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DDX 사업자 선정 지연에, 중소 협력업체 “더 이상 버티기 힘들다”
HD현대중공업·한화오션 대립, KDDX 사업자 선정 1년 이상 지체 KDDX 사업에 약 400여 개 중소기업 직간접적 연관 대립 vs 협력··· “어제의 친구가 오늘의 적이다”
“1년 전만 해도 작업장이 북적였는데 이제는 직원들 절반이 떠났습니다. 남은 사람들도 일감이 없어 하루 종일 공장만 지키고 있는데 더 이상 버틸 여력 없어요.”
한국형 차기 구축함(KDDX) 사업자 선정이 지속해서 지연됨에 따라 단순히 HD현대중공업과 한화오션의 피해를 넘어 수백 개 중소 협력업체에 심각한 타격을 주고 있다. 8조원 규모의 KDDX 사업이 HD현대중공업과 한화오션 간 갈등으로 1년 넘게 표류하면서 이들에 부품을 납품하는 협력업체들이 연쇄적으로 무너지고 있다.
25일 업계에 따르면 방위사업청은 전날 방위사업기획관리 분과위원회를 열고 ‘KDDX 상세설계 및 선도함 건조 기본계획안’을 1호 안건으로 논의했으나 결국 불발됐다. 이는 지난달 17일 이후 두 번째 연기로, 30일 예정된 방위사업추진위원회(방추위)에서도 논의되지 않을 전망이다.
방사청은 애초 지난해 초 KDDX 사업자를 선정하기로 했으나, 선정 방식을 놓고 두 대기업의 이견이 좁혀지지 않으면서 일정이 차일피일 미뤄지고 있다.
KDDX는 선체와 이지스 체계를 모두 국산 기술로 건조하는 첫 국산 구축함 사업으로, 오는 2030년까지 6000t급 차세대 구축함 6척을 건조할 예정이다.
이 과정에서 방산 대기업들의 갈등은 크게 부각 됐으나 정작 가장 큰 피해를 보는 중소 협력업체들의 고통은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
산업통상자원부 조사에 따르면, KDDX 사업에는 약 400여 개 중소기업이 직간접적으로 연관돼 있다. 이들 대부분은 대기업의 결정에 생존이 좌우되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창원 소재 모 기업 대표는 “지난해 전기요금이 10% 올랐지만, 기업 입장에서는 20~30% 오른 것 같다”며 “원자재 가격까지 올라 부담이 크다”고 말했다.
또 다른 기업 관계자는 “KDDX 사업 참여를 위해 최근에 수십억원을 들여 장비를 새로 들였지만, 사업 지연으로 장비 유지비만 지출만 하고 있다”며 “일감이 없는 상황에서 대출 이자만 한 달에 수천만 원을 내야 하니 막막하다”고 토로했다.
방산 중소협력업체들은 수익성 측면에서도 대기업에 비해 현저히 불리한 구조다. 한국산업연구원(KIET)에 따르면, 대기업 방산업체의 영업이익률이 8% 이상인 반면, 협력업체들은 3%대에 그치고 있다. 특히 중소 협력업체의 이익률은 더 낮은 2.9%에 불과하다.
방산 중소기업 10곳 중 3곳 적자에 시달려··· 폐업 고민까지도
KDDX 사업 지연은 단순한 일감 부족을 넘어, 방산 생태계 전반의 위기로 확산되고 있다. 이미 방산 중소기업 10곳 중 3곳은 적자에 시달리고 있으며, 폐업을 고민하는 업체가 늘고 있다. 올해는 더 많은 업체가 위기에 몰릴 것으로 예상된다.
KDDX 사업 지연의 충격파는 방산업체가 집중된 지역경제에도 심각한 타격을 주고 있다. 한화오션이 있는 거제와 HD현대중공업이 자리한 울산 등 방산업계 핵심 지역들이 동시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특히 대기업이 사업 수주에 실패할 경우, 지역 중소 협력업체들은 심각한 경영 위기에 직면할 가능성이 크다. 이는 곧 지역 일자리와 경제 기반의 붕괴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협력업체 한 관계자는 “한 대기업이 있는 공단의 중소업체 여러 곳이 휴업에 들어갔다”며 “인근 식당과 상점들도 이미 폐업했거나 휴업한 곳이 많다”고 했다.
협력업체들은 금융지원의 아쉬움도 지적했다. 모 협력업체 대표는 “위기 상황에서도 금융지원이 미흡한 상황”이라며 “우리은행이 최근 홈플러스 협력업체에 긴급 경영안정자금을 지원하기로 한 것처럼, 방산 중소기업에 대한 금융지원도 강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KDDX 사업 지연은 국가 방위력 약화뿐 아니라, 방산 생태계 붕괴라는 더 큰 위기를 불러올 수 있다. 대기업의 갈등 속에서 중소 협력업체들의 신음이 커지고 있는 가운데 정부의 신속하고 균형 있는 결정이 필요하다.
업계에서는 정부가 KDDX 사업자 선정을 더 이상 미루지 말고 조속히 결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이에 산업부는 이러한 상황을 심각하게 인식하고 대책을 마련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구체적으로 HD현대중공업과 한화오션 양사가 공동으로 사업을 수행하는 방안에 대해 적극 검토 중이다. 그러나 공동 개발·동시 건조 방식이 실패한 사례가 미국에서도 있어서 신중하게 접근하고 있다.
산업부는 방사청과 협력해 사업자 선정 지연으로 타격을 입은 협력업체 지원 방안을 마련하고 있다. 협력업체의 자금난 해소를 위한 특별 융자 프로그램과 기술 인력 유지를 위한 보조금 지원을 고려하고 있다.
업계 전문가는 “산업부는 KDDX 사업자 선정이 조속히 이뤄질 수 있도록 최대한 지원해야 한다”며 “또한 협력업체들이 안정적으로 사업을 영위할 수 있도록 공정한 거래관행 정착과 지원책 마련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양사, KDDX 사업자 선정 ‘내부 경쟁’ vs 원팀 ‘외부 협력’
방사청이 지난 2월 수상함 수출은 HD현대중공업, 수중함 수출은 한화오션이 주관하고 서로를 지원하는 양해각서 체결을 토대로 양사가 ‘원팀’을 형성해 해외 시장 진출을 통한 협력업체 물량 확보에 주력할 계획이다.
이는 HD현대중공업과 한화오션이 개별적으로 글로벌 사업 수주에 나서지 말고 각자 경쟁력 있는 분야에 특화해 수주전에 나서자는 취지였다.
지난해 10조원 규모 호주 호위함 사업 입찰에서 일본, 독일, 스페인 등은 정부와 기업이 원팀을 이뤄 수주전에 뛰어든 반면, 한국 기업은 개별적으로 사업에 참여해 고배를 마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양사 원팀 전략에는 구성원들 사이에 동조과잉을 야기한다는 지적이다. 또 합리적인 토론을 어렵게 만들며 다른 대안을 고려하지 못하도록 유도한다는 것이다.
업계 관계자는 “KDDX 사업과 같은 국가 중요 방위사업에서는 ‘내부 경쟁과 외부 협력’이라는 균형 잡힌 원칙이 필요하다”며 “원팀은 각 기업의 기술력과 경쟁력을 제대로 활용할 수 있는 구체적인 협력 모델이 뒷받침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방산 전문가는 “조속한 결정과 협력업체 보호가 필요한 시점이지만, 사업방식 결정에 있어 공정성과 효율성이 균형을 이뤄져야 한다”며 “국가 안보가 걸린 전력 사업이 기업들의 이전투구로 지체되고 있는 상황에서 산업부는 KDDX 사업이 더 이상 지연되지 않도록 방위사업청과 긴밀히 협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