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C, LG화학 요청에 따라 조기패소 판결
SK이노베이션, 합의 염두 등 다소 완화된 태도
전문가들, SK이노베이션 합의 요청할 가능성 커

이번 ITC 조기패소 판결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한 LG화학의 배터리(LG화학 제공)/그린포스트코리아
이번 ITC 조기패소 판결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한 LG화학의 배터리(LG화학 제공)/그린포스트코리아

[그린포스트코리아 김동수 기자] 미국 국제무역위원회(ITC)가 SK이노베이션에 ‘조기패소 판결(Default Judgment)’을 내림에 따라 ‘배터리 전쟁’에서 LG화학이 유리한 고지를 점하게 됐다. 그 결과 앞으로 ITC의 최종판결이 예정된 가운데 SK이노베이션이 어떠한 전략적 행보를 이어갈지에 대해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자칫 이번 판결에 따라 2조원 이상을 들인 미국 공장 가동에도 차질을 빚게 될 수 있기 때문이다.

◇ ITC, SK이노베이션 ‘조기패소 판결’

LG화학과 SK이노베이션에 따르면 미국 ITC는 14일(현지시각) 양사 간의 2차전지 영업비밀침해소송과 관련해 SK이노베이션에 조기패소 판결을 내렸다. 이에 따라 당초 3월 초로 예정된 ‘변론’ 등의 절차 없이 10월 5일 ITC의 ‘최종 결정(Final Determination)’만 남게 됐다.

이번 조기패소 판결은 LG화학이 지난해 11월 5일 ITC에 요청한 것이다. LG화학에 따르면 지난해 4월 29일 LG화학이 영업비밀침해 소송을 제기한 바로 다음 날 이메일을 통해 증거가 될 만한 관련 자료의 삭제를 SK이노베이션이 지시한 정황이 드러났다.

또한 이에 앞서 지난해 4월 8일 LG화학이 내용증명 경고공문을 보낸 직후 3만4000개 파일 및 이메일에 대한 증거인멸 정황이 드러나기도 했다. 여기에 ITC의 명령에도 불구, 포렌식을 해야 할 75개 엑셀시트 중 1개에 대해서만 진행하고 나머지 74개 엑셀시트는 은밀히 자체 포렌식을 진행한 정황 등도 발견됐다.

포렌식이란 컴퓨터 서버를 포함해 디지털기록매체에서 삭제된 정보를 복구하는 등 남겨진 정보를 수집, 분석해 특정 행위의 사실관계를 법적으로 규명하고 증명하기 위한 절차를 말한다.

한편, 이번 ITC의 판결은 LG화학이 지난해 11월 요청한 조기패소 판결을 승인하는 ‘예비결정’이지만 이변이 없는 한 최종결정까지 이어질 전망이다. 1996년부터 2019년까지 ITC 통계에 따르면 영업비밀 관련 소송의 경우 ITC 행정판사가 침해를 인정한 모든 사건이 대부분 최종결정으로 유지됐기 때문이다.

LG화학 측은 “이번 소송의 본질은 30여년 동안 축적한 당사의 소중한 지식재산권을 정당한 방법으로 보호하기 위한데 있다”며 “LG화학은 2차 전지 관련 지식재산권 창출 및 보호를 지속 강화해 글로벌 전기차 배터리시장을 선도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한편, LG화학은 이번 조기패소 판결이 나머지 5건의 소송에 어떤 영향을 줄지 조심스러운 입장이다. 양사는 지난해 미국 델라웨어 연방지방법원에 영업비밀 침해로 상호 소송을 진행했고 미국 ITC와 델라웨어 연방지방법원에 특허침해 맞소송 등 벌이는 등 첨예하게 대립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LG화학은 종전 입장과 같이 합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점이다.

LG화학 관계자는 “양사 간에 남아 있는 소송이 이번 ITC 조기패소 판결에 따라 어떤 영향을 줄지 정확히 알 수 없어 상황을 지켜보고 있다”며 “향후 남아 있는 소송절차에도 최선을 다해 임하겠지만 SK이노베이션 측이 잘못을 인정하고 논의하자고 하면 대화의 문은 열려 있다”고 말했다.

LG화학과 SK이노베이션 간의 배터리 전쟁 일지(자료 언론보도‧하나금융경영연구소, 그래픽 최진모 기자)/그린포스트코리아
LG화학과 SK이노베이션 간의 배터리 전쟁 일지(자료 언론보도‧하나금융경영연구소, 그래픽 최진모 기자)/그린포스트코리아

◇ SK이노베이션의 선택지…이의절차 VS 합의?

SK이노베이션은 해당 판결에 대해 16일 입장문을 내고 즉각 대응했다. ITC로부터 공식적인 결정문을 받아야 구체적인 결정 이유를 알 수 있겠지만 주장이 충분히 받아들여지지 않은 점이 유감스럽다는 입장이었다. 이어 결정문 검토 후 향후 법적으로 정해진 이의절차를 진행한다고 밝혔다.

SK이노베이션 측은 입장문을 통해 “그간 견지해 온 것처럼 LG화학과는 선의의 경쟁 관계지만 산업 생태계 발전을 위해 협력해야 할 파트너라고 생각하고 있다”며 “앞으로도 그 기조는 변함이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조기패소 판결이 나온 이튿날인 17일 SK이노베이션은 LG화학과 합의까지 염두에 두는 등 다소 누그러진 태도를 보였다. SK이노베이션의 이러한 태도 변하는 ITC의 최종결정이 미국 조지아 배터리 공장에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SK이노베이션은 미국 조지아주에 2조원을 들여 폭스바겐에 공급할 연 9.8GWh 규모의 배터리 공장을 건설 중이다. 만약 10월 ITC가 이번 결정과 같은 취지의 ‘최종결정’을 내릴 경우 2차전지 관련 영업비밀을 침해한 SK이노베이션의 배터리셀, 모듈, 팩 및 관련 부품·소재에 대한 미국 내 수입금지 효력이 발생한다. 최악의 시나리오는 최종 패소로 조지아 공장이 멈춰 서는 것이다. 결국 미국 전기차 시장 진출에 먹구름이 껴 그동안의 노력이 물거품이 되는 것이다.

SK이노베이션 측은 우선 결정문을 구체적으로 분석하고 이의제기 또는 합의 등의 대안을 찾겠다는 입장에는 변함이 없다. 이번 조기패소 판결 내용에 조지아 공장 포함 여부와 미국 현지 소재·부품 조달로 공장 가동 가능성, 구체적인 영업비밀침해의 정도 등을 파악해 대책을 세우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앞으로 내려질 ITC의 최종결정이 델라웨어 연방지방법원의 판결에도 영향을 주는 상황에서 SK이노베이션은 종전과 달리 합의를 보다 구체적으로 생각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SK이노베이션 관계자는 “10월로 예정된 ITC의 최종결정이 사실상 델라웨어 연방지방법원 판결로 이어져 향후 법원 판결 역시 크게 달라지지 않으리라고 보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아직 LG화학이 승소했고 SK이노베이션이 패소했다는 사실만 통보받은 상태로 18일 결정문을 받게 되면 구체적인 영업비밀침해 내용과 이의절차 여부, 관련 합의금 등을 추정해 볼 것”이라며 “합의 역시 하나의 방법으로 구체적으로 염두에 두고 있다”고 덧붙였다.

배터리 전쟁에서 가장 큰 영향을 줄 것으로 예상되는 SK이노베이션의 조지아 공장(SK이노베이션 제공)/그린포스트코리아
배터리 전쟁에서 가장 큰 영향을 줄 것으로 예상되는 SK이노베이션의 조지아 공장(SK이노베이션 제공)/그린포스트코리아

◇ 전문가들 이번 조기패소 판결...합의에 물꼬 터

전문가들 역시 이번 ITC의 조기패소 판결에 따라 양 사가 협상 테이블에 앉을 가능성이 클 것으로 보고 있다. 특히 가장 결정적인 영향은 조지아 배터리 공장이다. SK이노베이션이 미국 전기차 시장을 포기하지 않는 한 현지 생산 공장을 자칫 ‘개점휴업’ 상태로 내버려둘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SK이노베이션은 이번 ‘배터리 전쟁’ 소송을 합의로 일단락 시키는 것이 미래 먹거리를 지키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라는 것이다.

또한 이번 조기패소 판결이 중요한 이유는 종전에는 승자와 패자가 불분명한 상태여서 협상을 시작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 누군가의 과실이 정해지지 않았는데 어느 한 회사가 먼저 섣불리 협상 제안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 판결로 어느 회사가 잘못했는지 개략적인 판단이 가능해 협상할 수 있는 기폭제가 될 것으로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이와 함께 만약 양 사가 협상 테이블에 앉을 경우 대승적 차원에서 즉, 승자와 패자가 없는 합의를 봐야 한다고 첨언한다.

김필수 대림대 자동차학과 교수는 “SK이노베이션이 미국에 2조원 정도 투자해 조지아 공장을 만드는데 자칫 이번 결정으로 한국에서 부품 등 조달이 막혀 제품을 생산할 수 없는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며 “일차적으로 SK이노베이션이 불리한 상황으로 합의를 봐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이와 함께 LG화학도 적당 선에서 SK이노베이션에 손을 내밀어야 서로 공멸하지 않고 ‘윈윈’해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다”며 “2차 배터리 수요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고 있으므로 양사 모두 먹거리를 찾을 수 있는 시장환경은 충분하다”고 덧붙였다.

 

kds0327@greenpost.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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