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 전 오늘, 대한민국에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민족의 아픈 상처입니다. 그 상처는 완벽하게 아물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는 무력 충돌이 이어지고, 최근 남북관계에서도 군사적 긴장이 고조됐습니다. 중국과 인도의 국경에서도 군인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비극을 반복하면 안 됩니다. 전 세계 지도자들은 두 번의 큰 전쟁을 겪고 나서야 국제연합(UN)을 만들어 전쟁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여러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전쟁은 산업과 인프라를 파괴하는 것을 넘어 인류의 생존 자체를 위협하기 때문입니다.

과거 전쟁은 인류의 환경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요. 인간과 인간, 국가와 국가의 물리적인 대립으로 지구는 어떤 변화를 겪었을까요. 군사적인 충돌이 지구에 미칠 수 있는 영향을 두 가지 시선으로 짚어봅니다. [편집자 주]

 
1950년, 전쟁이 시작되면서 우리나라는 군인·민간인 사상자가 급증했지만, 치료를 위한 의료시설, 의약품, 의료인력은 턱없이 부족했다. 하지만 점차 의약품과 의료기술이 보급되면서 국군의 의료체계도 빠르게 발전했다. (픽사베이 제공)/그린포스트코리아
1950년 6월 25일, 동족상잔의 비극이 일어났다. 지극히 파괴적이었던 이 전쟁은 휴전회담이 개시된 1951년 이후에도 한 치의 땅이라도 더 확보하려는 소모전에 의해 수많은 전사자를 남겼다. (픽사베이 제공)/그린포스트코리아

[그린포스트코리아 이민선 기자] 1950년 6월 25일, 동족상잔의 비극이 일어났다. 지극히 파괴적이었던 이 전쟁은 휴전회담이 개시된 1951년 이후에도 한 치의 땅이라도 더 확보하려는 소모전에 의해 수많은 전사자를 남겼다.

우리나라는 그 영향으로 많은 인재를 잃었고, 세계에서 유일한 분단국가로 남았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한국 의학이 비약적인 발전을 하게 된 계기가 됐다. 

역사적으로 의학은 전쟁의 소용돌이를 헤쳐 나오며 크게 발전했다. 죽음과 삶이 치열하게 교차하는 전쟁터 한 가운데서 한 사람이라도 더 살리려는 의료인들의 노력은 끊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쟁의 어두운 그림자 속에서도 후일 많은 사람을 살리게 되는 새로운 의학의 불씨가 피어났다.

 

‘한탄 바이러스’의 발견부터 백신까지 

이호왕
‘한탄 바이러스’를 발견하고 백신 ‘한타박스’를 개발한 이호왕 박사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제공)/그린포스트코리아 

“두통, 오한, 고열, 요통, 구토와 복통이 있고 얼굴과 가슴에 출혈 반점도 있었으며 쇼크에 빠지는가 하면 1주일 후에는 소변이 잘 나오질 않고 혈뇨와 혈변도 있었다. 특이한 것은 모든 환자가 심한 단백뇨를 나타내는 것이었다.”

한국전쟁의 포연이 자욱하던 1951년, 중부 전선의 심장인 철의 삼각지대에서 적과 대치 중이던 미군들에게 이상한 질병이 돌기 시작했다.

경험 많은 미국 군의관들도 이 병의 정체를 알 수 없었다. 미국과 국군, 심지어 같은 증상을 보였던 중공군까지도 서로 상대가 세균전을 벌였다고 의심했다. 전쟁이 끝나고 휴전협정이 체결된 뒤에도 이 괴질은 휴전선 근방에서 계속 기승을 부렸다.

한국전쟁 이후 1967년까지 미국 연구진이 막대한 돈을 들여 연구에 몰두했지만, 숙주가 들쥐일 것 같다는 추정 외에는 밝혀낸 것이 없었다. 

이후 일본 뇌염을 연구한 이호왕 박사가 조교, 동물실험실 연구원, 야외 채집원, 조직배양 기술자, 동물사육인 등 7명의 연구팀을 꾸렸다. 연구팀은 들쥐를 셀 수도 없이 잡아들이고 그 내장을 일일이 들여다보았지만 유행성 출혈열 바이러스는 좀체 발견할 수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1975년 미국 육군 의학연구개발사령부는 연구비를 더는 지급할 수 없다고 통보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이호왕 박사 연구진은 마침내 유행성 출혈열의 원인을 잡아냈다. 들쥐의 폐 샘플에서 바이러스를 발견한 것이다. 

이후 이호왕 박사는 등줄쥐의 오줌에서 바이러스를 분리해내고, 이호왕 박사는 자신의 이름 대신 ‘한탄 바이러스’라는 이름을 붙인다. 병원체를 발견한 것도 한탄강 주변이었고, 한탄강은 남과 북이 갈라진 강으로 우리 민족의 한을 드러내는 상징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10여 년간 이호왕 박사는 백신을 만들기 위해 몰두했고, 1991년 녹십자와의 공동연구로 한타박스라는 유행성 출혈열 예방 백신 ‘한타박스’를 내놓는다. 지금까지도 휴전선 일대에 근무하는 군인과 주민은 이 주사를 맞고 있다.

 

씻을 수 없는 상처 남긴 전쟁...그 속에서 피어난 의학

 
의료진
지금도 수많은 의료진들이 총성 없는 전쟁터인 의료 현장에서 생명을 살리기 위해 치열하게 싸우고 있다. (픽사베이 제공)/그린포스트코리아

1950년, 전쟁이 시작되면서 우리나라는 군인·민간인 사상자가 급증했지만, 치료를 위한 의료시설, 의약품, 의료인력은 턱없이 부족했다. 하지만 점차 의약품과 의료기술이 보급되면서 국군의 의료체계도 빠르게 발전했다.

군에 입대한 젊고 우수한 의학도들이 미군병원의 우수한 최신의술을 접하게 된 것이다. 당시 유엔군, 특히 미군은 제2차 세계대전 중 발전한 군 의료체계를 6·25전쟁에도 적용했고, 국군은 미군의 최신식 의료기술을 전수하게 됐다.

휴전선에서 주로 전투가 이루어진 2년 동안에는 미군 의료진이 국군 의료진의 교육을 담당했다. 민간인들도 군 병원에서 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 6·25전쟁 중 미군은 5명당 1명, 국군은 3.14명당 1명이 부상을 당했지만, 병원 내 사망률은 비슷할 정도로 의료 체계가 발달했다.

유엔군의 일원인 스칸디나비아 3국의 도움도 있었다. 전쟁이 시작되자 스웨덴은 부산에 군 야전병원을, 덴마크는 적십자 병원선을 부산항과 인천항에, 노르웨이는 이동외과 병원을 미1군단 예하부대에 파견하여 의무지원과 민간인 진료를 담당했다.

1953년 7월 휴전이 되자 덴마크와 노르웨이 의료지원단은 귀국했고, 스웨덴만 1957년까지 남아서 임무를 수행했다. 이들 3국이 진료한 전쟁부상자들은 민간인을 포함해 대략 210만명에 달했다.

이후 힘을 모아 1958년 최고의 시설과 장비, 의사로서 충원된 ‘메디컬 센터’(현 국립중앙의료원)를 서울에 건립하고 한국인 의사들을 가르쳤다. 대한민국을 일으켜 세우기 위해 국제 연합의 각종 기구, 국제원조기구가 협력했다.

전쟁은 모든 이들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지만, 많은 생명을 살릴 수 있는 의학을 발전시켰다. 참혹한 전쟁 현장에서 의술이 꽃 피울 수 있었던 또 하나의 이유는 의료인들이 실천한 ‘인술’이었다. 사람을 살리는 인술. 지금도 총성 없는 전쟁터인 의료 현장에서 생명을 살리기 위해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 수많은 의료진에게 박수를 보낸다.

minseonlee@greenpost.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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