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금 저축률을 자연스럽게 높이는 힘, ‘디폴트옵션’의 지혜

리처드 세일러(Richard H. Thaler)의 행동경제학이 던지는 교훈

2025-11-24     강영선 쿼터백 연금연구소장/그린포스트 연금전문위원
/인공지능 생성 이미지

“지금 마시멜로 하나를 먹을래, 아니면 15분 후에 두 개를 받을래?”

1960년대 스탠퍼드대의 ‘마시멜로 실험’은 인간이 즉각적인 보상에 얼마나 약한지를 보여준 대표적 실험이다. 기다림의 가치를 아는 아이들은 나중에 더 많은 마시멜로를 받았고, 그들은 성장 후에도 더 높은 성취를 보였다.

이 단순한 실험이 오늘날 우리의 퇴직연금 저축 행동을 설명할 수 있다.

‘지금의 소비’가 아니라 ‘미래의 안정’을 선택하는 능력, 바로 그 문제를 다룬 학자가 행동경제학자가 리처드 세일러다. 그는 인간이 완전히 합리적인 존재가 아니라 ‘한계가 있는 존재’라는 점을 인정하며, 사람들이 스스로 더 나은 선택을 하도록 돕는 정책 개입을 제시했다. 그것이 바로 ‘넛지(Nudge)’, 그리고 이를 연금제도에 접목한 디폴트옵션(Default Option)’이다.

리처드 세일러의 행동경제학이 바꾼 정책의 패러다임

세일러는 인간의 경제적 행동을 설명하기 위해 세 가지 전제를 제시했다.

① 제한된 합리성: 사람은 모든 정보를 알 수 없기 때문에 ‘최적’이 아니라 ‘만족할 만한’ 결정을 한다.

② 사회적 선호: 사람들은 자신의 이익뿐 아니라 공정성, 타인의 행동을 고려한다.

③ 자기절제의 결여: 우리는 언제나 좋은 선택을 하려 하지만, 의지력에는 한계가 있다.

이 세 가지는 ‘넛지’ 정책의 근간이 되었다. 정부나 제도가 사람들의 선택을 강요하지 않으면서도, 조용히 더 나은 방향으로 유도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기본으로 설정된 선택(default)’을 바꾸지 않는 경향이 강하다. 이 특징을 세일러는 퇴직연금 정책 설계에 적용했다.

디폴트옵션이 만든 연금 혁명

미국 – 옵트인에서 옵트아웃으로

과거 미국의 퇴직연금(401k)은 ‘가입하고 싶은 사람만 신청’하는 옵트인 방식이었다. 가입률은 49%에 불과했다. 세일러는 이를 ‘자동가입 후 탈퇴 가능(opt-out)’ 방식으로 바꾸자고 제안했다. 결과는 놀라웠다. 가입률이 86%로 급등했다.

하지만 또 다른 문제가 남았다. 대부분의 가입자가 낮은 저축률(2~3%)과 안전자산 위주 투자에 머물렀던 것이다. 그래서 세일러는 SMarT(Save More Tomorrow) 프로그램을 제안했다. 임금이 오를 때마다 자동으로 저축률이 함께 오르는 제도다.

사람들은 ‘지금의 돈’을 내놓는 대신 ‘미래의 인상분’을 미리 약속하는 데 훨씬 덜 저항했다. 이 단순한 설계 하나로 미국의 퇴직연금 적립률은 꾸준히 상승했다.

스웨덴 – 디폴트옵션이 높은 수익을 낸 이유

스웨덴의 PPM(프리미엄연금)은 485개의 펀드 중 개인이 직접 고를 수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가입자가 비합리적인 선택을 하면서 낮은 수익률을 기록했다.

이에 정부는 별도 선택이 없을 경우 국가가 운용하는 기본펀드(AP7 Safa)로 자동 투자되도록 디폴트옵션을 강화했다. 이 펀드의 10년 연평균 수익률은 15%(2024년 기준)으로 굉장히 높은 편이다. 디폴트옵션을 선택한 것이 가장 현명한 선택이 된 것이다. 성공의 원천은 주식 등 위험자산 투자비율이 높은 것도 하나이다.

호주 – 점진적 강제와 세제 인센티브의 조화

호주는 1992년 ‘슈퍼애뉴에이션(Superannuation)’ 제도를 도입했다. 처음엔 소득의 3%만 저축하도록 하여 부담을 줄였고, 2026년까지 12%로 점진적 인상을 추진 중이다. 또한 중도인출 시 48%의 고세율을 부과해 불필요한 해약을 막았다. 반면 저소득층에는 세액 환급을 통해 ‘손실 회피 심리’를 자극, 자발적 참여를 유도했다. 즉, 정부는 ‘강제’와 ‘유인’을 절묘하게 조합해 연금 저축 문화를 정착시켰다.

우리나라의 디폴트옵션제도, 왜 강력한 넛지가 되지 않는가?

우리나라도 2023년 7월부터 디폴트옵션제도를 도입했다. 하지만 시행 1년이 채 지나지 않아 구조적 한계가 드러났다. 고용노동부, 은행·보험사들이 설정한 디폴트옵션의 대부분 초저위험·저위험 상품이다. 연 3~4%의 수익률로는 노후소득을 보장하기 어렵다. 여기에 퇴직연금 수령방식도 여전히 일시금 수령 방식이 높다.

한국 디폴트옵션제도가 실효성을 얻기 위해서는 원리금보장상품을 디폴트옵션 상품에서 완전히 제외하는 방향으로 바꿔야 한다.여기에 덧붙여야 하는 것은,

첫째, 실질적인 제도 교육이 필요하다. 퇴직연금 가입자들은 디폴트옵션의 존재조차 모르는 경우가 많다. 은행 창구나 IRP 계좌 개설 과정에서 기본 설명조차 이뤄지지 않는다.

정부는 퇴직급여 수령자 대상의 실무형 교육 프로그램을 의무화 해 제도 인식률을 높여야 한다.

둘째, 퇴직급여의 ‘부분적 강제 연금화’가 필요하다. 지금처럼 일시금 수령이 대부분인 구조에서는 연금의 본래 목적이 사라진다. 초기에는 일정 비율(예: 30%)을 강제 연금화하고, 장기적으로 100% 연금 수령으로 전환하는 단계적 접근이 필요하다.

셋째, 디폴트옵션의 선택 구조를 단순화해야 한다. 현재는 가입자가 7개 위험등급 중 하나를 ‘직접 선택’해야 한다. 이는 ‘선택을 돕기 위한 제도’가 오히려 ‘선택의 부담’을 주는 역설이다. 정부가 표준화된 TDF(Target Date Fund) 등 자동설계형 상품을 기본값으로 제시하고, 별도 선택이 없는 경우 이를 적용하는 방향으로 개선해야 한다.

리처드 세일러는 “사람들을 강제로 끌고 가지 말고, 옳은 길로 자연스럽게 밀어주라”고 했다.

우리의 디폴트옵션제도는 아직 ‘넛지’가 아니라 ‘설명서’에 머물러 있다. 사람의 본성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제도 설계는 변경할 수 있다. 한국의 디폴트옵션이 ‘마시멜로를 기다릴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첫걸음이 되기를 기대한다.

강영선 그린포스트코리아 연금전문위원   쿼터백그룹 연금연구소 소장으로 재직중인 연금분야 전문가이다. 30년간 다양한 금융업종에 종사하면서 상품개발, 자산관리, 투자 컨설팅, 대체자산운용 및 마케팅 업무를 수행하였다. 퇴직연금제도를 주제로 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으며 현재 경희대학교 등의 대학에서 겸임교수로 활동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