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연금 “위탁자산이 ‘ESG 워싱’? 국제기준 따랐다”
"국내 기준 없어"… ‘책임투자 공시’ 도입·구체화 필요
국민연금공단이 위탁운용 자산의 약 97%가 ‘ESG(환경·사회·지배구조) 워싱’이라는 일각의 지적에 대해 ‘유엔 책임투자원칙(PRI)에 근거’한 운용이라고 반박했다. 실제 펀드 운용에 ESG 고려가 부족하다는 비판에는 ‘국내 기준 부재’를 이유로 들었다.
4일 그린포스트와의 전화 통화에서 국민연금 관계자는 “책임투자 금액을 공개하는 것에 관해 우리도 외부 자문을 받았다”라며 “지금 국내에는 따로 그런 기준이 없기 때문에 유엔에서 하는 PRI를 적용했고, 그에 맞춰서 공시도 했다”라고 밝혔다.
지난달 31일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소속 남인순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국민연금이 제출한 국정감사 자료를 근거로, 국민연금이 ‘책임투자 자산’으로 분류한 위탁운용 자산 총 383조9000억원 중 97.11%(372조8200억원)가 실질적 책임투자로 보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나머지 2.89%(11조800만원)만 ‘ESG 투자’로 인정할 수 있다는 게 남 의원의 분석이다. 국민연금의 책임투자 위탁운용 자산 중 ESG 투자로 인정할 수 있는 자산은 △국내주식 책임투자형 위탁자산 6조6700만원 △국내 ESG 채권 위탁자산 1조8600만원 △해외 ESG 채권 위탁자산 2조5500억원이었다.
국민연금은 국내외 주식과 국내외 채권 등 전통 자산 대부분을 책임투자를 이행해야 할 자산군으로 지정했다. 이는 국민연금 금융부문 총 자산의 약 83%(올해 8월 기준)를 차지한다. 대체투자(부동산·인프라·사모펀드 등)는 책임투자 이행 자산군에서 제외했으나 점진적으로 확대 지정하겠다는 방침이다.
위탁운용사를 선정 절차에서도 국민연금은 ‘스튜어드십 코드 및 책임투자 관련 정책 도입 여부’를 평가 항목에 반영한다. 이 평가를 통과한 운용사에 맡긴 자금을 책임투자 자산으로 집계해 왔다.
그러나 이러한 분류 방식은 “책임투자 정책 보유 여부”를 ESG 투자 실적과 동일시한다는 점에서 느슨하다는 지적을 받아 왔다. 운용사가 책임투자 정책을 보유했어도 모든 펀드에 ESG를 적용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남 의원의 문제 제기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즉, 국민연금이 위탁사 선정 과정에서 ESG 요건만 확인할 뿐, 실제 자산운용 과정에 ESG 반영 여부를 검증하지 않아도 책임투자 자산으로 분류한다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이번 논란의 근본 배경으로 국내 책임투자 공시 기준 부재를 꼽는다. 해외 연기금은 자산군별 ESG 통합 방식, 배제 기준, 기업 관여(Engagement) 활동 등 세부 항목을 공개하지만, 국내는 공시 항목이 표준화돼 있지 않아 기관별 해석 차이가 발생한다는 지적이다.
한 연기금 관계자는 “국민연금의 공시 방식이 잘못됐기보다 국내에 명확한 기준이 없다 보니 공시가 기관 자율에 맡겨져 혼선이 생기는 측면이 있다”라며 “책임투자 공시 세부 기준이 마련되면 ‘ESG 워싱’ 같은 논란은 거의 다 해소될 것”이라고 말했다.
남 의원은 국민연금이 위탁운용사에 대해 책임투자 관련 정보를 제출받고 이를 검증한 뒤 공시하는 체계가 필요하다고 제언했다. 구체적으로 △ESG 고려 여부 △고려 방식과 전략 △ESG 각 영역별 반영 수준 △ ESG를 고려하지 않은 경우 사유 등이다.
또한 이러한 정보 공개는 위탁운용뿐 아니라 직접운용 자산에도 동일하게 적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국민연금의 책임투자 자산 분류는 매우 자의적이어서 자본시장의 지속가능성을 왜곡할 뿐 아니라, ‘코스피 5000’ 달성을 위한 우리 기업의 체질 개선과 밸류업 정책에도 부정적 영향을 줄 수 있다”며 “직접·위탁운용 전반에 ESG 공시를 강화하고, 책임투자로 명명할 수 있는 임계점을 설정해 ESG 워싱을 차단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편,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는 ESG 워싱 방지와 투자자 보호를 위해서 일명 ‘명칭 규칙’(Names Rule)을 통해서 펀드의 상품명과 해당 포트폴리오가 일치하는 정도, 즉 임계점을 80%로 설정했다. 유럽연합(EU)도 80%를 제시하고 있다.
국민연금은 지난해 수립한 ‘2025~2027년 책임투자 실행계획’에서 위탁운용사 책임투자 공시체계 도입을 검토 과제로 포함했다. 다만, 구체적인 적용 시점과 평가 기준은 확정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