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 총수, 208조원 대미 투자··· ‘방어’ 대신 ‘선공’ 택했다

이재용·정의선·최태원, 역대급 대미 투자로 보호무역 정조준 트럼프 관세 압박··· 관세 회피 아닌 시장 장악 파트너십 AI 반도체·전기차·조선업, ‘선택과 집중’ 전략적 승부수

2025-08-26     신종모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최태원 SK그룹 회장,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 등 주요 그룹 수장들이 이재명 대통령의 미국 순방에 맞춰 총 1500억달러(약 208조원) 규모의 투자 카드를 꺼내 들었다./인공지능 생성 이미지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최태원 SK그룹 회장,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 등 재계 총수들이 이재명 대통령의 미국 순방에 맞춰 총 1500억달러(약 208조원) 규모의 투자 카드를 꺼내 들었다. 한국 기업 역사상 최대 규모인 이번 ‘빅딜’은 단순한 관세 회피를 넘어 트럼프 2기 행정부의 보호무역주의를 미국 시장 선점의 기회로 삼겠다는 정면 승부로 풀이된다.

26일 정계와 재계에 따르면 한·미 양국 기업인이 25일(현지시간) 백악관에서 열린 정상회담 직후 ‘한·미 비즈니스 라운드 테이블’에서 대규모 협력 방안을 논의했다.

회의에는 한국 측에서 삼성, 현대차, SK, LG 등 4대 그룹 총수를 포함한 16명이 참석했고, 미국 측에서는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 스테퍼니 포프 보잉 CEO, 데이비드 루벤스타인 칼라일그룹 공동 회장, 사미르 사맛 구글 안드로이드 생태계 사장 등 21명이 자리했다.

참석자들은 첨단산업(반도체·AI·바이오), 전략산업(조선·원자력·방위산업), 공급망(자동차·배터리) 협력 방안을 집중 논의했으며, 양국 기업이 공동으로 글로벌 시장을 선도할 수 있다는 데 공감했다.

한국 경제사절단은 총 1500억달러 규모의 대미 투자 계획을 발표하며 한·미 경제·기술 동맹 강화를 약속했다.

이재용 회장이 이끄는 반도체 투자가 핵심의 축이다. 삼성전자는 텍사스주 테일러 공장에 기존 370억달러에서 대폭 확대한 500억달러 이상을 투입한다. 여기에는 테슬라와 체결한 23조원 규모의 차세대 AI6 칩 공급 계약과 애플 이미지 센서 생산을 위한 첨단 패키징 시설이 포함된다. 

최태원 회장 휘하 SK하이닉스는 인디애나주 웨스트라피엣에 39억달러를 투자해 반도체 업계 최초로 미국에 고대역폭 메모리(HBM) 첨단 패키징 공장을 건설한다. 오는 2028년 하반기부터 차세대 HBM 등 AI 메모리 제품 양산에 나선다.

정의선 회장의 결단도 파격적이다. 현대차그룹은 기존 210억달러에서 260억달러(약 36조원)로 투자 규모를 확대했다. 이는 현대차그룹이 지난 1986년 미국 진출 이후 40년간 투자한 총 205억달러를 넘어서는 사상 최대 규모다. LG에너지솔루션은 향후 4년간 200억달러 이상을 미국 배터리 밸류체인 구축에 쏟아붓는다. 이미 미시간주에서 연간 16.5기가와트시(GWh) 규모의 리튬인산철(LFP) 배터리 생산을 시작했고, 현대차와 조지아주 합작공장도 본격 가동 중이다.

조선업 재건 프로젝트인 ‘마스가(Make American Shipbuilding Great Again)’도 구체화됐다. 한화그룹은 미국 필라델피아 조선소에 7000만달러를 투자해 연간 건조능력을 현재 1~1.5척에서 2030년까지 10척으로 확대한다. HD현대는 서버러스 캐피탈, 한국산업은행과 삼각 협력을 통해 수십억 달러 규모의 한미 조선산업 공동 투자 프로그램을 조성하고, 미국 조선소 인수와 현대화, 해양 물류 인프라, 자율운항·인공지능(AI) 등 차세대 기술 개발에 나선다.

관세 회피 넘어 ‘지역 경제 파트너’ 위상 확보

트럼프 2기 행정부의 고율 관세 정책에 대한 한국 기업들의 대응은 단순한 관세 회피를 넘어선다. 트럼프 대통령의 “미국에서 제품을 만들면 관세가 없다”는  발언에 따른 현지화 전략은 미국 내 고용 창출과 지방정부와의 협력 강화를 통해 ‘지역 경제 파트너’로서의 위상을 확보하는 과정이다.

특히 현대차의 경우 트럼프 대통령이 “현대차는 미국에서 철강을 생산하고 미국에서 자동차를 만들 것이므로 관세를 내지 않아도 된다”고 직접 언급하며 현지화 전략의 효과를 입증했다. 포스코도 현대제철의 루이지애나주 전기로 제철소 건설에 공동 투자를 검토 중이어서 철강부터 자동차까지 완전한 현지 생산 체계가 구축될 전망이다.

업계 전문가는 “이러한 현지화 투자는 향후 반덤핑·상계관세 등 통상 이슈에서도 ‘카운터 채널’을 형성하는 기반이 된다”며 “미국 내에서 고용을 창출하고 지역경제에 기여하는 기업으로 인식되면 통상 분쟁 시에도 정치적 소프트파워를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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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소기업 동반 진출·ESG 경쟁력 확보가 관건”

이번 대기업들의 대규모 투자가 가시적 성과를 낼 경우 협력사와 중소기업들의 동반 진출 효과가 활성화될 전망이다. 반도체 패키징 장비, 배터리 소재, 조선 기자재 등 한국 중소기업들이 대기업의 미국 진출과 함께 현지로 확장하는 ‘플랫폼 효과’가 나타날 것으로 기대된다.

다만 성공을 위해서는 몇 가지 과제가 남아있다. 먼저 환경·사회·지배구조(ESG) 관점에서의 지속가능성 입증이 필요하다. 현대제철의 친환경 전기로 제철소나 LG에너지솔루션의 LFP 배터리 투자는 친환경 우위 요소이지만, 미국의 엄격한 환경 규제에 대응하려면 탄소 저감 성과와 재생에너지 조달 계획을 구체적으로 제시해야 한다.

또한 환율 변동과 정책 변화도 주요 변수다. 달러 강세가 장기화될 경우 현지 비용 부담이 증가할 수 있고, 2026년 중간선거 이후 미국 정부의 보호무역 기조 변화 가능성도 고려해야 한다. 지정학적 리스크로 인한 아시아 공급망 충격 시에는 오히려 현지화 투자의 민첩성이 경쟁 우위가 될 수 있다는 점도 긍정적 요소다.

업계 한 관계자는 “이번 1500억달러 투자는 한미 경제협력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면서 한국 기업들이 글로벌 공급망 재편의 주도권을 선점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며 “성공적인 현지화를 통해 미국의 ‘제조업 부활’ 파트너가 되는 동시에 중장기 글로벌 경쟁력을 확보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