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니아. 어떤 한 가지 일에 몹시 열중하는 사람, 또는 그런 일. 세상이 넓고 복잡해지면서 마니아의 종류도 다양해지고 있다. 비교적 대중적인 마니아부터, 남들은 모두 외면하는 아주 소소한 것에 몸 바치는 마니아까지. 이들은 말한다. “99명이 오른쪽이라 해도, 내가 왼쪽을 택하면 그것이 바로 내 길이다.” 좋아하는 일에 열중하는 것만으로 사회를 한층 다채롭게 만드는 그들. 이들이 새롭게 만들어내는 ‘마니아 문화’를 통해, ‘흥에 겨운 소수’가 인생을 즐기는 방식을 알아본다. [편집자주]

경기도에 거주하는 김선희(가명‧30대)씨는 평범한 중학교 교사지만, 취미는 독특하다. 소위 말하는 ‘만년필 마니아’다. 

만년필을 좋아한다고 하면 주변 사람들은 눈을 휘둥그레 뜬다. “아직도 그걸 쓰는 사람이 있어?”, “비싸기만 하고 불편하지 않아?”, “어떻게 쓰는 거야?”, 심지어 “그게 뭐야?”라는 질문까지 받아봤다고 한다.

만년필. 펜대에 잉크를 넣어 금속 닙(펜촉)을 이용해 쓰는 필기구. '잉크가 샘물과 같이 솟아난다’는 뜻에서 ‘파운틴 펜(Fountain Pen)’이라는 별칭으로도 불린다. 시초는 1809년의 ‘잉크달린 펜’이지만 현재와 같은 형태로 정착된 것은 1884년부터다. 당시 미국의 보험 판매원 루이스 에디슨 워터맨(Lewis Edson Waterman)은 펜에서 잉크가 흐르는 바람에 중요한 계약을 망친 후 “잉크가 흐르지 않는 펜을 만들겠다”고 결심하고 만년필을 발명했다. 그의 이름은 유명 브랜드 ‘워터맨’에 그대로 남아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워터맨의 발명으로 만년필은 대중적인 필기구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쓸 때마다 잉크를 채우고 내부를 세척해야 하는 번거로움 때문에 지금은 국가 간 대사, 기업 간 계약 같은 일 외에는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 만년필의 빈자리는 볼펜이 차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에는 김선희씨 같은 만년필마니아가 의외로 많다. 김선희씨처럼 본격적으로 ‘즐기는’ 사람부터 “가볍게 한 자루 써 볼까?”하는 사람까지 다양하다.

그들이 말하는 만년필의 매력은 무엇일까?

'펠리칸' 사의 만년필과 잉크. (Pixabay 제공) 2018.07.23/그린포스트코리아
'펠리칸' 사의 만년필과 에델슈타인 잉크. (Pixabay 제공) 2018.07.23/그린포스트코리아

◇나만의 필기구로 길들이기 

만년필의 존재 이유는 ‘필기’다. 글을 쓰는 것이다. 자연스럽게 글을 많이 쓰는 사람, 많이 쓸 필요가 있는 사람들의 이목을 모았다. 직업상 글을 쓰는 사람도 있고, 고시 준비 등으로 어쩔 수 없이 써야 하는 사람도 있고, 취미로 쓰는 사람도 있다.

김선희씨는 취미파다. 그의 취미는 ‘필사’다. 좋아하는 책을 펼쳐놓고 무조건 베껴 쓰는 것이다. 그렇게 베낀 책이 무려 2000페이지를 넘는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만년필에 눈이 갔다. 만년필은 모세관 현상을 통해 잉크가 흘러나오는 방식이기 때문에 힘을 주지 않아도 글을 많이 쓸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이다. 그렇게 해서 처음으로 구입한 만년필이 실용성으로 유명한 독일 ‘라미’사의 ‘사파리’였다. 

기종을 선택할 때 고민을 많이 했다고 한다. 만년필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브랜드는 ‘몽블랑’이지만 고가품인데다 일상적으로 사용하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설명을 들었다. 그 다음으로 유명한 브랜드인 ‘파커’, ‘펠리칸’ 등도 살펴봤다. 그러나 라미의 사파리가 가장 마음에 들었다. 

“전에는 브랜드명으로 고르는 사람이 많았다면, 요즘에는 ‘내 손에 맞는가’, ‘일상적으로 쓰기에 좋은가’를 중심으로 ‘나만의 만년필’을 찾는 사람들이 늘었어요.” 사파리를 추천해 준 매장 직원의 말이다.  

 

만년필의 가장 큰 매력? ‘나만의 필기구’라는 것이죠.

 

김선희씨는 사파리를 처음 손에 쥔 날을 기억한다. 떨리는 마음으로 잉크를 채우고 조심스레 종이에 갖다 대자 펜이 움직였다. “마치 혼자 알아서 움직이는 것 같았다”고 김씨는 말했다. 그 사각거리는 필기감에 완전히 반했다. 신이 난 나머지 밤이 새도록 필사를 하고 다음 날 눈 밑이 퀭한 채 출근했다.

‘혼자 알아서 움직이는 것 같은’ 물 흐르는 듯한 필기감은 시간이 갈수록 풍부해졌다. 금속 닙이 김선희씨의 필기 습관에 맞춰 닳으면서 길들여진 것이다. 닙이 종이와 마찰하면서 내는 사각사각 소리도 귀를 즐겁게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사파리는 김선희씨의 ‘맞춤형 만년필’이 됐다. ‘세상에 단 하나 뿐인 나만의 필기구’가 된 것이다. 

김선희씨의 만년필 '사파리'. (홍민영 기자 촬영) 2018.07.23/그린포스트코리아
김선희씨의 만년필 '사파리'. (홍민영 기자 촬영) 2018.07.23/그린포스트코리아

◇만년필은 또 다른 만년필을 부르고

사파리의 필기감을 즐기던 어느 날, 문득 김선희씨는 “다른 만년필도 이럴까?”하는 생각을 했다. 사파리를 구입했던 판매처 사이트를 뒤져봤다. 그러자 만년필 브랜드에는 여러 종류가 있고, 브랜드마다 필기감이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됐다.

여러 가지로 고민하던 그가 선택한 두 번째 만년필은 ‘플래티넘’의 ‘스탠다드’ 만년필이었다. 금으로 된 금촉은 필기감이 절묘하다는 글을 읽은 것이다. 플래티넘 스탠다드는 14k 금촉 중 가장 저렴한 만년필이었다. 

스탠다드는 사파리와는 다른, 아주 단단하고 심지가 굳은 필기감을 가지고 있었다. 글씨의 굵기도 달랐다. 약간 굵게 나오는 사파리와 달리 아주 얇고 세밀한 선을 보여줬다. 영어 스펠링을 주로 쓰는 서양 브랜드 만년필과 달리 플래티넘, 파이롯트, 세일러 등 동양 브랜드 만년필들은 한자를 써야 하기 때문에 훨씬 가느다랗게 나온다.

사파리와는 사뭇 달랐지만, 플래티넘의 필기감도 나름의 매력이 있었다. 

그런 식으로 하나 둘 늘어난 만년필이 어느새 14자루가 됐다. 가격대도 3000원대부터 십 수 만원까지 다양하다. 

◇만년필은 잉크를 부르고 동료를 부르고

만년필의 또 다른 매력은 잉크다. 한 자루를 사면 계속 그 색만 써야 하는 볼펜과 달리 여러 가지 색의 잉크를 교체하며 쓸 수 있다. 만년필이 늘어나니 자연스럽게 잉크에 대한 관심도 올라갔고, 그런 호기심은 다시 잉크 수집으로 이어졌다.

제이허빈, 라미, 몽블랑, 세일러…. 잉크 브랜드는 만년필 브랜드만큼이나 많았고 색도 다양했다. ‘달의 먼지’, ‘불의 땅’, ‘츠키요(月夜)’, ‘오이스터 그레이(oyster gray)’, ‘아메시스트(Amethyst)’ 등 로맨틱한 이름이 붙은 이 오묘한 색의 액체가 사람들을 매혹시켰다. 

김선희씨의 또 다른 즐거움은 같은 취미를 즐기는 사람들이 늘어났다는 것이다. 필사가 취미인 또 다른 친구에게 사파리를 건넨 것이 계기였다. 지금은 정기적으로 만나 필사를 하고 서로의 만년필이나 잉크를 교환해 사용해보고 있다. 인터넷에는 김선희씨처럼 만년필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동호회까지 꾸며 놓았다.

만년필은 ‘쓰기’에 대한 색다른 즐거움.

김선희씨는 말했다. 

“자동차가 운전자 없이 홀로 도로를 질주하는 이 21세기에 무슨 만년필이냐고 하는 사람도 있어요. 하지만 만년필 같은 아날로그 제품에는 디지털이 따라올 수 없는 ‘손맛’이 있다고 생각해요. 이 ‘손맛’이야말로 인생을 살아가는 소소한 즐거움이죠. 나 같은 사람들이 존재하는 한, 만년필은 작게나마 명맥을 유지해갈 것이라 생각합니다.”

'몽블랑'사의 만년필. (Pixabay 제공) 2018.07.23/그린포스트코리아
'몽블랑'사의 만년필. (Pixabay 제공) 2018.07.23/그린포스트코리아

 

hmy10@greenpost.kr

저작권자 © 그린포스트코리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