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원주시 부론면 정산리

흥법사지 삼층석탑. 이하출처=한국관광공사

 

절도, 승려도 없는 텅 빈 절터(폐사지)는 빈터지만 폐허라 부르지 않는다. 외려 '공(空)의 극치'라 여기는 이들이 많다. 

미술사학자 유홍준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서 폐사지 답사가 '절집 답사의 고급 과정'으로 '답사객이 느낄 수 있는 최고의 행복감'이라 했다. 우리나라에는 그런 폐사지가 3000여 곳, 문화재로 지도에 이름을 올린 경우만 약 100곳에 이른다.

원주 역시 폐사지의 명승이다. 폐사지 답사 좀 다닌 이들 사이에 소문이 자자하다. 서쪽 남한강 자락의 흥법사지, 거돈사지, 법천사지가 대표적이다. 세 사찰은 대략 신라 시대에 지어져 임진왜란 때 불탄 천년 고찰이다. 

특히 고려 시대 왕의 스승인 국사들이 머물며 전성기를 누렸다. 빈터에는 국사나 왕사의 탑이나 탑비가 역사를 증언한다. 국보, 보물급 문화재다. 답사보다 고즈넉한 폐사지의 정취를 느끼고 싶을 때는 거돈사지가 으뜸이다. 

흥법사지는 발굴 전이라 허전하고, 법천사지는 발굴 중이라 어수선하다. 낭만 어린 사유의 풍경과 거리가 있다. 그에 반해 거돈사지는 말끔하게 정돈한 폐사지다. 여행자들이 그리는 모습에 가깝다. 폐사지가 첫 방문인 이들에게 안성맞춤이다.

거돈사지는 문막 IC나 원주 시가지에서 섬강을 지나고 남한강을 거슬러 이른다. 동쪽에 정산저수지가 있어 과거 사찰 앞까지 배가 드나들었음을 부연한다. 사찰 아래 옛 정산분교에 당간지주가 있어 그 영역을 가늠한다. 

가장 먼저 맞이하는 건 석축과 수령 1000년이 넘는 느티나무다. 고찰은 4~5m 옹벽 위에 지어 길에서 보이지 않고, 남서쪽 석축 위의 느티나무만 가지를 내려 인사한다. 고목은 뿌리가 석축 사이를 파고들어 마치 돌을 움켜쥔 듯하다. '돌을 먹고 사는 나무'라 부르는 이유다.

거돈사지의 1000년 느티나무와 석축.

 

느티나무를 지나면 석축 가운데로 계단이 났다. 거돈사지는 계단에 오를 때마다 그 높이만큼 제 모습을 드러낸다. 처음에는 삼층석탑의 상단이 보이고, 금당 터가 차츰차츰 빗장을 연다. 마치 지상에서 천상으로 걸음을 옮기는 듯하다. 

금당 터는 내벽과 외벽의 주춧돌이 있고, 그 가운데 불상의 좌대가 있다. 불상이 절 한가운데 자리 잡은 구조다. 삼층석탑의 높이를 감안하면 2층 규모로 보인다. 그 주변으로 가람의 한옥이 너른 터를 채웠으리라.

무심한 듯 옛 가람의 축과 터를 디뎌 안쪽 가장 높은 땅의 원공국사탑에서 가장자리 1000년 느티나무까지, 땅의 숨결을 더듬어 오간다. 

무너진(廢) 땅과 깨달음의 절터(寺址)라는 상반된 조합이 묘한 매력을 발산한다. 퍼즐을 맞추듯 시간의 단편을 유추하지 않아도, 사라진 절터를 걷는 일은 누구나 한번 꿈꾸는 사유의 여행임을 새삼 실감한다. 그래도 아쉬움이 남을 때는 폐사지 답사 고급 과정의 행복감을 맛보자.

흥법사지와 법천사지를 아우르는 답사로 꾸릴 때는 탑과 탑비를 눈여겨볼 일이다. 

몇몇 탑과 탑비는 일제강점기 반출 과정에서 서울로 옮겨졌지만, 남은 석물로 고려 불교미술의 매력을 감상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이 경우 탑과 탑비가 세워진 연대순으로 흥법사지, 거돈사지, 법천사지를 찾는다.

흥법사지 진공국사탑비의 머릿돌과 받침돌.

 

흥법사지에서 발굴된 염거화상탑(국보 104호)과 진공대사탑 및 석관(보물 365호)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있고, 진공대사탑비(보물 463호)의 몸돌은 경복궁에 있다. 

지금 흥법사지에는 삼층석탑(보물 464호), 진공대사탑비의 머릿돌과 받침돌만 한 몸인 양 겹쳐져 있다. 머릿돌은 구름 사이에 용의 움직임이 힘차고, 받침돌은 여의주를 문 용머리 거북이 생동감 있다. 고려 초기 탑비의 형태로 왕가의 위엄이 서렸다.

거돈사지에는 원공국사탑비(보물 78호)와 원공국사탑(보물 190호)이 있다. 원공국사탑비는 진공대사탑비에 비해 거북 받침돌이 입체적이다. 머릿돌은 용이 한층 깔끔하게 정돈되었다. 진공대사탑비에 비하면 80여 년이 지난 시기로, 고려의 안정기에 해당한다. 

원공국사탑 진품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있고, 거돈사지에 재현한 것은 손상된 부분을 되살려 겉보기는 외려 완성품에 가깝다. 중간부의 서까래 조각이 사실감 있다.

법천사지 지광국사탑비(국보 59호)는 세 폐사지 유물 가운데 가장 후대 작품이다. 지광국사탑(국보 101호)이 경복궁에 있어 탑비만 남았다. 그런데도 묵직한 존재감이 돋보인다. 우선 몸돌은 이전의 탑비와 달리 정교한 조각이 가능한 점판암이다. 

윗부분은 세밀한 도솔천을 그렸고, 측면은 화려한 용무늬를 새겼다. 머릿돌은 반야용선의 배 모양을 형상화했다. 몸돌의 도솔천 그림과 조응한다. 지광국사를 향한 왕의 지극한 마음이다. 받침돌은 거북이 구름 위에 떠 있는 것처럼 묘사했다. 

거북 등에는 다른 폐사지와 달리 만(卍) 자 대신 왕(王) 자를 새겼다. 남한에서 유일한 형태로, 가히 고려 탑비의 정수라 할 만하다.

흥원창에서 바라본 해질녁 풍경

 

폐사지를 돌아본 뒤에는 일몰이 유명한 흥원창으로 걸음을 옮긴다. 고려에서 조선 시대까지 조창이 있던 자리다. 남한강을 사이에 두고 강원도와 충청도, 경기도가 마주한다. 

세곡 200석을 실은 평저선이 원주의 은섬포와 개경, 한양을 오가던 풍경을 상상한다. 저무는 노을빛이 마치 평저선이 가른 물길인 양하다. 

흥원창과 폐사지가 고려 시대 원주의 번성을 상징한다면, 조선 시대는 강원감영이 대신한다. 강원감영은 500년 동안(1395~1895년) 강원도의 중심이었다. 지금의 원주 시가지 일산동 일대다. 포정루를 지나 선화당까지 짧은 거리지만, 긴 역사를 되짚어 걷기에 부족함이 없다.

시장 나들이를 겸한 코스로 삼아도 무난하다. 중앙시장과 자유시장은 원주의 대표 전통시장이다. 강원감영에서 걸어 오갈 수 있다. 만두골목, 한우골목 등의 먹거리도 입맛을 돋운다. 근래에는 원주중앙시장 2층의 미로예술시장이 각광받는다. 

아름다움〔美〕과 맛〔味〕, 미래〔未〕, '삼미'가 있는 시장이다. 원래 중앙시장 상점의 창고가 있었으나, 2013년부터 젊은 예술인들이 터를 잡기 시작해 ‘청년몰’로 거듭났다. 현재 67개 점포가 운영 중이다. 

예전부터 있던 금속 세공점이나 보리밥 집과 새로 문을 연 카페, 공방, 갤러리가 뒤섞였다. 개업을 준비하는 상점도 여럿이다. 4개 동으로 구성되어 건물을 미로처럼 오가는 재미도 쏠쏠하다. 3월부터 둘째 토·일요일에 벼룩시장이 열린다.

〈당일 여행 코스〉
역사 체험 코스 / 원주 강원감영→원주 거돈사지→원주 법천사지→흥원창
힐링 코스 / 원주 거돈사지→흥원창→미로예술시장→발효초컬릿황후

〈1박 2일 여행 코스〉
첫째 날 / 흥법사지→원주 법천사지→원주 거돈사지→흥원창
둘째 날 / 원주 강원감영→미로예술시장→발효초컬릿황후

〈여행 정보〉

○ 대중교통 정보
[기차] 청량리역-원주역, 무궁화호·새마을호 하루 18회(06:40~23:25) 운행, 1시간~1시간 20분 소요.
[버스] 서울-원주, 동서울종합터미널에서 10~30분 간격(06:10~22:25) 운행, 약 1시간 30분 소요.

○ 자가운전 정보
영동고속도로 문막 IC→문막IC사거리 부론·여주 방면 좌회전→원문로 14.8km→부론면입구삼거리 부귀로 방면 좌회전 4.8km→정산로 방면 좌회전 2.8km→원주 거돈사지

○ 주변 볼거리
충효사, 미륵산 미륵불, 원주레일파크, 간현관광지, 박경리문학공원, 원주한지테마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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