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70주년, 한·일 원폭 피폭자는 말한다

[환경TV뉴스] 오션드림호=신준섭 기자/ 지금으로부터 70년전인 1945년 8월6일과 9일,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인류 최초의 핵폭탄이 떨어진다. 수십만의 사상자를 낸 이 폭탄은 살아 남은 사람들에게도 평생 잊을 수 없는 상처를 줬다. 방사능 피폭이다.

아직까지도 잊혀지지 않는 피폭의 상처지만, 사실 일본인 피폭자들과 한국인 피폭자들의 명암은 달랐다. 일본에서는 원폭 피해가 지금도 중요한 문제지만, 한국은 그렇지 않아서다. 같은 점이 있다면 원자폭탄과 원자력 발전 모두 '핵'을 사용하는, 무서운 도구라는 데에 공감한다는 점이다. 한일 양국 피해자들의 증언을 통해 70년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 봤다.

히로시마 피폭자 이곡지 할머니

 


한국인의 눈, 6살 이곡지 할머니는…
아들에게 물려줘 버린 '방사능'의 상처

"말 좀 해봐요."

지난 5일, 환경재단과 일본 '피스보트'가 공동 주최한 '피스&그린 보트' 행사가 열린 오션드림호 선상에서 1945년 당시 상황을 생각하며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는 히로시마 피폭자인 이곡지 할머니(76)에게 남편인 김봉대씨(79)가 건넨 말이다.

어렵게 말을 이은 이 할머니는 "언니와 '오까상(어머니)'과 함께 피폭됐는데 언니는 돌아오지 못했습니다"라며 "피폭 후 피난을 갔다 왔더니 (일본인들이) 한국으로 가라고 해서 돌아 왔습니다"라고 전한다. 이 할머니는 이 말과 함께 눈물이 앞을 가려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히로시마에서 세상을 떠난 아버지와 언니 얘기를 꺼낼 상황도 아니었다.

히로시마 피폭자 이곡지 할머니

 

이후의 상황은 김씨가 설명했다. 하지만 그의 증언은 이 할머니와 함께 고생했던 얘기들이 아니었다. 결혼 이후 어렵게 얻은 1란성 쌍둥이, 자식들에 대한 이야기다.

김봉대씨는 "16주만에 동생은 폐렴으로 죽었고, 남은 형은 하루가 멀다하고 병원 생활을 하면서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졸업했습니다"라고 운을 뗐다. 2005년 36세로 운명을 달리 한 아들, 고 김형률씨 얘기다.

김형률씨는 어릴 때부터 몸이 약했다. 아파서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야학'을 다니며 검정고시에 합격한 뒤 4년제 대학교도 합격했지만 학교를 못갔다. 몸이 안 좋아서다.

2년제 전문대 전산학과를 간 것도 건강이 문제였다. 졸업 후 취업도 했지만 이조차 얼마 못갔다. 6개월만에 회사를 그만 둔 김형률씨는 집에서 가까운 부산 침례병원에 한 달에도 몇 번씩 입원했다고 한다.

이 때서야 김형률씨와 그의 부모는 김형률씨가 왜 그 동안 이렇게 아팠는 지를 알게 됐다. 병원 차트에서 부모로부터의 유전 때문이라는 결과를 보고 말았던 것이다. 방사능 피폭자였던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상처다. 침례병원 의사들은 김형률씨를 진료한 결과를 토대로 논문까지 발표했다고 한다.

김봉대씨는 "형률이가 그날부터 마음을 굳게 먹고 언론사에 공개하기로 결정했습니다"라며 "자기 병의 뿌리를 찾겠다는 결정입니다"라고 설명했다. 김형률씨가 한국원폭2세환우회 초대회장이 된 계기가 된 시점이다.

자신의 몸이 아픈 데도 김형률씨는 약 1300여명에 달하는 자신과 똑같은 처지인 원폭 피해자 2세 '환우'들의 인권을 위해 나섰다. 다행히도 모든 원폭 피해자들에게서 그 영향이 나타나지는 않았지만, 자신처럼 고통을 대물림한 이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충격을 받은 사건은 그가 사망했던 2005년 5월에 있었던 일이다. 김봉대씨는 "2005년 5월에 형률이가 일본에서 열린 세미나에 참석했는데, 당시만 해도 폐기능은 이미 75%가 망가져 있었습니다"라며 "이 때 일본 원폭 피해자들이 '김군 그러면 안 돼. 왜 일본까지 돈 달라고 오고 그러나'라는 말을 했고 여기에 충격을 받아 같은달 29일 운명을 달리했습니다"라고 전했다.

일본인 피폭자 증언 행사에 참석해 질문하고 있는 김봉대씨

 

그의 죽음 이후 상황은 바뀌었을까. 그렇지 않다. 아들의 유지를 이어 받아 원폭 2세 환우들을 위해, 반핵운동에 김봉대씨가 앞장섰지만 한국 정부나 일본 정부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김봉대씨의 노력을 알아 준 건 시민사회뿐이었다. 그는 올해 1987년 6월 민주항쟁의 도화선 역할을 했던 박종철 열사를 기리기 위해 제정한 '박종철 인권상'을 수상했다.

김봉대씨는 "원폭 1세대가 한국에만 2600명 정도인데, 언젠가는 유전된다는 것을 2004년 한국의사협회가 5개월만에 입증했습니다"라며 "하지만 일본 정부는 아직까지도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라고 지적했다.

사실 일본은 한국보다 더 복잡한 상황이다. 원폭과 마찬가지로 방사능 피해를 야기하는 원전 폭발 사고가 2011년 3월 동일본 대지진으로 후쿠시마현에서 발생했기 때문이다. 이재민만도 10만명 가량이다. 누가 피폭됐을 지, 공개된 정보는 없다. 일본인들이 불안에 떠는 이유다.

"세계적으로 평화를 원한다면 핵은 완전히 없애야 합니다. 그래야 평화가 오고 국민들이 다 사랑을 받습니다. 핵 없는 사회가 필요합니다." 김봉대씨가 한일 정부뿐만 아니라 세계를 향해 부르짖은 울림이다.


일본인의 눈, 13살 사사모리 시게코 할머니는…
상처를 숨기지 않은 당당함, 세계에 외친 "핵 반대"

히로시마 피폭자 사사모리 시게코 할머니

 

올해로 83세인 사사모리 시게코 할머니는 일본서 미국으로 건너가 성형을 통해 지금의 얼굴을 되찾았다. 13세 때 히로시마에서 원폭 피해를 입은 뒤 10년이란 시간이 지났을 때의 일이다.

사사모리 할머니는 8일 '피스&그린보트' 선상에서 당시의 처참한 상황을 한·일 양국 국민들에게 전했다.

"1945년 8월6일, 저는 처음으로 학도병 동원을 받아 친구들과 함께 건물 속을 정리하고 거리에 나와 있었습니다"라며 "그 때 비행기가 지나 다녔는데, 저는 친구들과 아름다운 비행기를 가리키며 '저거 봐봐, 너무 예뻐'라고 했습니다"라며 말문을 열었다.

그렇게 올려다 본 파란 하늘에서는 하얀색 물체가 떨어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 순간, 강력한 폭풍우와 함께 사사모리 할머니는 뒤로 넘어졌고 기억을 잠시 잃었다. 원폭 '리틀 보이'가 최초의 살상을 시작했던 순간이다.

정신을 차린 사사모리 할머니가 본 것은 '지옥도'였다. 그는 "그날은 아름다운 날씨였는데, 눈을 떠 보니 쥐색같은 회색이었고 아마도 그게 폭탄의 잿더미였던 거 아닌가 생각됩니다"라며 "눈앞이 밝아지며 주변을 보자 친구들은 아무도 없고 어른들이 천천히 일어나며 마치 괴물처럼 휘청휘청댔습니다"라고 말했다.

감각은 없었지만 눈에 들어 온 자신의 몸도 정상은 아니었다. 사사모리 할머니는 "제 몸도 빨갛게 보였는데, 나중에 생각해 보니 몸 전체가 상처를 입어 피가 나고 화상을 입어 그랬던 것 같습니다"라며 "히로시마에 7개 강이 있었는데, 그 중 하나의 주변으로 걸어 갔더니 강 안에는 누구도 정상적인 사람이 없었습니다"라고 설명했다.

이후 그는 "폭탄이 또 떨어질 지 모르니 다리를 건너라"라는 얘기를 어디선가 듣고 어른들을 따라 걸어갔다고 한다. 한 초등학교에 도착해서 멈춘 사사모리 할머니는 부모가 그를 발견할 때까지의 기억은 나지 않는다고 증언했다.

"다 타버린 머리카락을 아버지가 잘라 줬는데, 슈크림빵 같이 샛노란 고름이 뭉쳐 있었다고 합니다. 고름을 짜 내고 기름을 발라가며 매일 부모님이 치료해 줬습니다." 1945년 당시의 일이다.

치료를 받던 그는 10년간 아무 것도 할 수 없이 병실 신세를 져야 했다. 사사모리 할머니의 손은 아직까지도 정상이 아니다. 오른손 검지와 중지, 왼손은 엄지를 제외한 모든 손가락이 원폭 피해로 장애를 겪고 있다. 간호사가 꿈이었던 그녀는 손 때문에 일본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장애를 겪고 있는 사사모리 시게코 할머니의 손

 

그러다가 그는 일본 원폭 피해자들을 성형해 주는 미국의 프로그램에 따라가게 됐다. 새로운 길이 열린 것이다. 당시 25명의 소녀 중 한 명으로 미국에 건너간 그는 간호사의 꿈도 이루고 결혼도 해서 1명의 아들과 2명의 손자들을 얻었다. 다행히도 이들에게 방사능 피폭의 영향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렇더라도 피폭 피해를 벗어나지는 못했다. 사사모리 할머니는 방사능 피해자에게 가장 무서운 일이 뭐냐고 기자가 묻자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암'이라고 답했다. 그도 대장암과 위암 수술을 2번하며 고생을 겪었다. 지금도 갑상샘암을 앓고 있다고 한다.

그런 그에게 요즘 가장 걱정되는 부분은 후쿠시마 원전 폭발 사태 이후의 원전 문제다. 사사모리 할머니는 "원전과 원자폭탄은 계속 늘어나고만 있고 아예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이대로 유지된다면 엄청난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라며 "기계이기 때문에 아무리 정교하게 만들었다고 해도 후쿠시마와 같은 자연 재해로 인해 문제가 생길 수가 있습니다"라고 강조했다.

원폭과 원전, 그로 인한 방사능 피폭을 직접 경험해보지 못한 젊은 세대들에게도 한 마디 조언을 남겼다.

사사모리 할머니는 "방사능은 몇만년이 지나도 남습니다. 부산의 고리원전을 보고 원전이 안전하다고 말하고 있는 원전 박물관을 갔다왔는데, 이건 정말 잘못된 것입니다"라며 "애들은 순수하기 때문에 뭐든지 믿습니다. 무섭다고 가르쳐줘야 합니다. 이 상태라면 향후 70년을 기약할 수 없습니다"라고 호소했다.

이곡지 할머니와 사사모리 시게코 할머니, 두 히로시마 피폭자가 서로를 껴안으며 위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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