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포스트코리아 주현웅 기자] “어느 날이 명절이냐…우리 학생들에게는 명절다운 날이 하루도 없을 뿐만 아니라 어느 날이 명절인지도 알 수가 없다…학교에서 방학을 주지만 명절은 고사하고 하루도 놀 수 있는 날이 없으며…입시에 바쁘다.”

왠지 방금 본 기사 같지만 실은 거의 100년 가까이 된 내용이다. 1924년 2월 14일 <동아일보>의 ‘어느 날이 명절이냐’란 제목의 기사다. 명절에도 이어지는 학생들의 입시 스트레스가 지금과 똑같다.

이처럼 매해 명절마다 접하게 되는 기사가 있다. 가족과 함께 하지 못한 채 입시에 여념 없는 학생들, 주부들의 과로 스트레스, 가족 간의 갈등 등이다. 하지만 이러한 현상이 100년 가까이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은 놀랍기만 하다.

오늘날과 너무나도 다를 바 없기에 웃기도, 울기도 힘든 옛날의 명절 풍경이 있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와 6·25전쟁 등 차마 덤덤히 받아들이기 힘든 대목들도 분명 있었다. 옛날 신문을 통해 과거의 명절 모습을 들여다봤다.

명절 풍경은 옛날과 현재가 똑같다.(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캡처)2018.9.24/그린포스트코리아
명절 풍경은 옛날과 현재가 똑같다.(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캡처)2018.9.24/그린포스트코리아

◇ 온갖 스트레스에 싸움질…“지금이랑 똑같네”

옛날 신문을 살펴보면 설날에 대한 기사에 비해 추석에 대한 보도는 횟수가 확실히 적다. 설날의 경우 일제강점기 때부터 공휴일이었던데 반해 추석은 1946년 공휴일로 처음 지정됐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는 그해 <동아일보> 9월 6일자 기사에 짧게 나온다.

“추석을 공휴일로…군정청(미군 군정청)에서는 오는 10일 추석날을 공휴일로 결정하였다고 한다.”

그렇다면 추석이 공휴일로 지정되기 전에는 이날이 어떤 의미였을까. 비록 공휴일은 아니었지만 추석은 분명 민족의 큰 명절이었다. 이 역시 <동아일보>의 보도를 통해 알 수 있다. 1924년 9월 13일 ‘추석은 금일’ 보도 중 일부다.

“더도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으라지요. 오늘이 바로 한가위입니다…우리는 이날을 추석이라고 부르고 가배일(嘉徘日)이나 가배절(嘉徘節)이라고도 씁니다…시골 농가에서는 추석을 설날보다도 낫게 여깁니다.”

지금처럼 과거에도 추석은 의미 있는 날이었다. 그래서인지 추석마다 마주하게 되는 풍경마저도 늘 비슷한 부분들이 있다. 이날 특히 벌어지는 음주 사건사고도 그 중 하나다. 1925년 10월 4일 <동아일보>가 ‘명절날 싸움질’이란 제목과 함께 보도한 내용은 이와 같다.

“방모씨, 이모씨, 박모씨, 임모씨 등 무리들이…오후 11시경 추석명절을 즐기기 위해 종로3가의 술집에서 술을 먹고 놀다가…술에 취하게 되며 공연한 말이 오락가락해 싸움이 시작…동대문경찰서 순사가 가해자를 인도 및 취조 후 엄중히 말하고 돌려보냈다.”

명절보다 입시가 더 중요한 학생들 모습도 다르지 않다. 비록 추석은 아니지만, 1924년 2월 14일 <동아일보>가 설을 맞이해 쓴 ‘어느 날이 명절이냐’ 기사는 그 모습을 보여준다. 이 기사는 특히 그 당시 학생들의 학교생활 고충도 엿볼 수 있다.

“아침에 겨우 떡국이나 한 그릇 얻어먹고…세배 절이나 윗사람에게 하고는 가방을 메고 나가…영어 스펠링을 중얼중얼 외우기도 하며…잘못하다가 체육선생에게 뺨이나 맞지는 않을까 걱정하는 동안 명절 생각은 그만 잊어버린다.”

명절마다 고통 받는 여성들의 애환은 조금 늦게 거론되지만 약 30년 전부터 지적된 문제다. 1991년 4월 22일 <경향신문>의 ‘늘어나는 20대 직장여성 신경증 스트레스가 주범’이란 기사에는 여성들의 명절 스트레스가 간략히 담겨있다.

“ㄱ(여성)씨에게는 최근 들어 심장이 쿵쿵뛰고 가슴이 답답하며 손발이 땀에 젖는 증세가 나타났다. 특히 제사, 명절 등 집안행사 준비로 큰 동서가 집에 오면 이런 증세는 더 심해졌다…시어머니가 주는 압박감 등에서 비롯된 신체형장애환자의 대표적인 케이스다.”

6.25전쟁 당시 피난민들의 모습
6.25전쟁 당시 피난민들의 모습

◇ 명절의 즐거움마저 빈부격차…변함없는 사회문제

물질과 정서적으로 풍요롭지 못한 이들이 명절에 더 큰 고통을 받는 것 역시 오래된 사회문제다. 특히 과거에는 빈곤을 겪은 이들이 더욱 많았고, 그 고통이 명절이면 상대적 박탈감과 맞물려 최악의 결과로 귀결되는 일이 적지 않았다. 

1921년 9월 17일 <동아일보>가 ‘추석전야 사회의 후문’이란 제목으로 보도한 내용을 보면 빈곤한 이들의 명절 모습이 담겨 있다. 이 기사를 읽다 보면 명절의 즐거움마저도 빈부격차가 있음을 느끼게 한다.

“온 세상이 명절이라고 떠드는 추석…세상은 이만하면 행복이라고 떠드는 한편에 한숨과 눈물로 명절의 슬픔을 한없이 느끼는 사람이 몇이나 되는지 이루 헤아릴 수가 없다…이 세상은 행복의 세상이라고 떠드는 자들의 환락을 뒤로 하는 사람들…밝은 가을 달을 온몸에 가득히 받으며 삼청동 한 구석에 말없이 서서 눈물의 역사를 말한 한 사람은…일본 사람의 집에 고용돼 집이나 장만해 살다가 장사하다가 실패를 보고…세금을 못내…열한 살 먹은 어린 딸이 밥을 굶고 가는 것을 보면 가슴이 아파…“

이와 함께 옛날신문이 보여주는 충격적인 사실은 명절 기사들 중에서 빈민들의 자살소식을 찾는 게 어렵지 않다는 점이다. 결코 원치 않는 내용임에도 이 같은 보도는 거의 매년 이뤄졌다. 이 가운데 <동아일보>가 1933년 10월 4일 보도한 ‘생활난자살’ 기사는 이와 같다.

“괴산군 박모씨(38)가 지난 1일 오전 3시쯤 본인 집 화장실에서 목을 매고 죽은 것을 집안사람이 발견…곧 끌어놓았으나 사망했다고 한다…그의 죽음 원인은 빈곤한 생활에 비관하여 오던 바…다가오는 추석명절을 등지고 자살한 것이라고 한다.”

반면 해방 후 언론의 사회비판 기능이 차츰 꿈틀대는 듯 보였던 시기에는 부유층의 명절 행태를 비꼬는 기사도 나왔다. 이번에도 <동아일보>의 보도로서 1960년 10월 5일 ‘명절되면 의원들도 돈타령’이란 기사 중 일부다.

“명절만 되면 국회의원들의 돈타령이 심해진다…박 모 의원은 지난 4일 반도호텔에서 기자들에게 붙잡혔다…추석이라 시골에 가야 하는데 돈이 있어야지…라고 안 어울리는 신세타령을 한바탕 늘어놓는 품이 무던히 안타까운 데가 있는 모양이다.”

IMF 당시 뉴스(MBC 뉴스데스크 캡처)2018.9.24/그린포스트코리아
IMF 당시 뉴스(MBC 뉴스데스크 캡처)2018.9.24/그린포스트코리아

◇ 국가와 개인 모두 눈물 흘렸던 명절

민족 대명절인 추석이라지만 나라를 잃고 살았던 일제강점기 당시의 명절 풍경은 결코 밝지만은 않았다. 역설적이지만 민족 대명절이기에 더 슬픈 민족 대명절이랄까. 물론 6·25전쟁과 IMF 당시에도 비슷했다.

일본이 ‘문화통치’를 내세우며 강점한 1920년대 언론의 명절 보도는 자조 섞인 목소리가 상대적으로 많이 나온다. 1923년 9월 26일 <동아일보>가 보도한 ‘추석 명절을 부흥하라’는 기사에서는 이를 조금 엿볼 수 있다.

“어찌하여 풍성풍성해야 할 추석이 이렇게도 쓸쓸한 추석일 뿐만 아니라 민중적명절이 다 이렇게 되고 말았다…즐겁게 뛰어 다니는 아이들조차 없어지고…이른바 ‘명절기분’이라는 것이 아주 없어지고 말았다…여러 가지 슬픈 타격으로 원기가 줄어든 까닭이다.”

6·25전쟁 때의 명절도 암울하기만 했다. 특히 피난민들의 모습이 그랬다. 그 당시 언론보도를 보면 기사에도 좀처럼 활기가 느껴지지 않는다. 1952년 10월 4일 <동아일보>의 ‘추석풍경 거리는 철시상태 서글픈 피난민의 모습’ 보도 중 일부다.

“전시 중에 맞이한 추석명절인 탓인지 지나치게 소란한 명절놀이 기분은 찾아볼 수가 없다…그 시간에도 피와 땀을 흘리고 있을 일선 장병의 노고에 감사하고, 은근히 미안한 생각을 품은 국민들의 가슴에는…내일의 일과 삶을 이어갈 계획에 가득 차…말없이 지냈다.”

전쟁 직후에는 어땠을까. <경향신문>이 1953년 9월 23일 보도한 내용에 따르면 상황은 조금 나아진 듯 보인다. 당시 매체가 ‘3년 만에 추석놀이 상가는 철시, 거리는 적막’이란 제목과 함께 보도한 내용이 이를 보여준다.

“사변 동안 중지됐다가 부활한 추석명절 날…어린이들이 부모 손에 매달려 조상의 뼈가 묻힌 산소에 제사를 드리러 가는 행렬로 서울의 거리가 꽃처럼 피었다…방앗간 주인은 2~3일 동안 철야작업에서 오는 피곤으로 파릿해져 있고…3년 만에 추석 명절의 자연 철시를 이루었다.”

휴전선언을 기점으로 무난한 모습을 보이던 명절 풍경은 90년대 후반 IMF사태를 계기로 다시 어두워졌다. 당시 언론의 추석 관련 보도를 보면 온통 어두운 내용의 기사 뿐이다. <매일경제>의 1997년 9월 13일 ‘근로자 200만명 우울한 추석’ 보도는 이 같이 전했다.

“추석 귀성이 13일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지만 200여만명에 달하는 대기업과 협력업체 근로자들이 연쇄부도 여파로 월급이나 보너스를 제대로 받지 못하는 등 우울한 추석을 맞고 있다…회사의 앞날마저 불투명해 직장인들의 귀성 발걸음을 더욱 무겁게 하고 있다.”

우리나라가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한 시점은 이 보도가 나오고 2개월 뒤다. 고로 IMF사태 이후 처음으로 맞이한 추석의 모습은 이듬해인 1998년 나왔다. 그해 9월 18일 <경향신문>이 보도한 ‘IMF 이후 첫 명절 검은 추석’ 기사는 이와 같다.

“추석 명절을 앞둔 직장인들의 표정이 우울하기만 하다…곺깊은 불황에 구조조정 한파가 겹쳐…고향길에 나설 직장인들 호주머니가 썰렁하기 때문이다…기업의 추석선물은 물론 귀향수송편의마저 사라지면서 고향찾기를 아예 포기하는 직장인이 늘고 있다.”

이와 같은 세상 이야기들은 올해도 어김없이 등장했다. 명절 반납한 노량진 청년들, 성차별로 인해 과로에 시달리는 여성들, 저소득층의 우울한 명절, 추석에도 일하는 사람들 등의 형태다. 거진 100년 동안 어지고 있는 이러한 모습들을 언제까지 봐야할까.

chesco12@greenpost.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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