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습기 살균제·삼성반도체 백혈병 피해자들 무력감 느껴"

23일 오후 서울 프라자호텔에서 방한 결과를 발표 중인 바쉬쿠트 툰작 유엔 인권위 특별보고관.(가운데)

 

[환경TV뉴스] 신준섭 기자 = 무력감과 배신감, 부당함, 좌절감, 비통함. UN 인권위원회 유해물질 특별보고관이 한국에사 피해 사례를 조사한 결과를 밝히는 기자회견 자리에서 쏟아낸 단어들이다.

유엔(UN)의 대표로 한국을 방문, 지난 12일부터 유해물질로 피해를 받고 있는 피해자들을 면담하고 이들의 상황을 조사한 바쉬쿠트 툰작 유엔 인권위원회 유해물질 특별보고관이 23일 오후 서울 프라자호텔에서 기자회견을 가졌다. 기자회견 내내 툰작 보고관은 격앙된 모습이었다.

유엔 차원에서 우리나라의 유해물질로 인한 인권 침해 상황을 발표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환경부를 비롯해 외교부와 국방부, 고용노동부, 산업통상자원부 등 정부 관계자들을 면담한 툰작 특별보고관은 현장의 목소리에 집중했다. 

중금속 피해를 겪고 있는 경기도 김포시 주민들과 원자력 발전소 문제의 중심지 중 하나인 경주 월성 원자력 단지 주변, 미군기지 문제와 관련해 충남 보령시 등을 돌아 봤다.

이 과정을 통해 그가 주목한 사례는 크게 세 가지다. 옥시레킷벤키저의 가습기 살균제 피해, 삼성반도체 백혈병 피해, 그리고 김포 거물대리로 대표되는 지역사회 피해다.

특히 그는 글로벌 기업들이 양산한 피해가 인권을 침해하고 있지 않은 지 여부에 큰 관심을 보였다. 유엔이 제정한 '기업과 인권의 지도 원칙'에 대해 기업들이 이를 잘 지켜 오고 있는 지 여부다.

최종 발표가 아닌 예비 조사 결과라고는 하지만, 그 결과는 툰작 특별보고관이 공식 석상에서 감정적인 단어들을 굳이 사용해야 할 정도로 심각했다.

우선 옥시레킷벤키저가 중심이 된 '가습기 살균제' 문제다. 지난 17일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 8명을 만나고, 옥시레킷벤키저 관계자를 면담했다는 그의 잠정적인 결론은 '기업의 잘못'이다.

툰작 특별보고관은 "옥시레킷벤키저는 시판 당시 유해성에 관한 사실상의 정보가 존재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가습기로 인해 살포되는 화학물질의 흡입 독성, 그리고 건강상의 위험에 따른 조사를 한 번도 진행하지 않았다고 본다"고 못박았다.

영국 옥시레킷벤키저 본사를 항의 방문한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 (자료화면)

 

하지만 국내에서 시판된 가습기 살균제 중 약 80%를 판매했던 옥시레킷벤키저는 여전히 법적 책임이 없다는 입장을 고수 중이다.

정부도 책임 면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했다. 툰작 특별보고관은 "피해자 증언에 따르면 제조사와 정부 모두 의미 있는 사과를 안 했다"며 "피해자들은 유사사고의 재발 방지를 위한 조치들이 충분하지 않다고 우려한다"고 전했다.

두 번째로 주목한 사례는 삼성반도체에서 근무하다 백혈병 등의 피해를 입은 근로자들의 근로 환경 문제다. 비단 삼성반도체뿐만 아니라 유해 화학물질을 공정 상에서 다루는 모든 기업들이 여기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게 그의 판단이다.

툰작 특별보고관은 "삼성전자의 많은 근로자들이 인권보다는 이윤 추구에 우선순위가 있는 근무 환경 때문에 피해를 봤다고 본다. 우려를 표명하고 싶다"고 직접적으로 말했다.

그는 이어 "피해자 주장에 따르면 하루에 유해물질을 사용하거나 접촉하는 시간이 많게는 12시간 정도 그리고 한달에 하루이틀 정도만 쉬었다고 한다"며 "많은 증언에 따르면 근로자들은 생산목표 달성이라는 압박감에 시달렸다"고 밝혔다.

툰작 보고관은 그러면서 "이 과정에서 유해물질에 대해 교육을 받거나 충분한 정보를 받지도 못했고 또 유해물질 노출을 방지하기 위한 충분한 조치도 없었다"고 지적했다.

삼성전자 서초사옥 앞에서 1인 시위 중인 백혈병 피해자 유족. (자료화면)

 

툰작 특별보고관은 "피해자들 개개인은 정부와 기업에 많이 의존해 왔는데, 면담을 통해 상당히 무력감을 느끼고 있고, 믿었던 기관과 단체로부터 배신감을 느끼고 있다는 점을 알게 됐다"고 전했다.

이런 사태가 빚어진 원인에 대해 툰작 특별보고관은 우리나라 제도의 맹점 때문이라고 봤다. 피해자가 대기업을 대상으로 자신의 피해를 직접 증명해야 하는 상황.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 문제라는 지적이다.

그는 "두드러지는 것은 자신들의 질병과 유해물질 간의 증명이 대다수 피해자들에게 있어서 상당히 큰 문제점"이라며 "자신들의 건강과 유해물질 노출 상의 인과관계를 피해자가 입증해야 한다는 부당함이 더욱 큰 상처를 줬다"고 강조했다.

삼성반도체에서 근무하다 백혈병 등으로 산업재해 신청을 한 67명 중 3명, 고작 4.5% 정도만 산재 인정을 받은 것에 대한 유엔 인권위 특별보고관의 평가다.

"임신한 줄 모르고 독성 화학물질을 다루는 생산공정에 있다가 기형아 아들을 낳고 원통해 하는 이와 관련해 저도 좌절감과 비통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는 등의 말로 툰작 특별보고관은 피해자가 피해를 입증해야 하는 '모순'에 대한 '분노'를 여과없이 드러냈다.  

툰작 특별보고관은 그러면서 "한국 정부가 비준한 국제인권조약들과 한국 헌법에 명시돼 있는 '안전하고 건강한 환경에 대한 권리'를 보면 한국 정부 인권 실현을 담당해야 하는 의무가 있다"는 말로 한국 정부의 안이한 대처와 태도를 꼬집었다.

책임 인정을 회피하는 기업들에 대해서도 "기업도 인권을 보장할 책임이 있다"며 "'환경피해구제법' 등 좋은 제도도 있지만 법의 손이 닿지 않는 많은 피해자들도 포괄하는 인권 계획이 마련됐으면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번 예비 조사 결과 발표에 앞서 툰작 특별보고관은 "유엔환경계획(UNEP)이 발간한 경제발전이 화학물질의 생산량과 사용량, 처분량의 증가를 수반한다는 'Chemical Outlook' 보고서의 사례를 살펴 보기에 한국이 적합하다는 판단에 방한을 결정했다"고 밝혔다. 

한국의 급속한 경제발전 속에서 발생한 인권 피해 사례들이 어떤 상황인지를 살펴 보겠다는 의도였다는 설명이다.

그는 이번 사례 조사 결과를 토대로 정부, 기업 등에 수차례 질의서를 더 보낼 계획이다. 이 답변들을 종합한 보고서는 내년 9월 유엔 인권위원회에 공식적으로 제출될 예정이다. 한국 정부에 대한 권고안도 이 때 발표될 계획이다.

sman321@eco-tv.co.kr

저작권자 © 그린포스트코리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