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방
오프라벨 처방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미국, 유럽 등에서도 활발하다. 대표적으로 황반변성 치료제로 쓰이는 대장암 치료제인 아바스틴(성분명: 베바시주맙)이 있다. 아바스틴은 신생혈관 억제 항암제지만, 황반변성 치료에 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지면서 오프라벨 처방이 이뤄져 왔다. (픽사베이 제공)/그린포스트코리아

[그린포스트코리아 이민선 기자]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치료제는 아직 개발되지도 않았는데, 왜 염증 치료제나 말라리아 치료제가 사용되고 있을까?

이는 오프라벨(off-label) 처방의 일종이다. 우리나라 말로는 허가 외 처방. 즉, 의약품을 허가한 용도 이외의 적응증에 약을 처방하는 행위다. 당연히 약은 허가받은 대로만 사용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약이 아직 개발되지 않았거나 생명이 위독한 경우 등에서 주치의의 판단하에 쓰이는 것이다. 

오프라벨 처방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미국, 유럽 등에서도 활발하다. 대표적으로 황반변성 치료제로 쓰이는 대장암 치료제인 아바스틴(성분명: 베바시주맙)이 있다. 아바스틴은 신생혈관 억제 항암제지만, 황반변성 치료에 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지면서 오프라벨 처방이 이뤄져 왔다.

오프라벨 처방이 잦다면 '왜 이 회사는 약을 이 용도로 허가받지 않았지?'라고 생각될 수도 있겠지만, 의약품 사용 허가를 받는 과정은 생각보다 막대한 비용과 시간이 들어간다. 특히, 여러 가지 제약이나 변수가 있어서, 제약사가 그로 인해 얻을 수 있는 이익이 크지 않다면 굳이 새로운 내용에 대하여 허가신청을 하지 않는 것이다.

◇ 사람인데 개 구충제를 복용한다니?

 
오프라벨 사용이 법에 어긋나지는 않지만, 적응증 외 사용 시 부작용 발생 빈도가 더 잦았다. (픽사베이 제공)/그린포스트코리아
유럽 등지에서는 제도권 내에서 의료진들이 허가되지 않는 기생충 약을 한계적 상황의 말기 암 환자에게 합법적으로 투여하기도 한다. (픽사베이 제공)/그린포스트코리아

폐암 말기의 한 개그맨이 개 구충제로 쓰이는 펜벤다졸을 복용했다는 이야기를 한 번쯤은 들어봤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이 약이 사람에게 처방되지 않기 때문에 오프라벨 처방으로 보기에는 어려운 점이 있지만, 유럽 등지에서는 제도권 내에서 의료진들이 허가되지 않는 기생충 약을 한계적 상황의 말기 암 환자에게 합법적으로 투여하기도 한다. 

다른 대안이 없는 상황에서 치료 가능성이 있는 약을 써보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펜벤다졸과 같은 계열의 사람 약을 주치의 판단 아래 오프라벨 처방을 받아 복용하기도 한다. 펜벤다졸은 벤지미다졸 계열 구충제로 비교적 부작용은 적지만, 이로 인한 결과는 오로지 의료인과 환자의 몫이다. 항암제나 방사선 치료 등 다른 암 치료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 아이에게 비아그라를 처방하는 이유

Viagra® 비아그라®정 (한국화이자제약 제공)/그린포스트코리아
Viagra® 비아그라®정 (한국화이자제약 제공)/그린포스트코리아

상대적으로 약이 많지 않은 소아나 희귀질환에도 오프라벨 처방이 종종 이뤄진다. 소아·희귀질환은 상대적으로 수요가 많지 않은 만큼 약이 적기 때문이다. 또 같은 질환이어도 성인에게만 적응증이 있는 경우 소아질환에서의 사용은 오프라벨 처방이 된다.

혈관 확장제로 성인 남성에 쓰이는 발기부전 치료제인 비아그라(성분명: 실데나필)는 소아 폐동맥 고혈압에 쓰인다. 미국에서는 성인 폐동맥 고혈압에 쓰이는 실데나필이 산소 운반 능력과 운동 능력을 개선하는데 도움을 줘 소아 폐동맥 고혈압 치료에도 효과적인 것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또 망막질환과 고산병 치료제, 여성 불임증에 사용되기도 한다. 

◇ 오프라벨 약, 부작용은 없을까?

 
생활 속에서도 ‘오남용’ 사례는 비교적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픽사베이 제공)/그린포스트코리아
오프라벨 사용이 법에 어긋나지는 않지만, 적응증 외 사용 시 부작용 발생 빈도가 더 잦았다. 여성의 경우 발생 빈도가 더 높았고, 여러 가지 약을 사용할 때 더 높았다. (픽사베이 제공)/그린포스트코리아

오프라벨 사용이 법에 어긋나지는 않지만, 적응증 외 사용 시 부작용 발생 빈도가 더 잦았다. 여성의 경우 발생 빈도가 더 높았고, 여러 가지 약을 사용할 때 더 높았다. 특히, 한 연구에서는 어린이에게 사용되는 오프라벨 약으로 인한 부작용 발생 비율이 19%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어린이는 성인과 달리 임상시험을 통과한 약이 많지 않기 때문에, 의사가 성인용 약을 부작용 위험을 감수하면서 처방하고 있다. 국내 통계에 따르면 소아에게 쓰는 약 중 60% 이상이 오프라벨 약이다. 서울대병원 마취통증의학과 김희수 교수팀은 2017년 두 개 병원에서 오프라벨 약을 처방받은 2779명의 어린이 환자(총 처방 수 5130건)에 대한 약의 종류·부작용 등을 분석한 논문에서는 오프라벨 약을 처방받은 어린이 2779명 중 523명(18.8%)에서 부작용이 나타났다. 이 부작용은 혈구감소증, 간 기능 이상, 발열, 저혈압, 구토, 두통 등이었다. 

김희수 교수팀은 “어린이는 아직도 검증되지 않은 약을 처방받는 경우가 많다”며 “오래된 약은 재검증해야 하고 소아용 약에 대한 안전성·유효성 확인을 위한 연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 오프라벨 처방, 어떻게 이뤄지나

 
랩
지난해 정부가 환자 편의를 위해 IRB가 설치된 곳이 아니어도 허가 외 용도로 의약품을 처방할 수 있도록 관련법을 개정함에 따라 집 근처 병원에서도 처방 받을 수 있게 됐다. (픽사베이 제공)/그린포스트코리아

우리나라에서는 오프라벨 처방을 엄격하게 규제하는 편이다. 오프라벨 처방을 위해서 기존에는 정부가 지정한 임상시험 실시기관이나 병원 내 의학연구심의위원회(IRB)의 심사를 통과해야만 했다. 즉, IRB가 설치되지 않은 소규모 병∙의원에서는 사용이 어려웠다. 

하지만 지난해 정부가 환자 편의를 위해 IRB가 설치된 곳이 아니어도 허가 외 용도로 의약품을 처방할 수 있도록 관련법을 개정함에 따라 집 근처 병원에서도 처방 받을 수 있게 됐다. 다만 오프라벨 사용기관은 환자에게 오프라벨을 사용하고 있다는 내용을 반드시 설명, 동의서를 받아야 한다. 필수 설명 항목은 투약 계획 및 소요 비용, 예상되는 부작용의 종류 및 부작용 발생 시 대응 계획, 대체 가능한 치료법 유무다. 

이러한 오프라벨 신청은 대한병원협회, 대한의사협회, 대한치과의사협회, 전문과목별 관련 학회가 신청할 수 있다. 다만, 승인 여부를 결정하기 위해 운영되는 진료심사평가위원회가 사용의 적절성 등을 확인하기 위해 관련 단체에 심의를 위탁할 경우 신청 자격이 제한된다.

minseonlee@greenpost.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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