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폭 피해자 평균 연령 78세..'특별법' 16년째 논의만, 또 20대 국회로 바통 넘기나

'2,517명'

1945년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자폭탄 피해자 가운데 한국에 생존해 있는 것으로 정부가 파악하고 있는 이들의 숫자다.

이들의 평균 나이는 77.7세. 노년층이지만 원폭 투하 시기가 71년 전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평균 열살도 안되는 시기에 원폭 피해자가 돼 평생을 피폭 후유증 등에 시달려 온 셈이다.

하지만 70년 넘는 고통의 세월이 흐른 지금도 국가가 원폭 피해자에게 해 준 것은 매월 10만 원이라는 '진료보조비' 지원이 전부다. 

진료보조비란 진료를 받을 때 보험 등으로 낼 수 있는 돈을 내고 부족한 경우 추가로 지원하는 금액이다. 즉 매달 10만 원 이상 진료비가 들어가면 개인이 돈을 내야 한다는 얘기다.

이들에게는 한센인 등 사회적 약자들에게 지급되는 생계지원비도 없다. 현행 법이나 제도만 보면 "우리 정부가 남의 나라에서 원폭 맞은 것을 대한민국이 보살펴 줄 이유가 없다"는 식으로 방치하고 있다고 해도 딱히 할 말이 없다.

원폭 피해 1세대 이곡지 할머니. (자료사진)

 

이런 열악한 상황을 타개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제19대 국회에서도 이들을 돕기 위한 4건의 법안 발의가 있었다. 원폭 피해자들에 대한 지원 등을 담은 법안이다.

문제는 이 법안이 제19대 국회가 끝나기 전에 통과할 가능성이 점점 더 희박해지고 있다는 점이다. 23일로 예정된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의 무산도 한 몫 했다. 가까스로 국회 상임위원회를 통과한 법안은 본회의 상정도 못 한 채 무산될 위기에 처했다.


보건복지위, 진통 끝에 법사위로 '특별법' 바통 넘겨

지난 17일 국회 보건복지위원회는 법안심사소위원회를 개최하고 원폭 피해자들과 관련한 특별법들을 하나의 법안으로 통합하기로 하고 주무부처인 보건복지부와 관련 내용을 검토했다.

쟁점은 크게 두 가지로 압축된다. 원폭 '피해자'의 범위에 자녀까지 포함시키느냐와 생활 지원비를 지급하느냐 여부다.   

주무부처인 보건복지부는 둘 모두에 난색을 보였다. 우선 피해자의 범위에 대해 복지부는 원폭 피폭자의 자녀는 각종 질환 등 후유증 등이 있다 하더라도 직접 원폭에 노출된 경우가 아니기 때문에 원폭 피해자로 볼 수 없다며 반대했다. 

속기록에 따르면 이같은 복지부 의견에 대해 의원들도 대부분 수긍하는 분위기였다. 이에따라 보건복지부는 법안에서 피해자 자녀를 제외하자는 의견을 법안심사소위에 제출했고 대부분의 의원들은 정부안에 합의했다.

문제는 생계 지원비. 보건복지부는 이 부분에 대해서도 예산 부족과 선례를 남길 수 없다며 생계지원을 할 수 없다는 입장을 피력했다.

권준욱 복지부 공공보건정책관은 "원폭 피해의 경우에는 정확하게 말하자면 강제징용이라기보다는 원폭 피해가 발생한 당시에 현지에 거주하시던 분들"이라며 "일본도 (자국민에게) 의료비만 지원할 뿐 생활 지원은 하지 않는다"며 생계비 지원에 난색을 표했다.

단순히 외적인 원인으로 어렵게 살고 있다는 이유로 국가가 생계비를 지원하게 되면 추후 예산 등에 있어 감당할 수 없게 된다는 논리다. 

이와관련 방문규 복지부 차관은 "제도가 한번 설립이 되면 유사한 사례에 대부분 같이 적용이 돼야 되는 그런 문제를 걱정해서 말씀을 드린 것"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의원들은 "특별법에서 생계비 지원이 빠지면 지금 상황과 다를 바가 뭐가 있냐"며 정부의 의지없음을 질타했다. 특별법을 만드려는 배경과 취지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의원들의 지적이다.

최동익 더불어민주당(이하 더민주) 의원은 "한 달에 20만 원 줘야 60억 원이다"며 "우리가 1,000억 원 가까이 돈을 들여 일반 성인병에 대해 지원해주는 것은 찬성하면서 60억 원밖에 안 되는 돈을 가지고 예산이 없다고 하면 이 법을 만들 필요가 뭐가 있나"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남인순 더민주 의원도 "정부 답변을 보고 굉장히 실망했다"며 "'그 당시에 거기에 있었기 때문에'라고 얘기한 것은 역사 의식이 결여된 얘기"라고 비판했다.

논란 끝에 결국 정부에서 일정 부분을 지원한다는 내용으로 법 조문을 마무리하기로 하고 해당 법안은 보건복지위 법안심사소위를 통과했다. 

 


법사위 상정 '불투명'..또 자동 폐기되나..

원폭 피해자 지원 특별법이 보건복지위를 통과하긴 했지만 아직 '산 넘어 산'이다. 우선 국회 법사위를 통과해야 한다. 이후 국회 본회의에서 의원들의 표결 과정을 거쳐야 법안으로 효력을 가질 수 있다.

23일 법사위는 임시 전체회의를 열고 모두 96건의 법안을 처리하기로 했다. 원폭 피해자 지원 특별법도 그 중 하나다.

하지만 이 일정은 취소됐다. 이상민 국회 법사위원장이 이날 오전 "여야가 총선 선거구 획정안을 합의하지 않으면 회의를 개최하지 않겠다"며 전체회의 소집을 거부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일단 여야는 이날 지역구 의석 253석과 비례대표 47석으로 나뉜 선거구 획정 기준안에 전격 합의한 상태다. 문제는 향후 법사위가 열리더라도 법안들을 심사할 수 있는 시간이 부족하다는 부분이다.

추후 법사위 임시 전체회의는 26일 개최될 예정이고 같은 날 국회 본회의 일정이 잡혀 있지만 이날 법안 심사 대상에 원폭 피해자 지원 특별법이 포함될 지는 미지수다. 선거구 획정안 통과를 위한 원포인트 국회가 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야당 관계자는 "이달 내에 법안이 법사위와 본회의를 통과하지 않으면 총선 일정 등을 봤을 때 다음달 다시 논의되기 힘들 것"이라며 "이 경우 자동 폐기되고 제20대 국회에서 처음부터 다시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고 우려를 나타냈다.

'한국인 원자폭탄 피해자 지원을 위한 특별법안' 논의가 처음 시작된 것은 지난 16대 국회에서부터다. 16년이 지났다. 16, 17, 18, 19대 국회 16년 동안 '논의'만 하고 있다. 이번 국회에서 통과되지 못하고 20대 국회로 넘어가면 같은 법안을 5대 국회에 걸쳐 심의하는 진기록을 세우게 된다.

그사이 일본군 성노예 피해 할머니들처럼 원폭 피해자들도 세월이 흘러가며 한명 두명씩 숨져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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