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원전 부활' 속속 선언… "에너지 안보·AI 시대 대비”

벨기에·이탈리아 등 유럽 주요 국가 탈원전 폐지 공식화 에너지 안보 위기에 EU 정책 변화…독일도 입장 선회

2025-05-22     진경남 기자
에너지 안보, 탄소중립, 전력 수급 확보의 중요성이 커지면서 탈원전에 앞장섰던 유럽 주요국들이 잇달아 '원전 부활' 대열에 합류하고 있다./인공지능이미지 생성

탈원전에 앞장섰던 유럽 주요국들이 잇달아 방향을 틀고 ‘원전 부활’ 대열에 합류하고 있다. 벨기에는 22년 만에 탈원전 정책을 공식 폐기하며 신규 원전 건설을 허용했고, '탈원전의 상징'이던 독일도 유럽연합(EU)의 원자력 친환경 분류에 반대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내놓고 있다.

벨기에 의회는 지난 15일, 새 원자로 건설을 허용하는 '원전 산업 부활 계획'을 가결했다. 벨기에는 2003년 탈원전 선언 후 신규 건설을 중단하고 기존 원전을 올해까지 전면 폐쇄할 방침이었다. 그러나 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이후 에너지 수급 불안이 현실화되자 기존 정책을 뒤집었다.

이듬해에는 신규 원전 2기의 수명을 10년 연장하기로 했고, 가장 오래된 원전의 폐쇄 시점도 2025년에서 2027년으로 미뤘다.

이 같은 흐름은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고 있다. 이탈리아는 1990년 마지막 원전을 폐쇄하며 세계 최초로 탈원전을 실현한 국가였으나, 올해 2월 정부가 원자력 재개 법안을 통과시켰고, 3월에는 의회가 원자력 기술 사용을 공식 승인했다.

덴마크도 마찬가지다. 1985년부터 원자력 발전 금지를 유지해온 덴마크는 최근 라르스 오고르 에너지·기후 장관이 소형모듈원자로(SMR)에 대한 기술적 검토에 나서겠다고 밝히며 입장 변화를 예고했다. 대규모 정전을 겪은 스페인도 원전 폐쇄 계획을 재검토 중이다.

프랑스와 영국은 이미 원전 수명 연장과 신규 건설에 돌입했다. 프랑스는 신규 원전 6기 건설을 추진하고 있으며, 영국은 힝클리포인트 C 건설과 더불어 SMR 개발에 속도를 내고 있다. 네덜란드와 스웨덴도 신규 원전 계획을 세웠다.

◇ 탈원전 고집하던 獨 입장 선회

탈원전의 대명사로 불린 독일도 발걸음을 돌렸다. EU 차원에서 원자력을 친환경 에너지로 인정하는 분류 체계를 만드는 데 더 이상 반대하지 않기로 한 것이다. 프리드리히 메르츠 총리가 이끄는 신정부는 프랑스 등 원전 친화국이 원자력을 재생에너지와 동등하게 취급하는 데 더 이상 반대하지 않기로 하며 원전 부활 흐름에 동참했다.

메르츠 총리는 과거 당내 경쟁자였던 앙겔라 메르켈 전 총리의 탈원전이 저렴하고 안정적인 전기 공급을 가로막는다고 지적했고, 올라프 슐츠 전 총리가 독일 내 마지막 원전 세 곳을 폐쇄한 것도 비판했다.

다만 메르츠 총리는 재래식 원전의 재가동은 고려하지 않지만 SMR과 핵폐기물을 남기지 않는 핵융합 기술 등 신기술에 투자하겠다고 밝히며 기존 대형 원전 재가동에는 부정적인 입장을 밝혔다.

◇ 에너지 안보·탄소중립·AI 전력 수요… 3중 압박이 원전 회귀 이끌어

유럽의 급변하는 원전 정책의 핵심 배경은 '에너지 안보'와 '전력 수급 안정'이다. 러시아발 에너지 공급 불안은  유럽에 값비싼 대가를 안겼다. 천연가스 가격 급등과 공급 차질로 전기료가 치솟으며 산업 경쟁력을 위협했고, 각국은 자구책 마련에 나서야 했다.

2050년 탄소중립 및 기후변화 대응도 기존 화석연료 대체를 위한 안정적인 에너지원 확보를 절실하게 만들었다. 프랑스 마크롱 대통령은 "2050년까지 탄소 순배출 제로를 달성하고 전력을 싸고 안정적으로 공급하려면 원자력 외에 대안이 없다"고 강조했다.

여기에 최근 인공지능(AI) 산업 확장으로 인한 데이터센터 전력 수요 폭증도 한몫했다. 안정적이고 저렴한 전력을 공급하지 못하면 디지털 산업에서 도태될 수 있다는 위기감이 각국의 정책 전환을 부추겼다. SMR은 이 같은 전력 수요를 효율적으로 감당할 수 있는 대안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단 요르겐센 EU 에너지 커미셔너는 "SMR 같은 차세대 원전 기술은 유럽의 미래 에너지 전략에서 핵심적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