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는 사회의 민낯...언어 권력에서 언어 권리로

 

[그린포스트코리아 박소희 기자] 안데르센의 동화 ‘인어공주’에서 왕자를 사랑하는 공주는 자신의 목소리를 내어주는 대신 왕자의 세계로 건너갈 수 있는 두 다리를 얻는다. 그러나 이야기 말미 왕자의 사랑을 얻지 못한 인어공주는 물거품이 된다. 물론 한국어 판본에 관한 이야기다. 

원작에서 불멸의 영혼을 얻고 하늘로 승천하는 인어가 국내에 번역되며 왜 물거품이 되었을까. 자기 정체성 상실(바다를 떠남)이야말로 사랑의 본질임을 한국 편집자가 전하고 싶었던 것일 수도 있겠으나 다르게 보면 '집단 언어'에 의해 발언권을 잃은 '소수 언어'의 무력함으로도 읽힌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기 2년 전 영국의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은 내무부 장관에게 서간을 보낸다.

그 서간에는 “베이직 잉글리시(Basic English)를 세상에 보급한다면 우리는 엄청난 이득을 볼 것이다. 이는 광대한 영토를 새로 병합하는 것보다 더욱 영속적인 수확”이라고 적혀 있다. 

미국도 처칠의 생각에 동의한다. 그 증거로 역대 미국 대통령들은 영어를 세계 언어로 만들기 위해 직속 위원회를 두고 꾸준히 노력해왔다.

식민지 시대가 끝나자마자 미국과 영국이 영어 확산에 공을 들인 것은 언어가 무력을 대신할 새로운 지배수단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요즘 국내 초등학생들에게 “나 머리 잘랐어”라고 말하면 대번 "응 그럼 죽어”라고 대꾸한다. 영어에 익숙한 초등학생에게 머리(head)는 머리일 뿐 머리카락(hair)이 아니기 때문이다. 처칠의 기획은 최소 국내에선 성공했다. “미국 거지는 나보다 영어 잘하겠지”라는 입시생 혹은 취준생들의 신세 한탄은 영어가 '슈퍼언어'가 됐다는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메일을 모국어로 적는다는 건 세계를 지배할 수 있는 ‘절대 반지’를 획득한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인다. 아무리 많은 지역어를 구사한다고 해도 슈퍼언어를 획득하지 않으면 국제사회에서 낙오자가 되기 쉬운 시대 아닌가. 

그렇다면 한국 사회의 언어 권력은 무엇일까. 지역의 관점에서는 '표준어'가, 성소수자 관점에서는 '이성애자 언어'가, 여성의 관점에서는 '부계 중심 언어'가 그렇다. 

공주는 왕자의 세계로 넘어가는 데는 성공했지만, 자기 존재를 드러내는 데는 실패한다. 다시 말해 의미에 도달하지 못하고 물거품이 된다. 여성의 경제활동 참여가 활발해지고 남녀평등 인식이 자리를 잡아가는 듯 보이지만 한국 사회는 여전히 남성 중심 사회다. '부인(夫人)’의 뜻을 사전에서 찾으면 남의 아내를 높여 이르는 말이라 나온다. ‘지아비의 사람’이라는 말이 어찌 종속이 아니고 존칭인가. 가부장적 사회를 제도가 뒷받침하고 있다고 해서 호주제를 폐지한지 13년이 지났지만 남성 가족만 지나치게 높이는 호칭은 여전하다. 열 살이 어려도 남편의 동생은 ‘도련님’이고 ‘아가씨’다. 가족 내 성차별적 호칭을 개선해야 한다는 목소리는 과거 부계 중심 사회에서 물거품이 된 여성의 존재를 의미화하겠다는 선언처럼 들린다.

변화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국립국어원은 장인·시아버지를 아버지로 통일하는 등 가족내 성차별적 호칭 변경을 추진하고 있다고 하니 말이다. 그러나 아직 한국사회는 사회적 성을 일컫는 젠더(Gender)를 부를 모국어가 없어 생물학적 성을 일컫는 섹스(Sex)와 동일하게 번역한다. 

말버릇으로 그 사람의 됨됨이를 알 수 있듯 언어는 사회의 민낯이다. 언어 권력이 난무하는 사회는 불평등한 구조를 수반한다. 언어 권력에서 언어 권리로의 이행, 아직 갈 길이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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