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함과 가치
명함과 가치
  • 환경TV
  • 승인 2012.02.07 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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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연만 환경부 기획조정실장의 명함에는 반달가슴곰과 4대강이 있다.

우선 우리말로 쓰인 쪽에는 지리산을 배경으로 반달가슴곰 한 마리가 나무에 올라 있는 모습의 합성사진이 명함의 반을 차지하고 있다. ‘반달가슴곰(멸종위기 1급) 학명 Ursus thibetanus ussuricus’이라고 설명까지 붙어 있다.영문으로 쓰인 쪽에는 4대강 발원지의 모습이 역시 반 가까이 인쇄되어 있다. 한강 검룡소, 낙동강 황지연못, 금강 뜬봉샘, 영산강 담양용소 등이다. 워낙 작은 글씨로 쓰여 있어 눈 나쁜 사람은 돋보기의 도움이라도 받아야 할 정도이지만, 받자마자 바로 명함지갑 속으로 들어갈 일은 전혀 없을 만큼 눈에 띠는 명함이다.

 

 

명함에 자신의 얼굴사진이나 캐리커처를 넣는 경우는 많지만, 이처럼 소관 분야의 상징을 인쇄하기란 아주 드물다. 명함은 곧 자신의 이름이요, 얼굴이기 때문에 다들 적극적으로 자신을 알리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이다.

정연만 실장의 설명.

“공직자의 명함에는 가치가 드러나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이름이 돋보이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맡고 있는 업무 또는 분야가 무엇인지, 어떤 가치를 추구하고 있는지를 한 눈에 알 수 있는 상징을 새겨야 한다. 이런 명함을 받아 든 국민들은 ‘이 공직자가 이런 가치를 추구하고 있으며, 이 기관에서는 이런 목표에 중점을 두고 있구나’라고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 아니겠는가? 일반 국민에게 우리 환경부의 가치를 세일즈 한다는 측면에서 오래 전부터 소관 업무를 나타내는 상징물들을 명함에 새기고 다닌다.

명함이다. 다들 자신의 이름과 얼굴이 돋보이도록 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명함이다. 그런데 정실장은 자신의 얼굴과 이름 대신 업무를 상징하는 반달가슴곰과 4대강을 그려넣었다. 환경부가 추구하는 가치를 일반 국민들에게 세일즈 하겠다면서.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참으로 반갑고 고마운 취지가 아닐 수 없다. 환경부는 반달가슴곰을 비롯한 멸종위기의 동식물들이 잘 보전되도록 하고, 우리의 생명줄인 4대강이 오염으로부터 보다 자유로울 수 있도록 끊임없이 감시하고 관리하여야 할 책무가 있는 기관이므로 정실장의 생각은 백 번 천 번 옳다.

필자도 정실장의 명함을 찬찬히 뜯어보고서야 4대강의 발원지를 정확하게 알 수 있었다. 영산강과 금강의 발원지는 알지 못했다고 하는 것이 맞고, 낙동강은 그저 한강과 비슷한 어디 쯤으로 기억하고 있을 뿐이었다. 따라서 이 무지한 백성 한 사람을 일깨웠으니 그것으로도 정실장의 의도는 성공을 거둔 것이 아니겠는가.

필자는 짧지 않은 기간을 기자로 일하면서 다양한 방면의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 명함을 주고 받았다. 명함이 쌓이면 약 5년 단위로 주기적으로 명함첩을 정리하곤 한다. 명함 교환으로 끝인 사람, 해당 직에서 물러난 사람,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긴 사람 등등 명함의 ‘주인의 현재’, 필자와의 관계지속 여부 등을 기준으로 하여 계속 보관할지 여부를 결정한다.

그렇다고 마구 버리거나 하지는 않는다. 20년이 다 되도록 보관하고 있는 명함들도 적지 않은데, 이들은 대부분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깊은 인상으로 남아 있는 분들이 그 주인공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보물처럼 간직하고 있는 이런 오래된 명함의 주인공들 가운데는 공직자들이 많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정부 부처를 출입할 때 이들 공직자 취재원들과 더 자주 만났고, 취재에 더욱 열과 성을 기울였으며, 기사 때문에 자주 크고 작은 갈등을 빚었던 탓이 아닌가 싶다. 공직자들의 생각과 판단, 결정 등이 국민의 실생활에 곧바로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탓에 그만큼 ‘워치독(watch dog)’의 역할에 보다 충실하려 했고, 그러다 보니 부딪치는 일도 많았다. 때로는 서로 언성이 높아지는 일도 있었고, 며칠 뒤 선술집에서 술잔을 나누며 사사로운 감정들을 털어내곤 했으니, 그런 공직자들이 인상에 깊이 각인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

공직자가 어떤 생각과 가치관을 갖고 있느냐가 국민들의 실생활에 미치는 영향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심대하다. 비단 실생활뿐이랴, 때로는 나라 전체가 들썩들썩 할 정도의 파괴력(?)이 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지난해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한-EU FTA 번역오류 파동만 해도 그렇다. 발효를 불과 석 달 앞두고 협정문에서 296개나 되는 번역오류가 발견되었는데, 그 가운데는 영어의 ‘and’나 ‘or’을 착각하는 등 아주 기본적인 것들도 포함되어 있다. 외교부의 담당 공무원들이 협정문을 한 번이라도 꼼꼼하게 읽어보았더라면,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되는대로, 그리고 대충, 전문번역사에게 맡겨놓았다가 나중에 결재판에 끼워 위로 올렸고, 그 위의 고위공직자는 아무 생각 없이 쓱쓱 이름 석 자 적어놓은 결과이다.

일부 공직자들은 뒷북행정이 가장 좋은 행정이라고 자조적으로 말하기도 한다. 국민들이 원하는 것, 정작 필요로 하는 것을 뒤쫓아 가면서 해결해 주니 이보다 나은 행정이 없으며, 정책의 출발도 여기에서 나와야 한다는 얘기다. 궤변이요, 스스로 철학 없음을 인정하는 무책임한 발상이다.

공직자들은 자기가 하는 일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에 늘 촉각을 곤두세우고 업무를 추진해야 한다. 보다 높은 소명의식을 바탕으로 정책을 입안하고, 실행계획을 수립하고, 결과를 파악해야 한다. 조금이라도 잘못 반영되거나 애초의 의도와는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면 곧바로 바로잡는 순발력도 갖추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국민들과 늘 소통하는 열린 자세도 필요하다.

그런데 이런 덕목은 공직자 자신이 어떤 가치를 우선시 하느냐에 좌우된다. 재직기간 별 탈 없으려 복지부동의 자세로 일하다 기회 봐서 민간기업 또는 로펌으로 튀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가, 아니면 나의 정책결정 하나로 손자 손녀들이 보다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하겠다는 의무감을 갖고 있느냐의 문제이다.

이제 두 달이면 국회의원 총선거가 치러진다. 그리고 연말이면 대통령 선거다. 분위기는 이미 ‘선거판’으로 돌아섰고, 어느 줄에 설지 열심히 재고 있는 공직자들도 많다고 한다. 특히 새로운 정부가 들어서면 정부의 조직체계에도 일대 개편이 뒤따를 것이므로, 벌써부터 계산기를 두드리느라 손가락이 바쁘다고 한다. 물론 밥그릇의 크기가 달라지는데 신경 쓰는 게 당연한 일이겠지만, 공직자로서의 기본적인 책무를 저버린 채 오로지 안테나만을 세우고 다닌다면 이미 공직자가 아니다. 그런 사람은 하루라도 빨리 정치인으로 옷을 갈아입어야 자신에게도 좋고 국민들도 행복하다.

명함에 가치를 새기고 다니는 공직자가 더욱 늘어나기를 소망한다면 너무 야무진 꿈일까.

<2012. 2.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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