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물 사정으로 32년 동안 운영한 매장을 정리합니다”

때로는 긴 글 보다 한 장의 사진이 더 많은 메시지를 담습니다. 과거 잡지기자로 일하던 시절에 그런 경험을 많이 했습니다. 포토그래퍼나 디자이너에게 어떤 느낌의 작업물을 원하는지 전달하려면 빽빽한 글을 채운 작업지시서보다 딱 한 장의 ‘시안’이나 ‘레퍼런스’가 훨씬 더 효과적이었습니다.

살면서 마주치는 여러 가지 환경 관련 이슈, 그리고 경제 관련 이슈가 있습니다. 먼 곳에 있는 뉴스 말고 우리가 아침저녁으로 마주하는 공간에서 눈으로 직접 볼 수 있는 것들 말입니다. 그런 풍경들을 사진으로 전하겠습니다.

성능 좋은 DSLR이 아닙니다. 그저 주머니에서 꺼내 바로 찍을 수 있는 폰카입니다. 간단하게 촬영한 사진이지만 그 이미지 이면에 담긴 환경적인 내용들, 또는 경제적인 내용을 자세히 전달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사진으로 읽는 환경 또는 경제 뉴스입니다. 마흔 한번째 사진은 건물 사정으로 매장을 정리하게 된 32년차 사장님의 사연입니다. [편집자 주]

 

재건축을 앞둔 건물에 붙어있는 영업종료 안내문. 멋지게 들어서는 새 건물 뒤에 숨은 사연에도 사회가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면 얼마나 좋을까. (이한 기자 2020.6.27)/그린포스트코리아
재건축을 앞둔 건물에 붙어있는 영업종료 안내문. 멋지게 들어서는 새 건물 뒤에 숨은 사연에도 사회가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면 얼마나 좋을까. (이한 기자 2020.6.27)/그린포스트코리아

[그린포스트코리아 이한 기자] 기자는 1988년부터 이 동네에 살았다. 초등학교 4학년때 전학와서 중·고등학교를 모두 이곳에서 나왔다. 집에서 고등학교까지 걸어가는 길에 '홍OO 양복점'이라는 가게가 있었다. 당시 고등학생이라면 누구나 한권쯤은 가지고 있었을 유명한 수학 참고서 저자와 이름이 같아 기억에 남는 집이었다.

고등학교 3년 내내, 대학 때도, 군대에 갔다 제대했을 때도, 사회인이 되어 어느덧 20년차를 훌쩍 넘기던 시절까지도 양복점은 그 자리에 있었다. 백화점에서 이미 만들어진 옷을 사는게 아니라 옷감을 고르고 사이즈를 재서 몸에 맞는 옷을 만든다는 게 신기했었다. 그런데, 그 양복점이 작년에 문을 닫았다. 지하철 9호선이 개통하면서, 그 길 위의 구축건물들이 빠르게 사라지고 있어서다.

옛것은 새것에게 길을 내준다. 세상의 이치다. 하지만 그게 꼭 좋은 것만은 아니다. 사람의 발길이 늘어나고 더 좋은 건물, 더 깨끗한 가게가 들어서면서 결과적으로 그 길을 오랜 세월 지탱해온 사람들이 다른 곳으로 떠나야 하는 경우가 생길때는 특히 그런 기분이 든다. ‘건물 사정으로 32년 동안 운영한 매장을 정리하게 되었다’는 문구가 눈에 밟히는 건 그래서다.

지역에 자본이 투입되면 환경이 개선되고 부동산 가격 등 자산 가치도 상승한다. 하지만 주거비용이 높아져 원래 주민(또는 상인)이 이를 감당하지 못하고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 이를 젠트리피케이션이라고 부른다. 32년 동안 자리를 지킨 홍OO 양복점이 꼭 그 사례에 해당하는지, 다른 사연이 있는지까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멋지게 들어설 새 건물 뒤에 숨은 사연에도 이 사회가 관심을 가지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leehan@greenpost.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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