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여의도 샛강 둘레길을 달리는 여의도마라톤클럽 회원들(사진 여의도마라톤클럽 제공)/그린포스트코리아
서울 여의도 샛강 둘레길을 달리는 여의도마라톤클럽 회원들(사진 여의도마라톤클럽 제공)/그린포스트코리아

인간이 맨 마지막에 빠져드는 스포츠가 마라톤이라고 한다. 그만큼 중독성이 강하다는 뜻이다. 장거리 달리기를 하지 않거나, 해 본 적이 없는 사람들로서는 42.195km를 달리는 그 행위가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건 당연하다. 서너 시간 이상을 죽기 살기로 내달리다니, 그저 미친 짓으로 보일 뿐이다. 

하지만 마라톤에 한 번 빠지면 헤어나기가 쉽지 않다. 42.195km 풀코스가 아니더라도, 5km나 10km, 21km를 달리고 난 뒤의 성취감은 경험한 사람만이 아는 희열이다.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고, 심장은 쾅쾅 뛰고, 숨은 턱턱 차올라 죽을 것만 같지만 목표했던 거리를 쉬지 않고 성실하게 달렸다는 뿌듯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그래서 오늘도 전국 각지에서 헤아릴 수 없이 수많은 마라토너들이 달린다. 서울만 해도 한강변 도로와 상암동 하늘공원순환도로, 남산순환도로 등 ‘달리기 명소’에는 달리는 사람들로 넘쳐난다. 잠실운동장, 목동운동장, 서울대운동장 등에도 마라토너들이 쉼 없이 트랙을 돌고 있다. 퇴근길에 서울시내 곳곳을 게릴라처럼 뛰는 러닝 크루도 쉽게 볼 수 있다. 비공식 통계이기는 하지만, 현재 대한민국 마라톤인구가 1000만에 달한다고 할 정도이니, 그야말로 마라톤 붐이다.

마라톤 열기는 경제성장과 관련 있다는 분석이 틀린 말은 아닌 듯하다. 1인당 국민소득(GDP)이 1만 달러를 넘어서면 마라톤 붐이 인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먹고 사는 데 급급하다가 건강과 삶의 질을 따지는 단계에 들어선다는 것이다. 중국의 경우만 봐도, GDP가 1만 달러를 넘어선 2019년 이후 마라톤인구가 가히 폭발적으로 늘고 있다. 매년 중국에서 열리는 마라톤대회만 1600개를 훌쩍 넘는다. 하루 평균 4개 이상이다. 

중국인들이 이처럼 마라톤에 열광하는 이유에 대해 중국 인민일보는 ‘(생활속) 초조함에 저항하는 한 방식으로 인기를 얻고 있다’고 분석하기도 했다. 빠르게 변화하는 중국사회에서 마라톤을 통해 빡빡한 일상에서 벗어나 성취감을 느끼고 싶어 한다는 해석이다.

마라톤 애호가의 한 사람으로서 인민일보의 분석에 기꺼이 한 표를 던진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돌아가는 생활에서 잠시나마 오로지 나 자신에게 집중하는 시간을 선사하는 운동이 바로 마라톤이기 때문이다. 호흡과 팔다리의 움직임, 그리고 허벅지에서 엉덩이를 거쳐 복부에 이르는 한 덩어리의 근육뭉치에 집중하며 달리다보면 다른 생각이 끼어 들 틈이 없다. 달리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오로지 내 몸이 하는 소리에만 귀를 기울여야 부상 없이, 계획대로 목표한 거리를 완주할 수 있다는 사실은 가장 확실한 실존의 증명이다. 

이런 매력이 마라토너들을 끊임없이 주로(走路)에 서게 한다. 반가운 사실은 달리기의 트렌드가 ‘그냥 달리기’에 머무르지 않고 바뀌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MZ로 지칭되는 젊은 세대에게서 뚜렷하게 확인할 수 있는 현상인데, 그들에게 장거리 달리기는 사회문화적으로 남다른 의미를 갖는다. 달리기는 일종의 놀이이며, 의미를 부여해서 가치를 구현하는 활동의 하나이기도 하다.

국내 주요 마라톤대회에서 10km부문에 젊은 참가자가 눈에 띄게 늘었다는 점에서 유희로써 달리기가 각광받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힘들게’ 42km 달리지 않고 10km ‘정도만’ 달리면서 마음껏 즐기는 추세다. 마라톤대회에 42km 풀코스 또는 21km 하프코스 참가자 보다 10km가 더 많다는 점이 이를 반증한다. 젊은 참가자들은 함께 달리면서 사진 찍고 공유하는 행위 자체를 즐길 뿐 기록에는 크게 관심이 없어 보인다. 

MZ마라토너들은 함께 달리면서 다양한 의미를 추구하는 일에도 적극적이다. 러닝 크루를 중심으로 달리기 자체를 통해, 또는 달리기를 하면서 구현할 수 있는 가치를 찾아낸다. 쓰레기를 주우면서 달리는 ‘플로깅(Plogging)이 대표적이다. 플로깅하는 장면을 사진으로 찍어 인스타그램 등 SNS에 올린다. 쓰레기를 함부로 버리지 말자는 구호보다 몇 배 설득력 있는 활동이다. 자선단체 또는 구호활동기관 등이 주최하는 마라톤대회에서 기꺼이 참가해서 공익적 가치를 제고하는데도 적극적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달리기 인구가 급증하고 덩달아 마라톤대회도 우후죽순 늘고 있지만 마라톤대회의 운영 수준은 이를 따라가지 못한다. 특히 대한육상연맹의 공식인증을 받는 일부 메이저대회의 경우 참가비는 크게 올렸으면서도 운영방식 등은 나아지지 않았다고 참가자들은 볼 멘 소리다. 참가비를 물가인상률에 맞춰 적정한 수준으로 올린 것이 아니라 20~30% 가량 큰 폭으로 올리고선 ‘고작’ 에너지젤 한 두 개 더 얹어 주는 것으로 생색을 낸다. 마라토너들의 수준을 ‘고작’ 그 정도로밖에 가늠하지 못한다. 

국내 메이저 마라톤대회가 그 이름값을 제대로 하려면 이제 다른 방식이 필요하다. 달리기인구의 증가세를 매출확대의 기회로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대회운영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리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마라톤대회에 안주하지 않고, 특별한 가치를 부여하는 대회로 리모델링해야 한다. 

예를 들면 친환경적인 요소를 강하게 적용, 지속가능성을 추구하는 메이저 마라톤대회를 선보이는 것이다. 주로에 5km마다 급수대를 설치하고 물을 나눠줄 때 일회용 종이컵 대신 재사용 또는 재활용이 가능한 컵을 사용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출발 전 물품을 맡길 때 사용하라고 대회 참가자들에게 대형 비닐봉투를 나눠주는데, 이를 에코백과 같은 재생 소재로 바꿔서 대회 이후에도 오래도록 사용할 수 있도록 한다면 참가자들로부터 크게 호응을 얻을 수 있다. 

영화, '1947보스톤'의 한 장면.(제공 배급사)/그린포스트코리아
영화, '1947보스톤'의 한 장면.(제공 배급사)/그린포스트코리아

추석연휴 직전에 개봉한 영화, ‘1947보스톤’은 1947년 보스톤마라톤에서 세계신기록으로 우승한 서윤복의 스토리를 담고 있다. 1936년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우승자 손기정, 3위 입상자 남승룡이 천부적 소질의 서윤복을 단련시켜 마침내 월계관의 주인공으로 만드는 과정이 줄곧 잔잔한 감동으로 흐른다.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영화답게 이전까지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되는 재미가 쏠쏠하지만, 무엇보다도 우리나라가 ‘마라톤 강국’이었다는 점을 새삼 깨닫고 자부심을 느끼게 된다. 

오늘(10월5일) 항저우 아시안게임 마라톤 경기가 열렸다. 한 달 뒤인 11월5일에는 국내 메이저대회 가운데 하나인 JTBC마라톤이 서울에서 펼쳐진다. JTBC마라톤은 서울 상암동 월드컵경기장을 출발, 여의도-마포-종로-천호대교-길동을 거쳐 잠실운동장에 골인하는 코스다. 서울시내를 서북에서 동남으로 가로지르며 달리는 유일한 대회로, 달림이들이 가장 선호하는 대회이기도 하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대회인 만큼 참가자들은 ‘참가 그 이상’을 기대한다. ‘그 무엇’을 어떻게 줄지는 주최측의 몫이다. 

국내 3대 마라톤대회는 JTBC마라톤을 비롯, 동아일보 서울마라톤, 조선일보 춘천마라톤이다. 매번 참가신청이 곧바로 마감될 정도로 마라톤 애호가들의 참가열기가 뜨거운 대회들이다.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마라톤인구를 ‘평생고객’으로 붙잡기 위해서도 마라톤대회 주최 기관들의 깊은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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