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둘러싼 복잡한 인연의 역사
역사적으로 여러 관계 얽힌 묘한 라이벌
그칠 기미 안 보이는 배터리 전쟁
5G 등 통신 시장 둘러싼 경쟁도 치열

‘엘 클라시코’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스페인 프로축구 레알 마드리드와 FC바르셀로나가 펼치는 매치를 뜻합니다. 두 팀은 전통의 명문 구단이자 오랜 라이벌로 통해서 이 매치는 전 세계 축구팬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곤 합니다. 경기 내용은 매우 치열하고 때로는 그라운드에서 거친 행동이 오가기도 합니다.

라이벌의 사전적 의미는 ‘같은 목적을 가졌거나 같은 분야에서 일하면서 이기거나 앞서려고 서로 겨루는 맞수’라는 뜻입니다. 치열하게 다투고 때로는 선의의 경쟁도 펼치는 사이겠지요. 얄궃은 운명 때문에 누군가는 1등이 되기에 충분한 조건이나 자질을 갖추고도 늘 2등에 머물기도 합니다. 어쩌면 ‘지기 싫은 상대’를 표현하는 말이 될 수도 있겠네요.

재계에도 라이벌이 있습니다. 같은 시장을 두고 경쟁하거나, 서로 비슷한 상황 또는 처지에 놓여서 늘 비교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이들 역시 ‘엘 클라시코’에 나선 선수들처럼 어떻게든 상대를 꺾기 위해 치열하게 다툽니다.

재계의 라이벌들은 역사적으로 어떤 관계를 쌓았을까요. 그들은 지금 어느 분야를 두고 경쟁하고 있으며 다가올 미래에는 관계가 어떻게 변할까요. 국내 재계 대표 라이벌들의 사연과 치열했던 다툼을 소개합니다. 일곱 번째는 치열한 ‘배터리 전쟁’을 벌이면서 오랜 라이벌 관계를 유지 중인 SK와 LG입니다. [편집자 주]

최태원 SK그룹 회장(좌)과 구광모 LG그룹 회장(우) (출처 각 사 제공, 그래픽 최진모 기자)/그린포스트코리아
'배터리전쟁'을 벌이고 있는 LG화학과 SK이노베이션은 단순한 라이벌 관계보다 조금 더 복잡한 인연을 가지고 있다. 반도체를 둘러싼 인연이다. 묘하게 얽혀있는 두 그룹의 관계는 5G와 인공지능 등을 비롯한 미래 산업 분야에서의 경쟁으로도 연결될 수 있다. 사진은 최태원 SK 회장과 구광모 LG 회장. (각 사 제공, 그래픽 최진모 기자, 본사 DB)/그린포스트코리아

[그린포스트코리아 이한 기자] 올 시즌 국내 프로야구 시즌 마지막 경기에서 흥미로운 장면이 연출됐다. 1경기를 남긴 시점까지 2~5등이 정해지지 않아 최종전에서 순위가 결정됐는데, 시즌 내내 2위를 달리던 LG트윈스가 이날 SK와이번스에게 패하고 순위 경쟁팀들의 승패는 엇갈리면서 결국 4위로 정규시즌을 마감했다.

프로야구는 정규시즌이 끝나면 ‘가을야구’(포스트시즌)를 통해 우승팀을 가린다. 정규시즌 4위팀과 5위팀이 ‘와일드카드 결정전’을 치르고, 거기서 이긴 팀이 3위팀과 ‘준플레이오프’를 한다. 준플옵에서 이기면 2위팀과 ‘플레이오프’를 치르고 거기서 이겨야 1위팀의 ‘한국시리즈’(결승전)상대가 된다. 순위가 낮을수록 더 많은 경기를 뛰어야 해서 체력소모가 크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높은 순위를 차지하는 게 유리하다.

국내 프로야구는 10개팀이다. SK와이번스는 올해 9위로 위에서 언급한 가을야구와 관련이 없다. 마지막 날 경기의 승패가 올 시즌 최종순위에도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하지만 마지막 경기에서 SK와이번스는 갈길 바쁜 LG트윈스에게 일격을 가했다. 물론 순위와 상관없이 끝까지 최선을 다하는 것이 프로스포츠의 기본이므로 전혀 문제 될 일은 아니다.

◇ 역사적으로 여러 관계 얽힌 묘한 라이벌

그런데 아주 오래 전, 그러니까 지금으루부터 15년 전인 2005년 가을에 비슷한 일이 있었다. 그때는 올해와 반대 상황이었다. SK와이번스가 플레이오프 직행을 위해 마지막 경기를 꼭 이겨야 했고 당시 상대팀 LG트윈스는 포스트시즌 탈락이 이미 확정된 상태였다. 이 경기에서 LG트윈스는 에이스 외국인 투수를 경기 중반에 투입하는 강수를 두며 SK와이번스에게 1점차로 이겼다. 2위를 달리던 SK와이번스는 시즌 마지막 경기에서 3위로 내려앉았다. 재계 이슈는 아니지만 SK그룹과 LG그룹의 이름이 걸린 국내 프로야구 팀 사이의 묘한 인연이다.

별안간 프로야구 얘기를, 그것도 오래 전 얘기까지 함께 꺼낸 이유는 양 구단 모기업의 묘한 관계와 오랜 인연을 설명하기 위해서다. 야구장에서 두 팀은 트윈스와 와이번스라는 팀명을 달고 경쟁했지만, 이들은 모두 SK와 LG 그룹사다.

SK와 LG는 최근 국내 재계에서 라이벌 구도를 보이고 있다. 대표적인 격전지는 소송전을 벌이며 이른바 ‘배터리 전쟁’을 벌이고 있는 LG화학과 SK이노베이션이다. 이 밖에도 5G 시장 등을 둘러싸고 경쟁하는 통신사 SK텔레콤과 LG유플러스, IPTV에서의 SK브로드밴드와 LG헬로비전 등이 동종업계에서 경쟁한다.

두 그룹의 라이벌 구도는 다른 라이벌과 모양새가 좀 다르다. 앞서 언급한 분야 등을 제외하면 사업분야가 직접 부딪히며 경쟁 사례가 소비자에게 많이 알려지는 케이스는 아니다. 하지만 둘 사이에는 복잡하게 얽혀있는 역사가 있다. SK하이닉스 역사에 LG반도체가 일정 부분의 지분을 차지하고, SK그룹 자회사 SK실트론을 LG그룹으로부터 인수한 사례 등이 있어서다.

물론 사업영역이 바뀌거나 그룹을 인수하는 등의 일은 재계에서 흔하지만, ‘반도체’가 SK그룹에서 차지하는 위상과 과거 LG가 반도체에 들인 공 등을 생각하면 두 그룹의 반도체 관련 행보는 매우 의미 있는 사건이었다.

반도체는 흔히 ‘산업의 쌀’이라고 부른다. SK하이닉스의 주요 사업영역은 D램과 낸드플래시, 그리고 CIS로 나뉜다. (SK하이닉스 제공)/그린포스트코리아
반도체를 '산업의 쌀'이라고 부른다. SK하이닉스는 D램과 낸드플래시 분야에서 모두 강세를 보이는 글로벌 강자다. (SK하이닉스 제공)/그린포스트코리아

◇ 반도체 둘러싼 복잡한 인연의 역사

과거부터 돌아보자. SK와 LG가 처음부터 재계에서 라이벌로 보일 만큼의 치열한 경쟁이나 갈등 관계를 겪은 건 아니다. 삼성 vs 현대가 재계 1위 자리를 두고 경쟁한 모습이나 삼성전자 vs LG전자의 오랜 경쟁 구조 등과 비슷한 모습이 두 그룹에서는 표면적으로 잘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1990년대 후반까지 국내 재계는 삼성과 현대 LG가 대표적인 ‘큰손’으로 꼽혔다. 당시만 해도 소비자들의 인식이나 인지도 등을 생각해도 (럭키금성 시절부터 이어온) LG가 SK에 비해 상대적으로 크게 보였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2000년대 이후 삼성이 재계 1위로 올라선 후, LG는 GS와 분리되는 등 변화를 겪었고 SK는 반도체(하이닉스)의 선전 등을 앞세워 재계에서의 입지를 강화했다. 반도체 웨이퍼 제조기업 SK실트론도 SK가 옛 LG실트론을 인수한 회사다.

재계 호사가들은 이 과정에서 SK와 LG의 묘한 인연에 주목한다. 하이닉스를 둘러싼 인연 때문이다. SK가 인수한 하이닉스는 현대반도체와 LG반도체가 합병해 만들어진 기업이다. LG는 국내 1세대 전자산업을 이끈 기업이었다. LG는 지난 1979년 대한반도체를 인수하고 이듬해 미국 AT&T 합작으로 금성반도체를 세우며 반도체 분야에서 선구적인 행보를 보여왔다. 그러나 LG는 IMF 외환위기 당시 정부 주도의 이른바 ‘빅딜’로 반도체 지분을 현대전자에 넘겼다. 이후 2011년 하이닉스를 SK가 인수하며 오늘에 이르렀다.

SK하이닉스는 SK그룹 주요 계열사 중 하나다. 이들은 최근 인텔 NAND(낸드) 메모리와 저장장치 사업을 인수하기로 결정해 화제가 됐다. 인텔과의 합산 점유율을 고려하면 SK하이닉스 낸드 점유율은 기존 5위에서 2위권으로 오른다. 글로벌 최상위권 점유율을 노릴 수 있다는 의미다.

SK하이닉스를 보는 LG의 속내는 어떨까. LG는 반도체를 넘긴 것에 대해 매우 아쉬워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난 1999년 당시 구본무 회장이 반도체 지분을 모두 넘긴 후 10여년 간 전경련 행사에 참석하지 않았다는 후문도 있다.

그 뿐만이 아니다. 구자경 LG 명예회장은 1992년 자신의 저서 <오직 이 길밖에 없다>에서 “반도체를 파는 기업은 돈을 벌 수 있고, 반도체를 만들지 않고 TV나 VCR 등 최종 제품만 만들어 파는 기업은 돈을 벌 수 없다”라고 언급한 바 있다. 오래된 일이지만 LG 입장에서는 두고두고 아쉬울 수 있는 부분이다. LG전자가 백색가전 선두주자로 글로벌 시장에서 매우 탄탄한 입지를 구축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반도체 산업 역시 잘했을 것'이라는 가정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LG전자가 초고화질 마이크로 LED 사이니지 LG MAGNIT(매그니트)를 10일 국내 포함한 아시아, 북미, 유럽 등 글로벌 시장에 출시했다. (LG전자 제공)/그린포스트코리아
LG전자는 백색가전 선두주자로 글로벌 시장에서 매우 탄탄한 입지를 구축하고 있다. (LG전자 제공)/그린포스트코리아

◇ 그칠 기미 안 보이는 배터리 전쟁

요즘은 어떨까. 두 그룹 관계사의 최근 사례들을 보자. SK하이닉스와 LG화학이 치열한 ‘배터리전쟁’을 치르고 있다. 지난해 4월, LG화학은 “SK이노베이션이 배터리 핵심 인력을 유출해 영업 비밀을 침해했다”며 ITC와 미국 델라웨어 지방법원에 소송을 제기했다. 같은 해 9월 SK이노베이션은 “특허를 침해하는 배터리 제품을 LG화학이 미국에서 팔고 있다”면서 ITC에 특허소송을 제기했다. 이에 LG화학은 “SK이노베이션이 특허를 침해한 것”이라며 ITC에 추가 소송을 제기했다.

판결이 공식화된 소송은 아직 없다. ITC는 LG화학이 제기한 영업비밀 침해 소송에 대해 내달 10일 최종 판결을 내릴 예정이다. ITC는 올해 2월 SK이노베이션에 조기 패소 예비결정을 내린 바 있다. 한편 SK이노베이션이 LG화학을 상대로 제기한 특허소송은 내년 11월 30일, LG화학이 SK이노베이션을 상대로 제기한 특허소송은 내년 7월 19일 판결이 내려질 예정이다.

LG화학이 배터리 사업 부문을 분사하기로 결정하면서 내달 1일 출범하는 LG에너지솔루션(까제)이 소송을 승계할 것으로 보인다. LG화학 임시 주총에서 통과된 분할계획서 승인 안건에 따르면, LG화학 배터리 사업 부문과 관련된 일체 소송은 원칙적으로 독립하는 신설법인에 귀속된다.

두 기업은 소송 과정에서 언론사에 보도자료를 보내 양사의 특허 개수를 공개하며 직접적으로 비교하거나, ‘상대기업의 저의가 의심된다’며 직설적인 어조로 비판하는 등 치열한 다툼을 벌였다. SK이노베이션이 5800억원을 투자해 중국에 배터리 생산공장을 짓는다고 발표하자 LG화학은 전기차 투자를 늘리고 있는 볼보자동차그룹에 배터리 공급 계약을 체결했다는 소식을 내놓으며 각자 세를 과시하기도 했다.

지난해 9월에는 신학철 LG화학 부회장과 김준 SK이노베이션 총괄사장이 직접 만났으나 입장차이를 좁히지 못하고 소송전을 여전히 이어갔다. 이들의 경쟁을 두고 업계 일각에서는 ‘집안 싸움을 벌이다 중국 등 해외 기업의 배만 불려주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일 정도로 양측은 팽팽하게 날을 세웠다.

이와 더불어 이들은 전기차 배터리 시장 선점과 확대를 위해 치열한 수주전을 벌여왔다. 미래에셋대우 리서치센터가 발표한 ‘글로벌 전기차 시장 규모 전망’보고서에 따르면 전기차 생산 규모는 지난해 320만대에서 매년 30%씩 성장해 2025년에는 1,600만대에 이를 것으로 예상된다. 핵심 부품인 배터리 시장도 지난해 24조 6,000억원 규모에서 2023년에는 94조 5,000억원에 달할 것으로 전망된다. 이른바 ‘먹거리’가 많은 시장이라는 의미다. 그러므로 양사의 치열한 경쟁은 당분간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 5G 등 통신 시장 둘러싼 경쟁도 치열

5G와 통신 시장을 둘러싼 SK텔레콤과 LG유플러스의 경쟁도 치열하다. ‘재계 라이벌열전’ 지난호 기사에서 일부 언급한 바 있으나, 스마트폰 가입자 비율로만 보면 양사가 비슷한 점유율을 가진 라이벌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하지만 이들의 경쟁은 5G 서비스와 AR·VR 등을 활용한 다양한 서비스를 가지고 폭넓게 이뤄지고 있다.

시계의 추를 지난해로 돌려보자. 지난해 LG유플러스가 일부 신문에 서울지역 5G 평균 속도값을 비교한 결과 자신들이 가장 빨랐다는 내용의 광고를 내보냈다. 그러자 SK텔레콤은 정부 공인 5G 통신품질 측정 결과가 없는 상태에서 자체 측정 결과는 인정할 수 없다고 반박했다. 그러면서 오히려 자신들의 자체 측정 결과 SK텔레콤이 더 빨랐다고 주장했다.

IPTV를 둘러싼 경쟁도 치열하다. 최근 SK브로드밴드는 방송채널사용사업(PP) 자회사 설립을 준비하는 것으로 알려져 화제가 되기도 했다.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웨이브’ 오리지널 콘텐츠에 공동투자 하는 등 콘텐츠 관련 투자를 넓히겠다는 행보다. 반면 LG유플러스도 자회사 미디어로그를 통해 PP를 이미 시작했다. '더라이프' 채널을 론칭해 LG유플러스 U+tv 고객과 LG헬로비전 헬로tv 고객 대상으로 이미 전송하고 있다.

방송통신위원회가 지난 6월 LG헬로비전 사전동의를 의결하면서 SK브로드밴드·티브로드 합병 시와 동일한 수준의 재허가 조건을 부과한 것도 주목할 만 하다. 전자신문 보도에 따르면, 당시 허욱 방통위 상임위원은 “LG헬로비전과 SK브로드밴드 M&A 사례가 유사한 만큼 선거 관련 의무 준수, 지역채널 광역화 금지 등 조건을 부과한 것은 합당하다”고 말했다.

재계에서는 두 그룹의 경쟁이 앞으로도 이어질 수 있다고 본다. 양사 모두 인공지능과 5G 등 4차산업 관련 사업 육성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어서다. 물론 해당 분야들은 IT나 ICT관련 기업들이라면 모두 치열한 경쟁을 벌이는 분야지만, 국내 재계에서의 큰 영향력과 오랜 노하우를 가진 이들의 행보가 상대적으로 더 주목을 받을 것으로 전망된다.

leehan@greenpost.kr

저작권자 © 그린포스트코리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