’라고 외치며 고래고래 교가를 합창하던 녀석들에게 짐짓 ‘쪽팔리니까 조용히 해’ 하는 반응만 보이고 시크한 척 시험장에 입실했다.

힘들고 긴장한 날이어서 그랬을까. 사실은 후배들의 응원에 마음이 한껏 동했다. 학교 신문 만든다고 동아리방에서 같이 밤새던 시간이 떠올라 괜히 울컥했다. 그들이 불러주던 교가가 자꾸 귓가에 맴돌아 마음 속으로 교가를 따라 부르고 동아리 구호도 거듭 외쳤다. 그런데, 몰입이 너무 심했을까. 감동모드에서 시험모드로 빠른 전환이 안 이뤄졌다. 1교시 언어영억 듣기평가 첫 번째 문제 앞 부분을 다른 생각 하다가 못 들었다.

멘탈이 흔들렸다. 기자는 우등생이 아니었다. 언어영역 하나만 전교에서 놀았고 수학 과학은 1학년 때 포기한 ‘극단적인 문과 스타일’이었다. 사회와 외국어는 그저 그랬다. 언어영역에 400% 가중치를 주던 모 국립대학교 신문방송학과에 입학하겠다는 게 당시 기자의 전략이었다. 그런데 언어 출발이 꼬였다. 당황했다. 마음 잡고 안정 취하느라 귀한 몇 분을 날렸다.

점수는 그저 그랬다. 역대급 ‘불수능’(어렵다는 의미)으로 평가받는 학년이기도 했지만 애초에 기대치가 높지도 않았다. 목표로 하던 대학교 신방과는 고사하고 인서울 4년제도 어려웠다. ‘안전빵’으로 하나 넣어뒀던 강원도 소재 대학교 관광경영학과에 예비접수 마감 이틀 전날 겨우 붙었다. 낭패였다. ‘언론 공부를 하고 싶은데 관광이라고?’

2년제 대학 원서를 알아봤다. 신방과는 아니지만 비슷한 전공이 있었다. 어디로 가야 꿈과 목표에서 덜 멀어질까 고민했다. 대학을 2년만 다닌다는 상상은 교복을 입은 후로 한 번도 해본 적 없었다. 못 들은 첫 번째 문제와 흔들린 멘탈이 거듭 아쉬웠다. 1996년, 19살 겨울의 기억이다.

24년이 지났다. 나는 2001년에 기자가 됐고 지금도 기자다. 수능 날 아침 흐름을 놓쳤고 좋은 점수를 받지도 못했다. 목표 달성에 실패했다. 하지만 지금 ‘기자수첩’을 쓰고 있다.

오늘은 사상 유래 없는 혼돈의 수능이다. 답답한 마스크를 써야 하고, 고사장에서 발열 체크를 해야 하며 책상마다 불편한 칸막이가 섰다. 쉬는 시간마다 창문 활짝 열어 환기도 해야 한단다. 날짜는 계획보다 2주나 밀렸고 학교에서는 수업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으며 학원과 독서실도 마찬가지였다. ‘거리두기’가 여전한 화두인 오늘은, 떠들썩한 응원전도 없다.

코로나19가 우리를 괴롭히는 게 벌써 10개월째다. 그 사이 몇 차례 혼란의 사이클이 있었는데 지금은 그 사이클이 최고조에 올랐다. 하필 확진자가 이렇게 폭증하고 소란스러울 때 19년 인생 중 가장 중요한 순간과 마주해야 할 ‘예비 21학번’ 청춘들에게 괜히 미안하다. 코로나19에 삶이 위협받는 사람이 한둘이겠냐만, 그래도 오늘 아침 고사장으로 달려간 그들의 괴로움도 누구 못지 않을 터다.

‘지나고 보면 별 것 아니다’라는 조언이 있다. 지나가 본 사람이면 고개를 끄덕이겠지만 당사자에게는 씨알도 안 먹히는 소리다. 오늘 마킹한 답안지 정답률이 그들에게는 무엇보다 중요한 ‘별 거’란 의미다. 그러므로, 오늘 시험장을 찾은 49만여 명의 학생들이 하나같이 모두 ‘대박’이기를 바란다.

그리고 나면 21학번을 꿈꾸는 청년들이 다들 자신이 뭘 하고 싶은지, 어떤 모습으로 있을 때 행복할지 꼭 찾길 바란다. 직업을 찾으라는 의미가 아니다. 뭘 하고 싶은지 아직 모를 수도 있다. 특정 대학교 이름 말고는 아직 별다른 꿈이 없을 수도 있다. 그래도 괜찮다. 앞으로 살면서 천천히 발견해도 된다. 어제는 이미 갔고, 오늘도 지날 테지만 내일은 아직 안 왔으니까.

노래 가사 하나를 인용하자. 내일은 해가 뜬다. 다시 말하면, 내일도 역시 해가 뜬다는 의미다. 크고 밝고 뜨거운 해가, 여러분 모두에게 앞으로 매일 뜨리라.

leehan@greenpost.kr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