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나마타‧이따이이따이 등 일본 4대 공해병
국내에도 원인불명 ‘온산병’ 등 비슷한 사례

[그린포스트코리아 홍민영 기자] 크게 부풀어 오른 입술과 동공이 풀린 눈동자, 안쪽으로 곱아들어 딱딱하게 굳어버린 손가락, 지나치게 작은 키와 깡마른 다리. 다나카 지쓰코(田中実子)씨는 하루 종일 말도 못 하고 먹지도 못한 채 제자리에 서서 빙글빙글 돌기만 한다. 미나마타병(水俣病) 발병 60년, 지쓰코씨는 이렇게 돌다 쓰러지는 일만 끝없이 반복해 왔다. 

80세가 넘은 고령의 고다케 세쓰코(小武節子)씨는 오늘도 끝이 보이지 않는 싸움 속으로 뛰어든다. 젊은 시절 남편을 니가타미나마타병으로 잃고 스스로도 미나마타병을 앓은 후 세쓰코씨의 일상은 싸움의 연속이다. 세쓰코씨의 상대는 정부, 기업, 그리고 사람들의 차별과 편견이다. 

(Pixabay 제공) 2018.11.24/그린포스트코리아
(Pixabay 제공) 2018.11.24/그린포스트코리아

◇일본의 4대 공해병

미나마타병과 니가타미나마타병(新潟水俣病), 욧카이치 천식(四日市ぜんそく), 이따이이따이병(イタイイタイ病)을 일컬어 '일본의 4대 공해병'이라고 한다. 

이들의 공통점은 우선 환경오염을 원인으로 하는 질병이라는 것이다. 또 일본이 급속한 경제 발전을 거듭하던 1950년대부터 1970년대 사이에 사회적 화두로 떠올랐고, 아직까지도 현재진행형이다. 

미나마타병은 1956년 5월, 일본 구마모토현(熊本県) 미나마타(水俣)시에서 처음 보고됐다. 첫 환자는 미나마타만(湾) 인근에 사는 2세(한국 나이 4세)와 5세(한국 나이 7세)의 다나카 자매였다. 동생이었던 다나카 지쓰코씨는 “신발을 못 신겠어”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쓰러진 뒤 걸을 수도, 말할 수도 없게 됐다. 

원인은 수은 중독. 인근의 신일본질소(CHISSO)비료 주식회사가 폐수를 하천에 무단방류하면서 폐수 속 수은이 어패류에 축적되고, 그 어패류를 먹은 주민들이 병에 걸렸다. 미나마타병에 걸린 주민들은 중추신경 마비, 감각 장애, 시야 협착, 난청, 언어 장애, 손발 떨림, 정신 착란 등 고통에 시달렸으며 심하면 사망하기도 했다. 더욱 심각한 것은 임산부가 미나마타병을 앓을 경우 태아까지 영향을 준다는 점이다. 

살아남은 환자들은 말 그대로 목숨만 건졌을 뿐 정상적인 생활은 하지 못했다. 생존자 중 한 명인 지쓰코씨는 혼자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제대로 씹지도 못해 간병인이 떠먹여주는 죽을 간신히 삼킬 뿐이다. 한 끼 식사에 한 시간이 걸린다. 

2017년 4월 기준 공식적으로 확인된 환자 수는 2282명. 그 중 약 1900명이 사망했다. 

미나마타병은 ‘먹이사슬’과 ‘환경오염’의 연쇄 작용으로 일어난 인류 최초의 공해병이라는 점에서 전 세계에 충격을 안겨줬다. 

미나마타병으로 곱아버린 손. (유튜브 다큐멘터리 캡처) 2018.11.24/그린포스트코리아
미나마타병으로 곱아버린 환자의 손. (유튜브 다큐멘터리 캡처) 2018.11.24/그린포스트코리아

니가타미나마타병은 일본 니가타현(新潟県)에서 1964년 무렵 발병해 1965년 5월 니가타대학 교수의 보고로 처음 확인됐다. 미나마타병과 원인 및 증상이 비슷해 ‘제2의 미나마타병’이라고도 불린다.

원인은 역시 메틸수은이었다. 화학회사인 쇼와전공(昭和電工)이 메틸수은이 함유된 폐수를 인근 강에 방류한 것이다. 주민들은 수은에 오염된 민물고기를 먹고 미나마타병과 똑같은 중추신경 마비, 감각 장애, 난청 등에 시달렸다. 

선례로 인해 미나마타병의 위험성을 알고 있던 일본 정부는 인근에 사는 젊은 여성들의 머리카락을 조사해 일정량 이상의 수은에 중독된 경우 아이를 낳지 못하도록 했다.

1967년 주민들은 쇼와전공을 상대로 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1971년 법원은 피해자들의 손을 들어 줬고, 쇼와전공은 여성들에 대한 위로금과 배상금을 전달했다. 그러나 증상이 있어도 정부의 인정을 받지 못한 일부 주민들은 여전히 재판을 이어가고 있다. 

고다케 세쓰코(小武節子)씨도 재판에 참여한 환자 중 한 명이다. 1982년 세쓰코씨는 쇼와전공과 정부를 상대로 한 손해배상 2차 소송에 원고로 참여했다. 판결은 그 뒤로 10여년이 흘러 1995년에야 내려졌다. 법원은 이번에도 주민들에게 배상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올해 80세가 넘은 세쓰코씨는 ‘니가타미나마타병 환자들의 모임’ 회장직을 맡고 있다. 관련 학회나 행사에서 자신의 경험담을 통해 미나마타병의 위험성을 경고한다. 

2017년 11월 기준 니가타미나마타병의 공식 환자는 705명이다.

욧카이치천식으로 호흡기를 달고 있는 환자. (욧카이치공해와 환경미래관 홈페이지 제공) 2018.11.24/그린포스트코리아
욧카이치천식으로 호흡기를 달고 있는 환자. (욧카이치공해와 환경미래관 홈페이지 제공) 2018.11.24/그린포스트코리아

욧카이치천식은 미에현(三重県) 욧카이치(四日市)시 인근에서 발병했다. 처음 발생연도는 1960년경. 당시 욧카이치에는 ‘욧카이치 콤비나트’라 불리는 석유화학 공장단지가 있었다. 화학제품을 대량 생산하는 이 공장들은 주민들의 생활터전이기도 했다. 인근 초등학교 교가 가사 중에 “콤비나트는 희망의 빛”이라는 대목이 있었을 정도다. 

1964년 욧카이치시의 60대 남성이 폐질환으로 사망했다. 이어 중학생이 호흡곤란으로 목숨을 잃었다. 이들을 시작으로 주민들 사이에 심각한 호흡기 질환이 확산되기 시작했다. 심지어 호흡곤란의 고통을 이기지 못해 자살하는 주민까지 나왔다.

원인은 욧카이치 콤비나트의 공장들이 뿜어내는 유황산화물이었다. 조사 결과, 유황산화물 농도가 짙은 지역에 사는 주민들의 발병률이 다른 곳보다 높게 나타났다. 

1967년 9명의 환자들이 콤비나트의 6개 기업을 상대로 소송에 나섰다. 대기오염으로 인한 소송은 일본 국내에서 처음이었다. 1972년 환자들이 승리했고, 당시 법원의 판결은 공해병 환자를 인정하고 이를 배상하는 법률로 이어졌다.

2017년 기준 공식 환자 수는 2219명이다. 

이따이이따이병으로 걷지 못하게 된 환자. (유튜브 다큐멘터리 캡처) 2018.11.24/그린포스트코리아
이따이이따이병으로 걷지 못하게 된 환자. (유튜브 다큐멘터리 캡처) 2018.11.24/그린포스트코리아

미나마타병, 욧카이치천식이 지명에서 유래한 것과 달리 환자들의 비명소리에서 이름이 지어진 이따이이따이병. 이따이이따이는 ‘아프다, 아프다’라는 뜻으로, 이름 속에 병의 잔혹함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발생 시기는 1910~1970년대, 지역은 도야마현(富山県) 진즈강(神通川) 유역, 원인은 카드뮴이다. 

진즈강 상류 광산에서 납 등을 채굴하던 가미오카광업(神岡鉱業)이 카드뮴이 함유된 폐수를 강에 버린 것이 원인이 됐다. 강물을 마시거나 인근 논에서 재배한 쌀을 먹은 환자들 사이에서 뼈가 심각하게 물러지는 기이한 병이 돌았다.

재채기를 하다가 뼈가 부러진 환자, 전신의 72곳에 골절상을 입은 환자, 키가 10cm 가량 줄어든 환자도 있었다. 고통이 너무나 심해 환자들이 연신 “이따이, 이따이”라고 외쳤던 것이 그대로 병의 이름이 되었다. 옥스퍼드사전에도 ‘Itai-itai disease’로 등록됐다.

일본에서 공식적으로 인정된 것은 1967년이다. 이후 환자에 대한 배상과 오염된 주변 환경 복구 작업이 이어졌다. 2013년 12월 피해자단체와 가미오카광업 사이에 ‘완전 해결’ 합의가 이뤄졌다. 그러나 환자 구제나 건강 조사는 아직도 진행되고 있다. 

2015년 기준 공식 환자는 200명이며 주요 관찰자는 343명에 이른다.

피부병을 앓고 있는 온산병 환자의 손. (유튜브 다큐멘터리 캡처) 2018.11.24/그린포스트코리아
피부병을 앓고 있는 온산병 환자의 손. (유튜브 다큐멘터리 캡처) 2018.11.24/그린포스트코리아

◇한국의 ‘이따이이따이병’

한국에도 비슷한 사례가 있다. 바로 ‘온산병’이다.

온산병은 1980년대 울산 온산공업단지 일대에서 발병했다. 1970년대 이 일대는 화학‧제지‧자동차부품 공장들이 즐비한 종합공업단지였다. 주민 1만2000여명이 공단과 함께 살아가고 있었다.

1983년 전신 통증이나 원인 불명의 눈병, 피부병 등 ‘괴질’을 호소하는 주민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2년 후 이런 증세를 보이는 주민들은 1000여명으로 늘어났다. 조사에 나선 한국공해문제연구소가 “일본의 이따이이따이병과 비슷하다”고 진단하면서 사회적 이슈로 떠올랐다.

그해 12월 주민들은 11개 업체를 대상으로 손해배상 청구를 제기해 승소했다. 공해 피해에 대한 법원의 첫 인정 판결이었다. 이후 정부는 주민들을 공단에서 떨어진 곳으로 이주시켰다. 

이따이이따이병과 달리 온산병의 구체적인 원인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미나마타병 연구가이자 온산병 조사에 참여했던 구마모토학원대학(熊本学園大学)의 하라다 마사즈미(原田正純) 교수는 “수질오염, 대기오염, 토양오염 등이 합쳐진 복합적인 이유”라는 ‘추측’을 남겼다. 

(Pixabay 제공) 2018.11.24/그린포스트코리아
(Pixabay 제공) 2018.11.24/그린포스트코리아

◇공해병의 교훈

이들 공해병의 교훈은 무엇일까. 우선 한 번 오염된 환경을 원래대로 되돌리는 데는 엄청난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따이이따이병의 주범 가미오카공업은 환자들에 대한 배상과 함께 오염된 환경의 정화 작업도 실시했다. 1970년대에 시작된 이 작업은 40여년이 흘러서야 종료됐다. 폐수를 강에 버리는 데는 몇 시간밖에 걸리지 않은 반면, 오염된 강을 정화하는 데는 수 십년이 필요했다. 

또 다른 교훈은 ‘환경오염에 대한 인식’이다. 4대 공해병도, 온산병도 환경오염에 대한 인식이 있었다면 막을 수 있었던 질병이다.

그러나 일본과 한국 정부는 아무런 인식도, 대책도 없이 기업들에게 공장 설립 허가를 내주고 오염물질 배출도 허용했다. 피해 주민들의 힘겨운 싸움 끝에 원인이 규명되고 배상 판결이 떨어져도 태도는 바뀌지 않았다.

일본 정부는 미나마타병의 원인이 밝혀진 뒤에도 9년이나 해당 기업의 폐수 방류를 허가했다. 이 때문에 피해자는 더욱 늘어났다. 한국의 경우 온산공업단지에서는 여전히 수많은 공장들이 기계를 돌리고 있으며, 일대 환경단체는 폐수를 바다에 방류하는 기업들과 싸우고 있다.  

무엇보다 큰 교훈은 ‘빼앗긴 삶은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종일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다 쓰러지기를 반복하는 지쓰코씨의 모습은 보는 이에게 쓰라린 격통을 준다. 니가타미나마타병으로 남편을 잃고 그 자신도 병마와 싸우는 세쓰코씨의 인생은 예전의 평온함을 잃었다. 해고되는 것이 두려워 환자 인정 신청을 하지 못한 채 홀로 앓다 떠난 남편을 시작으로, 세쓰코씨는 세상의 차별이나 편견과도 싸워야 했다. 세쓰코씨가 받은 배상금은 빼앗긴 삶을 돌려주지 못했다. 
 

hmy10@greenpost.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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