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소득: 일과 삶의 새로운 패러다임

붓다는 "공정심은 무엇이 옳고 그른지 살피는 마음에서 온다"고 했다. 그러나 '다원주의'를 표방하고 있는 현대사회는 하나의 중심이 사라지고 다양한 관점들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어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쉽게 가치판단하기 어렵다. 책은 마음의 양식이라 했던가. 정보의 홍수 속에서 세상의 옳고 그름을 살피기 위해 격주 화요일과 목요일 번갈아 '화목한 책읽기' 코너를 운영한다. [편집자주] 

《기본소득 : 일과 삶의 새로운 패러다임》 가이 스탠딩 지음 ·안효상 옮김·창비·2018년 7월 20일 발행·인문사회
《기본소득 : 일과 삶의 새로운 패러다임》 가이 스탠딩 지음 ·안효상 옮김·창비·2018년 7월 20일 발행·인문사회

 

이 책의 한 단락 : 기본소득으로 처음 구매한 게 무엇이냐고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시간을 샀습니다.”

[그린포스트코리아 박소희 기자] 2014년 2월 서울 송파구의 단독주택 지하 1층에 살던 박모씨와 두 딸이 생활고를 겪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자존감을 다쳐야만 복지에 접근하는 한국사회가 '기본소득' 담론을 본격적으로 꺼내들기 시작한 것이 바로 이 '송파 세 모녀 사건' 발생 이후다. "복지 혜택에 대한 문턱이 너무 높다"며 '보편적 복지'에 대한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한 것이다. 

페이스북 CEO 마크 저커버그도 2017년 모교인 하버드대학 졸업식 축사를 통해 “누구나 새로운 아이디어를 시도할 수 있도록 완충장치를 만들어야 한다. 이를 위해 보편적 기본소득(basic income) 같은 아이디어를 연구해야 한다”라고 언급했다. 

뿐만 아니라 클라우스 슈바프 세계경제포럼 회장과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 같은 오피니언 리더, 일론 머스크와 에릭 슈미트 같은 유명 벤처 자본가까지 현재의 경제정책과 사회정책이 지탱할 수 없는 불평등과 불의를 낳는다는 데 공감하며, 기술혁명과 ‘일자리 없는 미래’에 대한 인류 생존의 실마리를 기본소득에서 찾았다.

책 '기본소득: 일과 삶의 새로운 패러다임'은 '모두에게, 무조건, 정기적으로 지급되는' 기본소득이 우리의 정의와 자유를 보장하고 더 큰 사회변화를 추동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설파한다.   

◇인류의 오래된 실험, 기본소득: '유토피아'부터 '새로운 인권 헌장'까지

기본소득이 ‘4차 산업혁명 시대’의 혁신적 아이디어로 각광받으며 활발한 논의와 실험의 장으로 오기까지는 기본소득 운동의 기수라 할 수 있는 이 책의 저자 '가이 스탠딩'의 공이 컸다. 가이 스탠딩은 세계적 경제학자이자 런던대학 소아즈(SOAS)의 교수로서, 오늘날 불확실하고 불안정한 고용·노동 조건에 놓인 사람들을 일컫는 ‘프레카리아트’(precariat) 개념을 정립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1986년 기본소득유럽네트워크(현재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 이하 BIEN)를 공동 창립하고 30여년간 기본소득 운동의 최전선에서 활동해왔으며, 현재 BIEN 명예공동의장을 맡고 있다. 2016년 BIEN 서울 대회, 2017년 아시아미래포럼의 연사로 참여해 한국에도 이미 잘 알려져 있다. 

‘모두에게 권리로서 지급되는 돈’은 사실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1516)에 먼저 등장한다. 소설 속 인물은 ‘도둑질이 음식을 얻는 유일한 방법이라면 어떤 처벌로도 도둑질은 멎지 않을 것’이라며, 모든 사람에게 어느 정도 생활수단을 줌으로써 '도둑으로 시작해 시체로 끝나는 끔찍한 필연성 아래에 누구도 있지 않게 하는 것'이 처벌보다 훨씬 나은 방식이라고 주장한다. 16세기 소설에서 드러난 '누구나 존엄한 생존을 보장받을 권리'는 저자 가이 스탠딩이 참여해 유엔에서 작성한 '새로운 인권 헌장'(2004)으로 이어진다. 

기본소득 개념에서 ‘기본’이라는 말은 자신이 살아가는 사회의 극단적인 상황에서 생존을 가능케 하는 금액을 나타내며, 기본소득 옹호자들은 이 금액이 보편적·개별적·무조건적·정기적으로 지급돼야 한다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간단한 생각이지만 여기엔 간단치 않은 문제가 있다. 과연 모두에게 기본소득을 보장하는 것이 필요한가, 그리고 정당한가 하는 문제다. 

◇공유재로부터 발생한 소득은 모든 사람에게: 물론 빌게이츠라도

기본소득은 '보편성'을 원칙으로 한다. 이 원칙에 따르면 세계적 부호인 빌게이츠에게도 기본소득이 제공된다. 부유층은 이미 소득에 비례하는 많은 세금을 내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눈여겨볼 지점은 ‘기본소득은 감당할 수 없을 것’이라는 주장 자체가 '실증적'이기보다 매우 '정치적'이라는 주장이다. 저자는 “불평등은 급속하게 커지고 있는데 엘리트, 금권정치가, 금권정치를 뒷받침하는 기업이 벌어들이는 '지대소득'은 어마어마하게 늘고 있다. 소득을 낳는 모든 종류의 재산을 소유했다는 이유만으로 가져가는 이 막대한 지대소득으로 기본소득 기금의 많은 부분, 심지어 전부를 감당할 수 있다. 사회서비스를 없애거나 소득세율을 급격하게 올려야만 기본소득이 감당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의도적이든, 순진하든 간에 본질을 호도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지하수에는 본래 주인이 없지만 현재 그 생산수단을 소유한 일부가 그 소득의 대부분을 가져간다. 이에 저자는 “공유재와 부의 몫은 권리로서 모두에게 혹은 모든 시민에게 가야 한다"(145쪽)고 주장한다.

◇자본과 노동 모두 주목하는 기본소득: 노동과 일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

세계가 기본소득에 눈을 돌린 기저에는 4차 혁명으로 인한 '기술적 실업 대란'에 대한 염려가 깔려 있다. 그러나 저자는 '자동화'로 위험에 처하게 되는 일자리 수는 산업화 된 나라들 기준 9% 정도에 불과할 것으로 내다봤다. 그가 주목한 것은 ‘일자리 없는 미래’가 아니라 노동(일)의 체질이 변하는 미래다.

기술혁명으로 힘 있는 자본가에게 이익이 더 집중되는 한편, 일자리는 더욱 불확실하고 불안정해지면서 소득분배 문제가 심화되고 있다. 저자는 이런 현실을 인정하면서 일자리에 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을 ‘일자리’로, 즉 ‘사장들’에게 종속되는 처지로 밀어 넣는 것이 바람직한가?”

현재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많은 일자리는 ‘따분하고’ ‘사람을 멍청하게 만들며’ ‘비하적이고’ ‘사람을 고립시키며’ ‘위험하기까지 하다’. 저자는 노동을 신성시하면서 ‘일할 권리’를 주장하던 ‘산업의 시간’이 저물고 있음을, 그리하여 이제는 일할 권리만큼이나 ‘(싫은) 일을 하지 않을 권리’가 삶의 존엄을 지키는 데 중요해지고 있음을 강조한다. 그러면서 “기본소득은 오히려 사람들이 싫어하는 일을 거부하거나 이런 일에 대해서는 더 많은 보수를 요구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일자리의 성격을 개선하는 데 도움이 될 것(143쪽)"이라고 주장한다.

나아가 저자는 지불받는 노동(labour)이 가사노동·돌봄노동·사회참여 등 지불받지 않는 일(work)보다 우위에 있다는 생각 역시 산업화 시대의 산물이라고 지적한다. 지불받지 않는 일은 개인의 삶과 공동체에 절대적으로 필요하지만 지금까지 수치로 환산되지 못했다. 

저자는 기본소득이 의무적인 '노동' 대신에 좀더 다양한 '일'을 할 수 있는 여지를 주며, 위험부담이 있지만 좋아하거나 잠재성이 있는 일을 할 자유를 제공한다고 전한다.

◇한국에서 기본소득은 가능한가: 선택적 복지 vs 기본소득

2018년 9월부터 한국에서 만 6세 미만 자녀가 있는 가구를 대상으로 아동수당이 지급된다. 또 청년실업 문제를 타개하려는 목적으로 여러 지방자치단체에서 청년수당도 지급하고 있다. 한국은 아동·청년·노인·장애인 등 사회·경제적 안전망이 상대적으로 더 시급하다고 여겨지는 층을 대상으로 수당·복지서비스는 일부 마련돼 있다.

그러나 연령·소득·가구규모 등 자격기준에 따라 적용하는 선별적 지원에는 언제나 사각지대가 존재한다. 자격기준을 충족하지 못해 생활고를 겪다 벼랑끝에 내몰린 이들의 사례가 이른바 ‘세 모녀 법’ ‘예술인 복지법’ 추진으로 이어졌으나, 지원 요건을 충족하기는 여전히 까다롭다. 

이미 세계 곳곳에서 기본소득 파일럿이 시행됐거나 진행 중이다. 인도의 마디야프라데시주에서 6000명을 대상으로 파일럿을 실시한 결과, 아동의 영양공급과 학교 출석률이 높아지는 등 복지효과가 분명하고 사회적 공평이 개선됐으며, 기본소득 비판자들의 예상과 달리 ‘일’과 ‘노동’이 늘어나는 효과가 있었다.

핀란드는 실업자 2000명을 뽑아 아무 조건 없이 2년간 달마다 560유로(74만원)를 지급하고 그 효과를 분석하는 대규모 실험을 현재 진행하고 있다. 2016년에 시작된 이 실험은 2018년 말에 끝난다. 국내외 몇몇 언론은 '기본소득 실험 실패’를 단정하고 있다. 

기본소득 도입은 '윤리와 사회구성 원리(소유나 노동 등)를 근본적으로 바꾸는 일과 맞먹는 일'이기에 분명 강력하면서도 힘든 여정이 될 것이다. 그러나 '한국어판 서문'에서 말하고 있듯 우리는 의료보험 같은 보편적 사회보장 서비스를 유지해온 이력이 있다. 누구나 생존을 보장받을 권리, 한국도 가능할지도.(가이 스탠딩 지음·안효상 옮김·창비·4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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