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3일 개봉하는 영화 ‘덕혜옹주’를 두고 시사회 전부터 따가운 시선이 쏟아졌다. 우리의 뼈아픈 역사를 한 여인의 처절한 삶을 통해 미화하지는 않았을까, 덕혜옹주를 독립운동가로 영웅화하지는 않았을까 하는 우려의 시각이 그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덕혜옹주’에 역사 왜곡이나 억지 신파는 없다. 오히려 너무나 담담하게 그려내, 기승전결이 부족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인데다 전쟁 배경 영화에 흔하디 흔한 능력 출중의 슈퍼 영웅 한 명 나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영화를 본 후, 이상하게도 마음이 점점 저렸다. 영화가 감독 주입의 억지가 아닌, 관객 스스로 감동의 지점을 찾아갈 수 있도록 안내만 해 줬고 필자 역시 관객마다 다를 그 지점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덕혜옹주’(감독 허진호, 제작 호필름, 배급 롯데엔터테인먼트)는 일제강점기 시대, 일본으로 끌려간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녀 덕혜옹주의 삶을 그렸다. 여덟 살의 어린 나이에 아버지(고종황제)를 잃은 덕혜옹주, 일제는 그녀가 만 13세가 되자마자 강제 일본 유학길에 오르게 한다. 이후 고국 땅을 그리워하며 살아가던 덕혜옹주의 앞에 어린 시절 친구로 지냈던 장한(박해일)이 나타나면서 영친왕 일가와 덕혜옹주는 망명 계획을 세운다.

‘덕혜옹주’의 허진호 감독은 망명작전을 영화적 재미를 위한 허구적 요소로 삼았다. 이외에는 대부분 다큐멘터리와 역사적 사실을 최대한 반영했다. 그래서 영화는 덕혜옹주를 독립운동가로 표현하지 않는다. 오히려 왕족으로서의 역할과 개인의 삶 사이에서 고뇌하는 한 여인의 비참한 삶을 따라간다. 조선에 있는 어머니의 병환을 알게 된 덕혜옹주에게 일제가 귀국을 조건으로 내걸고 조선의 노동자들을 독려하는 강연을 강요하자 덕혜옹주가 갈등을 하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어린 시절, 고종황제가 실제 덕혜옹주의 배우자로 삼으려 했던 장한(박해일)과의 로맨스에도 억지 신파는 없다. 허진호 감독은 “고민을 거듭하다 두 사람의 키스 장면을 뺐다”며 “덕혜옹주 삶 자체를 집중 조명하고 싶었다”고 밝힌 바 있다. 흔한 키스신 한 번 없지만 관객은 두 사람의 절박한 포옹 한 번으로도 충분히 풍전등화의 역사를 살아가는 젊은 연인들의 복잡한 마음을 더욱 애틋한 시각으로 들여다볼 수 있다.

출처=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덕혜옹주와 그녀를 지키려 했던 독립운동가 김장한, 영화는 독립운동이나 망명작전을 조명하기보다는 시대적 배경 속에서 두 사람의 애처로운 몸부림을 섬세하게 그려낸다.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 ‘외출’ 등에서 유독 등장인물의 감정선을 온전히 관객들에게 전달해왔던 허진호 감독만의 특기가 살아나는 지점이다. 

덕혜옹주의 곁을 지키는 복순(라미란), 장한을 돕는 복동(정상훈) 등도 영웅으로 묘사되지 않는다. 덕혜옹주 손예진의 보모로 등장하는 라미란은 자신의 역할에서 더 나아가지도 지나치게 숨죽이지도 않은 채 열연하는데 찡한 울림을 관객의 가슴에 남긴다. 정상훈 역시 영웅심으로 뒤덮인 독립운동가라기 보다는 그저 친구와 함께 나라를 구하는 데 도움이 되고 싶었던 한 사람으로서 특유의 장기인 희극 연기에 욕심 부리지 않고 적정선에서 자신이 맡은 역할을 호연했다. 

전체적으로 조화가 잘 이루어져서일까. '덕혜옹주'를 보고 나온 관객들이 전한 울림의 포인트는 각기 달랐다. 덕혜옹주가 어린 나이에 어쩔 수 없이 어머니와 떨어져 일본으로 가게 된 장면, 어머니의 죽음을 알고 흐느끼는 장면, 귀국하는 장면 등 서로 다르다. 앞서 말했듯 억지가 아닌, 관객 스스로 감동 지점을 찾아낸 결과다. 

실제로 덕혜옹주는 죽기 전 정신병을 앓았다. 잠깐 의식이 돌아왔을 때 덕혜옹주는 “나는 낙선재에서 오래오래 살고 싶어요 / 전하 비전하(아버지 어머니) 보고 싶습니다 / 대한민국 우리나라”라는 자필의 쪽지 한 장을 남겼다. 이 세 문장에는 덕혜옹주가 자신의 고단했던 삶 속에서도 잊을 수 없었던, 무의식에까지 각인한 생각이 고스란히 담겼다. 이 자필에서 영감을 받았다는 감독과 배우들, 누군가의 인생에는 기승전결이 없다는 점을 명백하게 알고 담담히 영화에 임했다. 화려한 액션이나 그 흔한 영웅이 없음에도 ‘덕혜옹주’가 빼어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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