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역사박물관, 오는 10월 21일까지 '청년문화의 개척지, 신촌' 기획전시

1969년 촬영된 신촌로터리. (서울시 제공)
1969년 촬영된 신촌로터리. (서울시 제공)

[그린포스트코리아 황인솔 기자] 청년문화의 전성기였던 1970~1990년대, 서울시 서대문구 '신촌' 일대는 학문, 민주화, 예술의 성지라 불렸다. 대학생들의 아지트이자 예술가들이 모이던 신촌은 어떻게 조성됐고, 또 변화를 겪었을까.

서울역사박물관은 10월 21일까지 '청년문화의 개척지, 신촌' 기획전시를 진행한다고 20일 밝혔다.

신촌이란 '새롭게 형성된 마을', '새마을'이라는 뜻이다. 이러한 이름처럼 새로운 문물과 문화가 도입되는 데 큰 역할을 했던 장소다. 

일제강점기에 다수의 대학이 설립되면서 신촌은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1917년 연희전문대와 1935년 이화전문학교가 이전한 이후 신촌은 대학촌이라 불렸다.

이후 서강대, 추계예술대, 명지대 등 인근에 크고 작은 대학이 자리 잡으며 청년들이 모이게 됐고, 광복 이후에도 서구 근대 학문과 사상 등 개방적인 문화를 받아들이는 지역적 역할을 했다.

이화여대 앞 '이화양장', 1960년 촬영 (서울시 제공)
이화여대 앞 '이화양장', 1960년 촬영 (서울시 제공)

◇커피, 음악, 연극...신촌을 상징하는 '청년문화'

신촌은 유행이 가장 먼저 유입되는 곳으로 이름을 떨쳤다. 원두커피, 언더그라운드 음악, 패션, 사회문화운동에 이르기까지 새롭고 대안적인 문화가 수없이 시도됐고, 이후 전국으로 확산됐다.

1960년대의 신촌은 문인예술가들의 아지트로 주목받았다. 이화여대 근처의 '빠리다방', '빅토리아다방'에는 원고 청탁, 원고료 지불, 필자 추천 등 많은 활동이 이뤄졌다.

또 연극, 미술, 음악 등 예술가들이 결합해 연극공연이나 전시회가 열리기도 했다. 신촌을 배경으로 유신체제 아래 청년들의 모습을 그린 영화 '바보들의 행진'이 제작된 곳도 바로 이곳이다.

아울러 1960년대부터는 이대 앞에 양장점, 구두수선집, 미장원 등 젊은 여성을 주요 대상으로 하는 상업 및 서비스 점포가 밀도 높게 분포하게 된다. 이 시기부터 이대 앞은 전국적으로 옷과 구두를 구입하는 곳으로 명성을 높였다.

신촌 독수리다방, 1970년대 촬영 (서울시 제공)
신촌 독수리다방, 1970년대 촬영 (서울시 제공)

◇민주화 갈망하던 청년들...사회변혁을 꿈꾸다

1970~90년 격동기에 신촌은 사회변혁운동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신촌에서는 대학생 주도로 4한일협정반대, 베트남파병반대, 학원민주화를 외치는 크고 작은 시위가 열렸다.

특히 1987년 연세대 앞에서 이한열 열사가 최루탄에 맞아 사망한 사건은 '6월 항쟁'이 전 국민적 저항으로 확대되는 기폭제가 됐고, 이를 통해 직선제 개헌이라는 값진 결과를 얻어낼 수 있었다.

이후 신촌의 학생운동권 출신 인사들은 대학가를 떠나 노동자, 도시빈민, 여성, 농민운동 등 다양한 영역에서 활동하며 한국 사회의 민주화운동을 이끌었다.

청년문화의 개척지, 신촌 전시는 22일부터 평일 오전 9시~오후 8시 사이에 관람할 수 있다. 전시는 무료이며, 공휴일을 제외한 매주 월요일은 휴관이다.

breezy@greenpost.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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