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수교 60년··· 기업들, 미래 기술로 '한일 파트너십 시대' 연다

친환경 기술로 경쟁·국제분업 넘어 "경쟁력 업그레이드" 글로벌 공급망 재편, 무역 전쟁 함께 넘는다

2025-06-20     신경훈 편집인
한일 수교 60주년(6월 22일)을 맞아  한일 기업들이 과거와 다른 차원의 협력의 시대를 열고 있다./인공지능 생성 이미지

"앞마당을 같이 쓰는 이웃처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서로에게 도움되는 관계로 발전해 나가기를 기대합니다."

지난 17일 G7회의가 열린 캐나다에서 열린 한일정상회담 자리에서 이재명 대통령이 이시바 시게루 일본 총리에게 한 말이다.

뒤집어 생각하면 '앞마당을 같이 쓴다는 것'은 , 마당의 쓰임새에 따라 두 나라는 '친구'도 '원수'도 될 수 있다는 함의를 갖는다. 양국 구성원들이 마당에서 무엇을 어떻게 벌이느냐가 양국 관계를 결정짓게 될 것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그런데 한일 수교 60주년(6월 22일)을 맞은 요즘, 한일 기업들이 과거와 다른 차원의 '한일 파트너십의 시대'를 열고 있어 주목된다. 특히 배터리, 수소차, 친환경 조선, 반도체 등 한국이 강점을 갖고 있는 미래 산업 능력이 글로벌 공급망 재편의 흐름 속에 한국과 일본 기업의 동맹을 이끌고 있다. 이는 경쟁 또는 국제 분업으로 해석됐던 과거 두 나라의 관계를 넘어서는 흐름이다. 양국의 '마당'에 서로 도와야 살 수 있다는 환경이 조성되고 있는 것이다.

한국 배터리-일본 완성차 '케미'로 글로벌 경쟁력 확보

미래 산업으로 떠오른 배터리 분야에서도 한일 파트너십이 가동됐다. 현재 미국 오하이오주 페이엇카운티에서는 LG에너지솔루션과 혼다가 연말 양산을 목표로 44억 달러 규모의 전기차 배터리 합작공장을 건설 중이다. 이는 한국 배터리와 일본 완성차 간 첫 합작 사례다.

여기서 생산된 배터리는 미국 내 혼다 공장에 공급된다. 이어 도요타도 2023년 LG에너지솔루션과, 닛산은 올해 SK온과 각각 미국용 배터리 공급 계약을 체결했다.

이로써 일본 완성차 3사가 모두 한국 배터리 업체와 파트너십을 맺게 됐으며, 일본의 자동차 제조 노하우와 한국의 배터리 기술력이 결합해 글로벌 전기차 시장 경쟁력을 높이는 움직임이 본격화되고 있다. 미중 무역전쟁으로 촉발된 글로벌 공급망 재편의 움직임 속에 한국과 일본 기업들이 손잡고 위기를 기회로 전환하려는 움직임인 것이다.

이뿐 아니라, 지난 19일 LG에너지솔루션은 일본 도요타통상과 손잡고 미국 내 리사이클 합작법인을 설립한다고 밝혔다. 양사는 최근 계약을 맺고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 윈스턴 세일럼 지역에 배터리 리사이클 합작법인 'GMBI'(Green Metals Battery Innovations, LLC)를 설립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GMBI는 LG에너지솔루션 미국 공장의 생산 과정에서 발생하는 공정 스크랩, 도요타통상에서 수거한 북미 지역 사용후 배터리 및 스크랩 등으로 블랙매스를 생산한다. 여기서 생산될 블랙 매스는 추가 공정을 거쳐, 리튬, 코발트, 니켈 등 메탈로 추출된 뒤 양극재 및 배터리 제조 공정을 거쳐 도요타 전기차 배터리로 탑재될 예정이다. 

이번 협력으로 LG에너지솔루션은 안정적인 원재료를 확보하고, 도요타통상은 배터리 순환 경제를 구축하게 된다. 글로벌 배터리 수요가 급증하고 있는 가운데, 미중 간 무역전쟁으로, 배터리 제조를 위한 핵심 광물을 확보하려는 양측의 필요가 맞아 떨어진 것이다. 

일 해운사 한국 조선에 '깜짝' 발주 ··· 해운 ·조선 협력의 '신호탄'

HD현대중공업이 일본 3대 해운사(NYK·MOL·K Line) 합작회사인 오션 네트워크 익스프레스(ONE)로부터 총 2조4000억원 규모의 초대형 컨테이너선 8척을 수주했다고 16일 확인됐다. 

HD한국조선해양이 공시한 이번 계약은 공식적으로는 '아시아 소재 선사'로만 명시됐지만, 항만 산업 전문매체 1Truck은 실질적 발주처가 ONE이라고 보도했다. 이 소식은 한국 산업계로서는 '깜짝' 뉴스였다. 

일본 해운사가 한국 조선소에 발주를 맡긴 것은 이례적인 일로, 양국 관계 개선 및 협력 강화의 신호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ONE이 미국의 중국산 선박에 대한 제재를 의식해, 중국 조선소를 배제하고 HD현대중공업에 발주한 것으로 해석한다.  

이번 수주는 HD현대중공업의 고효율, 저탄소 선박 기술력을 바탕으로 글로벌 친환경 수주 시장에서 경쟁력을 입증한 것이지만 한일 관계의 긍정적 변화도 영향을 끼쳤다는 분석이다. 특히 본격적 한일 조선 및 해운 협력의 신호탄이 될 수 있다는 기대감도 나온다.

첨단 기술 공동 개발

LG화학과 일본 정밀세라믹 전문기업 노리타케가 지난 16일 차세대 자동차용 전력반도체에 적용될 '실버 페이스트'를 공동 개발했다고 발표했다.

120년 이상 정밀 세라믹 기술력을 보유한 노리타케는 반도체·자동차 산업에 연마 휠, 전자부품용 소재, 소성로 등을 공급하는 일본의 대표 기업이다.

이번 협력은 한국 기업의 혁신적 개발력과 일본 기업의 축적된 기술력을 결합해 글로벌 경쟁력을 갖춘 신제품을 개발하는 대표적 사례로 평가된다. 과거 한쪽의 부품을 다른 한쪽이 들여와 제품을 만드는 국제 분업 관계의 거래와는 성격이 다소 다르다는 평가다. 양측의 기술을 합쳐, 글로벌 경쟁력을 완벽하게 갖춘 제품을 제조한 것이다.

현대차-도요타 수소동맹, 미래 시장 선점 나서

현대자동차와 도요타자동차의  수소 동맹도 한일 기업 협력의 전환점으로 평가된다. 지난해 10월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과 토요타 아키오 토요타차그룹 회장이 경기 용인 에버랜드 스피드웨이에서 만나 수소차 논의를 시작한 것이 그 출발점이었다.

수소차 분야 세계 1위 현대차와 2위 도요타는 2024년 청정수소 기준 일원화, 수소 충전기술 표준화, 제품 호환성, 공동 기술 개발 등을 논의하며 미래 수소전기차 시장 선점에 나선 것이다. 현대차의 빠른 의사결정과 기술력, 도요타의 대규모 생산 능력과 글로벌 네트워크라는 각자의 강점을 결합한 시너지 효과를 기대하고 있다.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자인 현대차와 도요타가 왜 수소 동맹을 맺었을까? 우선 양측은 규모의 경제를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수소차 충전소의 경우만 해도, 설치하는 데 약 30억~50억원이 들어간다. 전기차 충전소의 6~10배나 많은 금액이다. 양측이 해외에서 충전소만 공동으로 구축한다고 해도, 해외 시장에서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중국에 대한 견제도 깔려있다. 중국의 수소차 기술은 현재 한·일보다 뒤떨어지지만, 국가적 지원으로 단기간에 전기차 산업을 세계 최고 수준으로 끌어올린 중국의 잠재력은 위협적이라는 것이다. 두 회사의 협력으로 초격차로 앞서 나가겠다는 전략이다.

소원했던 두 진영의 관계가 외부 환경 변화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크게 변했던 예는 과거에도 찾아볼 수 있다. 영국과 프랑스는 1904년 영불협정을 맺고 '견원지간'에서 '친구'로 대전환했다. 당시 독일제국은 강력한 확장주의인 '세계정치'(Weltpolitik)를 표방하고 무제한 건함 경쟁을 선포해 유럽 국가들의 위협으로 떠올랐다. 또한 영국과 프랑스는 러일전쟁에서 무기력한 러시아의 모습을 확인하곤 새로운 동맹이 절실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두 나라는 생존 앞에서 과거는 문제될 것 없다고 판단했다. 영원한 적으로 남을 것 같았던 양국은 절묘하게 맞아 떨어진 이해관계를 계기로 과감하게 동맹의 길로 나갔다.과거엔 정부의 의지가 중요했지만, 자본주의가 꽃핀 현재엔 기업의 결단이 국가 관계에 영향을 끼친다.

글로벌 질서의 급격한 변화와  '레드테크'로 무장한 중국의  부상으로 한국과 일본의 기업은 분업이 아닌 파트너십의 시대를 열고 있다. 두 나라가 공유한 마당에 협력이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이런 흐름이 두 나라 산업 경쟁력을 강화시키고, 또한 국교 정상화 60주년을 맞아, 다른 부문에서의 화해와 협력을 불러오는 변곡점이 되길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