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80주년] 대한민국 금융 독립 역사: 우리은행

2025-08-14     김학형 기자
1909년 대한천일은행 본점, 광통관이 문을 열었다. 1914년 화재로 일부 소실 뒤 복원됐으며, 현재 우리은행 종로금융센터로 쓰인다./국가유산포털

1899년 설립된 대한천일은행은 황실과 민간이 함께 만든 ‘최초의 민족자본 은행’이었다. 일본의 경제 침탈에 맞서 조선인 중심의 금융을 지키려는 노력은 '광복 80주년'을 맞는 오늘날 우리은행으로 이어지고 있다.

대한천일은행의 설립과 역할

1897년, 고종은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에 올랐다. 청나라 영향력을 벗어난 자주독립국임을 만방에 알리고, 열강의 간섭 가운데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일본과 러시아의 간섭은 계속됐고, 갈등은 훗날 러일전쟁(1904~1905년)으로 비화했다.

이러한 정세 속에서 1899년 1월 22일, 일단의 상인들이 탁지부(현 기획재정부 격)에 ‘대한천일은행 창립 청원서’를 제출했다. 며칠 뒤 탁지부에서 이를 승인했고, 곧 은행이 정식으로 문을 열었다. 이 모두가 불과 열흘 남짓 만에 진행됐다.

‘청원-인가-설립’ 과정이 이처럼 빠르게 진행된 것은 당시 대한제국 황실과 정부가 민족 자본 은행의 필요성을 절감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고종 황제는 황실 자금인 ‘내탕금’을 대한천일은행 자본금에 보탰고, 민간 상인들도 뜻을 모아 출자했다.

이렇듯 대한제국 황실과 민간의 자본이 함께 출자해 설립된 대한천일은행은 일본의 경제적 압박, 금융 침탈에 맞서 조선인 중심의 금융 체계를 지켜내고자 한 민족 자본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였다.

창립 당시 사동궁(寺洞宮) 일부를 사용하던 대한천일은행 본점은 1909년 광통관으로 이전했다. 서울 종로구 남대문로 118에 남아 있는 광통관 건물은 현존하는 최고(最古) 은행 점포 중 하나로, 지금은 우리은행 종로금융센터로 쓰인다. 

1910년 8월 ‘한일합병조약’으로 대한제국이 국권을 강제로 빼앗기면서, 대한천일은행도 1911년 일본 제일은행에 합병돼 조선상업은행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해방 후 상업은행으로 개편되면서 최초의 민족자본 은행의 전통을 계승한 우리은행으로 발전했다. 광복 이후 금융 재건 과정에서 대한천일은행의 뿌리는 오늘날까지 우리은행의 역사적 자산으로 남아 있다.

‘국내 최초·최고 은행’은?

한편, 국내 최초의 민간 은행은 1897년 설립된 한성은행이며, 이를 계승한 조흥은행은 2006년 신한은행과 합병했다. 존속법인은 조흥은행인데 사명을 신한은행으로 바꿨기 때문에, 신한은행 연혁은 ‘한성은행(국내 最古 은행)’으로 시작한다.

우리은행은 대한천일은행이 일제에 맞서 민족 상권을 지키고자 황실·민간 자본으로 설립됐다는 점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민족자본 은행’, ‘최초의 민족 정통은행’ 타이틀을 강조한다. 각기 다른 관점에서 ‘최초’를 주장하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