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널’로 시작해 ‘아가씨’를 거쳐 하·정·우로 끝나는 이야기

배우 하정우 [제공=포커스뉴스]

 


‘터널’ 시나리오를 보며 가슴이 먹먹하도록 울었다. 울고 나면 후련해지듯 상처가 아물고 김성훈 감독의 따스하면서도 서늘한 시선에서 마음의 위로를 받았다.

영화를 처음 보던 날, 머릿속에 혼란이 일었다. 왜 이렇게 재미있지? 재난영화가 이렇게 경쾌해도 되나? 글이 배우와 영화적 장치의 옷을 입고 영상이 된 모습에 적잖은 낯설음을 느꼈다. 이내 김성훈 디자인, 하정우 실행 방식으로 탄생한 새로운 문법의 재난영화에 고개를 끄덕였다. 일반적 재난영화의 문법에 익숙한 좁은 시야와 얕은 상상력으로 읽었던 시나리오보다 한층 더 깊은 울림이 뱃속을 파고들었다.

# 시작 5분만에 무너진 터널, 1시간50분을 끌고가는 '게임' 

한국 재난영화에 새로운 문법을 만든 사람은 김성훈 감독이다. 영화의 주연을 맡은 하정우는 이미 시나리오 단계에서 그 새로움을 읽었고 그 ‘뻔하지’ 않음에 ‘터널’(감독 김성훈, 제작 어나더썬데이·하이스토리·비에이 엔터테인먼트, 배급 쇼박스) 출연을 결정했다.

“저도 다른 재난영화처럼 살 뺐어요(웃음). 영양사와 함께 프로그램 맞춰 가며 몸살 뺀 건데, 촘촘한 스케줄에 얼굴이 부어서 티가 안 났나? 저도 아쉬운 부분이에요, 오롯이 표현이 안 돼서요.”

유머코드 항시 장착의 하정우답게 허를 찌르며 짧지 않은 답변이 시작됐다.

“그냥 아파하고 고통스럽기만 했다면 애초에 이 작품을 선택하지 않을 거예요. 보통 재난이 터지기 전까지 드라마를 깔고, 재난 터지고, 고통 받고, 엔딩에 치닫잖아요. 이 영화는 바로 시작하자마자 5분 만에 터널이 무너져서 갇히게 돼요. 나머지 1시간 50분을 어떻게 끌고 가느냐의 게임이었죠, 그런 지점이 흥미로웠고. 터닝 포인트들이 있어요. 미나의 죽음, 강아지 탱이와의 시작, 새로운 공간의 발견, 물의 발견, 2차 구조 실패, 배터리 방전, 최후통첩, 그리고 엔딩의 단계가 있는데 여러 가지 희로애락으로 채워 포인트들에 도달하며 끝까지 가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또 아무리 갇혔다 해도 그 안 나름대로의 희로애락이 있고, 한숨 돌리며 쉴 수 있는 포인트 있지 않을까요. ‘터널’은 단면적이지 않아서 좋았어요. (재난영화에 유머가 들어가는 부분이 기존 문법과 달라 걱정하기보다는) 감독님께 쉬어 가는 부분을 극대화시키자, 코미디로 무장하자 제안했어요. 시나리오 2고 시점에서 처음 받고 감독님이 7개월 각색 작업하신 후 완고를 받았는데, 7개월 만나면서 얘기한 것들이 자연스럽게 반영됐고, 그렇게 촬영이 진행됐습니다.”

# '터널'은 다른 길을 냈다…김성훈 설계, 하정우 시공

아직 '터널'에 들어가지 않은 분들의 관람을 방해하지 않는 선에서 영화가 보여주는 새로움을 한 관객의 표현을 빌려 얘기하자면 웃음 50, 탄성 30, 감동 20의 휴먼드라마다. 흔히 눈물의 감동 80에 집중하며 지침 방지 조미료로 웃음 20%를 가미하는 여느 재난영화와 다르다. 많은 재난영화들이 감동 제조에 목을 걸다 보니 다양한 사연의 인물들이 복수로 등장하고, 그들이 구조되어야 하는 이유를 피력하거나 죽음의 슬픔을 극대화하기 위해 문제의 사건 전 벌어졌던 주변인들과의 안타까운 에피소드를 극화한다. 가까이 ‘타워’만 봐도 그렇다.

하지만 ‘터널’은 다른 길을 냈다. 무너진 터널 안에는 자동차영업으로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아가는 이정수가 있을 뿐이고 아내와 딸, 가족과의 사연은 사고 전에도 후에도 현재 시점으로든 과거 회상으로든 엮이지 않는다. 터널 안에 갇힌 한 사내의 치열한 생존기, 그를 구조하거나 포기하려는 터널 밖 냉엄한 현실이 존재할 뿐이다.

김성훈 감독은 하정우라는 배우의 실제 캐릭터를 활용해 어떠한 상황에서도 유머를 잃지 않는 정수의 고군분투를 유머러스하게 결국 그래서 더욱 가슴 아프게, 터널 안을 판타지로 구축했다. 터널 밖에는 생명에 대한 예의를 끝까지 포기 않는 구조대장 대경과 남편을 사지에 홀로 둔 아내 세현을 두어 그들의 희망과 절망을 오달수와 배두나의 진심 연기를 통해 사실감 넘치는 현실로 풍자했다.

영화 한 편이 만들어지기까지 숱한 사람의 고민과 노고와 돈이 보태지지만, 새로운 재난영화 탄생의 일등공신은 김성훈 감독과 하정우 배우다. 김성훈 감독은 어둡고 답답한 터널에 유머와 풍자라는 등을 달아 환히 비추고자 했고, 그것을 가능하게 할 수 있는 배우로 하정우를 선택했다. 김 감독의 말대로 그 어느 연기 잘하는 배우가 와도 불가능했던 목표였고 어떠한 순간에도 여유와 유머를 잃지 않고, 어떠한 공간에도 희망과 긍정의 에너지를 불어넣는 하정우라는 배우가 있어 가능했던 결과물이 ‘터널’이다.

# 하정우는 왜 기꺼이 '재활용'을 경계하지 않는가 

배우 하정우의 장점을 최대한 활용하는 영화 전략. 김성훈 감독은 익히 우리가 배우 하정우에 대해 알고 있는 특성이거나 하정우 스스로 10년간의 영화작업을 통해 가꿔온 이미지를 활용했다. 감독은 시나리오가 막힐 때마다 하정우를 생각하며 풀어갔다고 밝혔다. 감독의 입장에서야 얼마든지 취할 수 있는 방법이지만, 자신의 기존 캐릭터가 재활용되는 것을 배우가 경계하지 않는다는 건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배우 하정우에게 이런 일은 처음도 아니다.

‘멋진 하루’뿐 아니라 ‘암살’ ‘아가씨’에서도 절체절명의 순간에 여유와 유머를 유지했고, ‘비스티 보이즈’뿐 아니라 ‘황해’ ‘더 테러라이브’에서도 주변 인물과 사물 하나하나에 동물적으로 반응하며 원맨쇼를 펼쳤다. ‘터널’에서는 둘 다를 했다.

하정우는 자신의 필모그래피 관리를 제1 목표로 두고, 그동안 시도하지 않았던 캐릭터나 장르에 도전하는 것을 지상과제로 삼지 않는다. 어느 감독과의 작업인가를 중시하며, 만일 감독이 원한다면 ‘기꺼이’ 이미 자신이 선보인 바 있는 캐릭터든 형성돼 온 이미지든 ‘다시’ 꺼낸다. 이러한 그의 선택은 두 가지로 읽힌다.

첫째는 자신감이다. 같은 듯 보이지만 또 다를 수 있다는 자신감, 설사 같다고 해도 새로운 매력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지 않고서야 이토록 위험한 선택을 하기는 어렵다. 둘째는 작품과 그것을 연출하는 감독에 대한 존경의 마음이다. 영화의 완성을 위해서라면, 그것을 위해 감독이 필요하다고 판단하면 하정우는 ‘한다’. 하정우는 배우이기에 앞서 영화인이다. 배우로서만, 하나의 캐릭터를 중심으로 해당 영화를 부분적으로 보기보다는 하나의 작품을 위해 의기투합한 영화인의 한 사람으로서 영화 전체를 바라본다. 말하자면 캐릭터라는 나무가 아니라 영화라는 숲을 본다.

보다 중요한 것은 감독이 부여하고 하정우 스스로 선택한 작품 전체에서의 역할을 신이 내린 미션을 실행하는 ‘사제’의 마음으로 진과 성을 다해 행한다는 사실이다. 촬영 시작 전 사전제작 단계로부터 시작해서 마지막 관객을 만나는 홍보행사에 이르기까지 혼신을 다한다.

# 하정우, 감독과 관객 사이에 선 '중개인' 

이제 배우 하정우에게 하나의 수식어를 더 붙이고 싶다. ‘중개인’이다. 집을 팔려는 사람과 사려는 사람 사이에 부동산 중개인이 있다면, 시나리오를 영화로 만들어 관객을 만나고 싶은 감독과 귀한 돈과 시간을 들여 보는 것인 만큼 후회 없는 선택을 하고 싶은 관객 사이에 하정우가 서 있다.

‘아가씨’를 예로 들자면, 미장센부터 배우들의 연기까지 볼거리가 너무 많은데다 한국 상업영화 최초의 여성 정사신이 담긴 파격도 대단하고 일제강점기 조선사회에 근대성이 도입된 과정을 개개인의 사연과 심리를 통해 통찰하는 ‘쉽지 않은 영화’의 높은 대문을 활짝 열어 관객을 맞이하는 역할을 하정우가 했다. 친절한 하정우의 안내 속에 관객은 박찬욱의 예술 세계에 보다 수월하게 깊이 매료됐다. 코우즈키(조진웅 분)와 아가씨 히데코(김민희 분) 사이에 선 것도, 아가씨와 몸종 숙희(김태리 분) 사이에 선 것도 백작 역의 하정우였다. 감독 박찬욱의 선구안이었다.

“정리된 지점은 아니었지만, 하정우라는 배우가 가진 인간미, 소탈함, 분명히 땅에 발을 디딘 사람이라는 느낌이 박찬욱과 관객 사이에 하정우가 있다는 것과 일맥상통하지 않을까 해요. 영화에 대한 진입장벽을 낮추는, 관객이 보다 쉽게 등장인물들을 살아 숨 쉬는 인간으로 느끼게 할 배우가 필요했어요. 또 다른 면으로 보면 ‘아가씨’가 인공적적으로 꾸며진 영화, 시대나 장소가 정확하게 딱 현대 관객에게 잡히는 영화가 아니잖아요. 낯선 공간…, 그런 점에 있어서 하정우가 관객을 영화 속의 세계로 확 끌고 들어오는데 좋은 역할을 하리라 기대했어요. 그런데 이것조차 사후적인 해석인지도 모르겠어요. 조만간 하정우랑 작품을 하지 않을까 생각했고 하정우가 할 수 있는 작품, 배역이 생겼으니까 자연스럽게 얘기가 나왔던 거죠. ‘암살’ 파티 때 ‘시나리오 하나 보낼까?’ 처음 얘기 꺼냈던 게 (바로 출연으로 이어졌어요). 하와이 놀러 가 있을 때 이메일로 보낸 것 같은데…”.

‘터널’은 두 말할 나위 없다. 어두운 터널 안으로 관객은 하정우이기에, 하정우의 안내를 받아 진입한다. 그의 반응을 공유하며 공포와 두려움이 엄습한다. 하지만 곧, 집안에 아이 하나 있으면 온 식구가 손 놓고 아이만 쳐다봐도 즐겁듯, 아이처럼 반응하는 하정우식 생존기에 몰두하다 보면 터널의 어둠과 무너져 내린 돌덩이·철근들은 더 이상 우리를 짓누르지 않는다. 되레 고립이 가져온 영화적 판타지를 즐기고 있는 우리 자신을 발견한다. 감독 김성훈의 설계다.

“일단 기본적 설계는 그렇게 했는데 그것을 완성하고 가능하게 했던 것은 하정우였습니다. 자체 발광하는 듯한 유머라든가 연민이라든가 아이와 같은 순수함을 가진 하정우가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겁니다. 하정우는 ‘아이’예요. 집안에 아이 있으면 모두가 아이만 쳐다보고 있잖아요, 하정우만 보게 되는 거죠. 아이라서 (모든 연기가) 다 돼요, 아이가 통하지 않는 곳은 없어요. 유일무이한 아이 같은 배우입니다.”

# 오래 두고 봐도 좋은 장기숙성형 배우, 하정우는 보르도다

하정우는 ‘아가씨’가 관객을 만나기 전 ‘터널’에 들어갔고, ‘터널’이 개통되기 전에 ‘신과 함께’ 하고 있다. 정말이지 놀라운 창작욕이다. 맞다, 적어도 배우 하정우의 영화 출연에는 연기가 아니라 창작이라는 말이 어울린다. 하정우는 내로라 하는 감독들, 윤종빈(용서받지 못한 자, 비스티 보이즈, 범죄와의 전쟁: 나쁜놈들 전성시대, 군도: 민란의 시대) 김기덕(시간, 숨) 나홍진(추격자, 황해) 이윤기(멋진 하루) 김용화(국가대표, 신과 함께) 손영성(의뢰인, 앙드레김) 전계수(러브픽션) 류승완(베를린) 김병우(더 테러 라이브) 최동훈(암살) 박찬욱(아가씨) 김성훈(터널) 그리고 하정우(롤러코스터, 허삼관)와 함께 한국영화의 오늘을 만들고 미래를 그려가고 있다.

만화 ‘신의 물방울’의 표현을 빌자면, 젊었을 때의 매력과 맞바꿔 새로운 매력을 얻어가며 또 다른 맛으로 나이 드는 와인이 있고 젊었을 때의 매력을 유지하되 흐르는 세월을 켜켜이 층으로 쌓으며 중후한 깊이와 복잡한 맛을 더해가는 와인이 있는데, 하정우는 후자다. 하나를 잃고 하나를 얻는 게 정설인 세상에서 쉽지 않은 행보를 가능하게 하는 힘은 무얼까. 데뷔 10년 차에도 잊어버리기는커녕 강하게 다지고 있는 초심, 폭과 깊이를 더해가는 사제의 마음, 감독과 관객 사이에서 굳건히 지키고 있는 중개인의 사명에서 나오는 걸 아닐까.

보르도 와인은 처음부터 장기숙성을 목표로, 오래도록 애호가를 만날 생각 아래 유구한 세월에도 그 풍미가 지켜지도록 코르크를 길고 단단하게 만든다고 한다. 배우 하정우와 함께한 한국영화 10년, 그는 아직 젊고 관객은 아직 하정우에 목마르다. 작품을 차곡차곡 쌓아올려 ‘오래된 와인’으로 숙성해갈 그의 내일을 맛보고 싶다.

dunastar@eco-tv.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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