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 없는 회의 해보니...A4용지에 허덕이던 지난날의 기억

[그린포스트코리아 이한 기자] 오늘은 그린포스트 기자들이 편집국에 모여 회의를 하는 날이다. 회의는 일주일에 한 번, 매주 목요일 오전이다. 이번 주에 무슨 일이 있었고 다음 주에 뭘 취재할지 서로 공유하고 우리가 앞으로 어떤 내용을 기사화할지 논의하는 시간이다.

그린포스트에 입사하고 첫 회의를 할 때, 기자들이 다음 주 기획안을 모두 A4용지에 프린트해서 사람 숫자대로 나눠 가진 다음 의견을 나눴다. 7명이 회의를 한다면 7장의 기획안을 모두 한 명씩 공유해 총 49장의 기획안을 가지고 회의를 하는 방식이었다. 회의가 끝나면 누군가는 기획안을 잘 모아놓기도 했지만 대부분 그냥 쓰레기통으로 직행했다. 2시간여 회의를 위해 수십장의 종이를 한 번 쓰고 버리는 셈이었다.

아이러니했다. 자원순환과 쓰레기 정책, 일회용품 사용 줄이는 내용을 말하면서 종이를 이렇게 버린다고? 버려지는 것들의 환경 영향과 그로 인한 기후위기를 논하면서 정작 회의가 끝나면 쓰레기가 한 뭉치 쌓였다. 양면인쇄 덕에 그나마 A4용지 숫자가 줄었지만, 그래도 불필요하고 이상하게 느껴졌다.

그린포스트 편집국은 평소 SNS 단체방에 기획안을 공유한다. 기자는 노트북을 쓰면서 SNS PC버전도 사용하므로 기획안을 다운 받으면 컴퓨터 화면에서 바로 확인할 수 있다. 그래서 입사 후 두 달이 지난 이후 시점부터, 기획안을 출력하지 않고 그냥 노트북째로 회의실에 들고 갔다. 메모할 내용은 원본 파일에 적어놓고 다른 이름으로 저장했다. 날짜별로 폴더를 만들어두니 예전 기획안을 찾아보기도 쉬웠다. 무엇보다 종이를 버리지 않아서 좋다. 그래서 오늘도 기자는 기획안을 출력하지 않고 회의에 참여한다. 종이 없는 회의 6개월차다.

업무 과정에서 종이를 줄이는 건 사실 기자의 오랜 숙제였다. 10여년 전부터 그런 고민이 많았다. 기자는 과거 매거진 에디터로 일했는데, 인터뷰를 진행하거나 화보를 촬영하려면 A4용지 수백여 장을 불과 며칠 사이에 다 쓰곤 했다.

‘시안’ 때문이었다. 시안은 인터뷰 사진을 어떤 앵글이나 자세로 찍을지, 헤어와 메이크업은 어떤 스타일로 할지, 무슨 의상을 입을지 미리 상의하기 위한 자료다. 주로 외국 매거진이나 광고 등을 뒤져 마음에 드는 사진을 찾으면 그 사진을 컬러로 복사하거나 프린트했다. 그 시안을 바탕으로 에디터의 의견과 아이디어를 더해 편집장에게 화보 컨셉트와 내용을 ‘컨펌’ 받았다.

편집장이 ‘OK’하면 그 시안을 가지고 포토그래퍼와 스타일리스트, 헤어·메이크업 담당자와 의논했다. 화보 배경이 어떤지, 옷 스타일은 어떤 느낌인지, 머리를 어떻게 할 것인지 일일이 결정해야 한다. 그런데 다들 말로 설명하는 것 보다 딱 맞아떨어지는 시안 한 장을 더 많이 원했다. 그 시안 중 상당수를 종이로 인쇄해 서로 공유됐다.

준비 과정 한편에는 시안을 취재원에게 보냈다. 촬영 콘셉트를 설명하기 위해서다. 거기서 또 종이를 썼다. 만일 시안이 편집장 마음에 들지 않거나, 촬영 관련 스태프와 의견 조율이 잘 되지 않거나, 화보 대상자가 촬영 컨셉트를 바꾸고 싶어하면 다시 시안을 찾아야 했다. 촬영 당일에는 스튜디오 한쪽 벽에 포즈와 분위기 등을 쉽게 설명하기 위해 시안 수십장을 붙여놨다. 사무실 복합기 옆에 놓인 250장들이 A4용지 묶음은 며칠이면 눈 녹듯 사라졌다.

매일같이 버려지는 종이를 보면서 문득문득 ‘아깝다’는 생각이 들 무렵, 다른 에디터들 사이에서도 ‘종이를 이렇게 많이 써도 되는거냐’라는 목소리가 슬슬 나오기 시작했다. 멋진 사진은 종이책뿐만 아니라 인터넷에도 많은데 그걸 누군가와 공유하기 위해 꼭 프린트를 해야 하느냐는 지적이 제기됐다. 잡지 사진도 스캔하거나 디카로 촬영해 파일로 공유하명 되지 않느냐는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괜찮은 의견이었다. 스마트폰이 없거나 보급 초기 시절이지만 그때도 이메일은 있었으니까. 그런데도 에디터들은 A4용지 뭉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시안으로 딱 보여줘야 바로 느낌이 오잖아”라고 주장하는 ‘윗분’들의 입심이 더 강했다.

시간이 한참 흐르고 나서야 ‘페이퍼리스’를 시도할 기회가 생겼다. 아이패드 덕분이었다. A4용지 수십 장 들고 다니는 대신 아이패드 전원을 켜고 옆으로 휘리릭 넘기면서 시안을 보여줬다. 전통적인 방식의 시안을 선호하는 사람들이 그때도 많았지만, 아이패드가 요즘 말로 ‘힙’해지면서 자연스럽게 종이 사용이 줄기 시작했다.

‘페이퍼리스’는 그 시절 기자만의 고민이 아니다. 지금도 여러 곳에서 종이를 줄이려는 노력이 이어지고 있다. KT는 지난 9월 전국 시장군수구청장 협의회와 비대면 공공서비스 혁신을 위한 업무협약을 체결하고 민원 서비스와 각종 세금에 대한 전자고지 등 지방자치단체 공공서비스 분야에 종이를 절감하는 ‘페이퍼리스 기술’ 도입에 앞장서기로 했다

한화생명은 최근 페이퍼리스 회의문화 정착과 스마트 플래너 전자청약시스템을 통해 종이 서류사용 절감한 사례 등을 인정 받아 한국기업지배구조원에서 발표한 ESG 등급에서 환경 부문 A등급을 받았다.

카카오페이는 지난 7월 미디어세미나를 열고 각종 청구서·고지서 등을 카카오톡으로 받을 수 있는 전자문서 서비스를 더욱 확대해 종이 없는 '페이퍼리스' 시대를 구현하겠다는 목표를 발표했다. 한샘은 올해 지속가능경영보고서를 인쇄물 대신 페이퍼리스 파일로 제작해 한샘닷컴 홈페이지에 제작했다.

종이 사용을 줄이는 일은 대개 비용이나 편리 측면으로 이해된다. 하지만 종이 사용을 줄이면 환경에도 좋은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종이는 대개 나무에서 오기 때문이다. 물론 IT 기술이 종이보다 무조건 환경적이라고 단정지을 순 없다. 노트북이나 컴퓨터, 또는 모바일 기기를 위한 부품이나 소모품의 탄소발자국도 만만찮고, 고장난 기기들이 환경에 미치는 영향이 더 클 수도 있다. 이메일을 보낼 때도 탄소가 배출되고 데이터센터가 사용하는 전기도 지구 환경에는 영향을 미친다. 어쩌면 종이 한 장을 아껴 쓰고 재활용 하는게 더 나은 일일 수도 있겠다.

다만, 줄일 수 있는 게 있다면 줄이는 게 좋다. 지금 가지고 있는 정보통신기기로 충분히 볼 수 있는 자료라면 종이에 굳이 인쇄하지 않아도 괜찮다(라고 나는 생각한다).

다시 그린포스트 회의 얘기로 돌아가자. 요즘은 다른 기자들도 모두 기획안 출력 없이 노트북만 가지고 회의를 한다. 목요일 회의를 주관하는 사람은 대부분 글쓴이다. ‘꼰대’ 소리 들을까봐 “환경 아이템 얘기하면서 이 많은 종이는 다 뭡니까”라고 대놓고 얘기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언젠가부터 다들 기획안 대신 노트북을 들고 회의실로 들어온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A4용지는 회의에서 ‘제로’가 됐다.

그게 편해서 그럴까, 아니면 그들도 제로웨이스트나 로우웨이스트에 조금씩 힘을 보태려고 하는걸까. 직접 물어보지는 못했다. 어쨌든, 줄일 수 있는 게 있으면 그건 줄이자. 기자가 연재하는 컬럼 제목 중 하나가 ‘줄여야 산다’이다. 안 줄이면 못 산다는 얘기는 아니지만, 그래도 조금이나마 줄이는 게 좋다는 의미다. 당신도 혹시 불필요한 무언가를 습관처럼 쓰고 있지는 않은가?

leehan@greenpost.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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