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포스트코리아 이승리 기자] 어렴풋한 그때를 기억한다. A, B, C, D를 겨우 뗐던 초등학생까지 대충 ‘불황’이라는 것을 알았었을 때다. 낮은 베개를 배고 잠든 아이의 머리카락을 쓰다듬던 그의 들쑥날쑥하던 한숨은 좀처럼 잦아들지 않았고, 그 곁에서 불안한 눈동자로 가계부와 통장을 번갈아 보던 또다른 그 역시 뜬 눈으로 밤을 세웠다. 다음날 아이가 손에 쥔 ‘수학여행 가정통신문’은 ‘불참’에 동그라미가 쳐졌고, 그때 정확히 아이는 ‘IMF(국제통화기금)’라는 것이 ‘X표를 칠 만한 것’임을 알았다.

동남아시아 내에서 벌어진 연쇄적 외환 위기 앞에 도미노처럼 한국 경제가 무너졌다. 국민소득 1만달러 시대라는 화려한 이력 뒤에 찾아온 ‘금융위기’는 온 가족의 삶을 동그랗게 하나로 묶어 집에 가뒀다. 어른은 ‘실직’이라는 이름으로 집으로 돌아왔고, 더 이상 학원을 다닐 수 없던 아이는 별 수 없이 학교를 마치면 곧장 집으로 왔다. 그때는 바로 1997년의 11월, 겨울이었다.

그래도 우리가 누구였던가? 대부분 어제보다 나은 오늘을 살았던 시절과 인연을 맺었던 그때의 어른은 힘을 모았다. 아이의 양 손에 끼워져 있다 장롱 속 깊은 곳에 감춰져 있던 돌 반지가 모였다. ‘금 모으기 운동’으로 모인 금은 곧장 나라의 빚을 갚는데 쓰였다. 공기업 민영화, 기업 희망퇴직 등 뼈를 깎는 구조조정과 기타 자구책이 병행되면서 2001년 ‘조기 상환’이라는 쾌거를 거뒀다.

그 이후 근 10년 주기 위기는 반복됐고, 결국 미국발 글로벌 금융위기를 거쳐 중국발 ‘코로나19’ 위기를 겪고 있다. 그 사이 ‘IMF키즈’는 자라 어른이 되어, 연거푸 두 차례의 위기에 실무자로 현장을 누볐던 ‘IMF어른’과 함께 ‘코로나19’ 위기를 헤쳐나가고 있다. IMF와 글로벌 금융위기를 각각 미성년자와 어른으로 겪었던 이들이 ‘코로나19 시절’을 함께 어른으로 보내고 있는 것이다.

그야말로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세상이 도래했다. 허겁지겁 만원지하철에 가방을 욱여넣던 익숙한 풍경이 낯설어지기까지 그리 많은 시간이 소요되지 않았다. 사람과 사람 사이를 오고가며 침투하는 ‘바이러스’는 지역경제를 넘어 전 산업을 휘청거리게 했고, 국민의 삶은 휘청거릴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위기 속 일상으로의 회귀를 위한 중심을 잡아준 것은 ‘금융권’이었다. 금융 지원을 바탕으로 성금 기탁, 임대료 감면, 착한 소비 등 비금융 지원에도 참여하며 ‘시대 공감’에 적극 나섰다.

특히, 이러한 발빠른 대처를 이끈 것은 이미 두 번의 위기를 겪었던 ‘IMF어른’, 금융권 수장이다. 그들은 ‘위기관리 선봉장’이 되어 현장에 귀를 기울여 발빠른 리더십을 보여주고 있다. 또 한 가지 주목해야 할 점이 있다. 바로, 아직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경제 파고 속에서 펼쳐내는 ‘경험의 지혜’가 외부뿐만 아니라 회사 내에서도 빛을 내고 있다는 점이다.

OK저축은행, OK캐피탈 등이 속한 ‘OK금융그룹’ 최윤 회장은 초·중·고·대학생 자녀를 둔 그룹 계열사 임직원을 대상으로 노트북 무상 지급에 나섰다. 사상 초유의 온라인 개학을 두고 내부 구성원을 위한 복지 증진을 고민했던 OK금융그룹 최윤 회장의 아이디어에서 비롯됐다는 후문이다.

이에 앞서 한국씨티은행은 '코로나19'로 경제적 활동에 어려움을 겪는 직원들을 위한 특별지원금 지급에 나섰다. 씨티그룹 마이클 코뱃(Michael Corbat) 최고경영자(CEO)가 전세계 각 나라의 직원들을 대상으로 특별지원금 지급 계획을 발표함에 따라 한국씨티은행은 연간급여 기준으로 하위 26%에 해당하는 직원을 대상으로 지원에 나선 것이다.

이밖에도 우리금융그룹과 KB금융그룹 역시 임직원 챙기기에 적극 나선 바 있다. 코로나19로 인해 감염시 위험이 큰 임산부 등에게 부여하는 공가 기간 연장 및 개원·개학 연기에 따른 가족돌봄휴가를 장려하는 등 직원에 대한 지원도 병행한 것이다.

이렇듯 금융기관 수장들은 임직원의 어려움에 공감, ‘일상으로의 회귀’를 묵묵히 돕고 있었다. 외강내강의 모습을 보여주며, 위기 속 살뜰한 임직원 챙기기를 보여준 것이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누구나 이 아늑함을 누릴 수는 없는 모양이다. 얼마 전 지하철에서 옆자리에서 만난 낯선 그도 그랬다. 수화기 너머로 나직이 '급여 삭감' 소식을 전하는 그의 쓸쓸한 목소리가 내 귓가에 머물렀다. 다만, 나는 그가 너무 많은 어려움에 빠지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졌고, 여전히 그 생각을 마음속에서 떠나보내지 못하고 있다.

천천히 누군가에게 전하던 그의 목소리는 비단 그의 사정만은 아닐 것이다. 모두가 어려운 시절을 겪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래도 한 가지 바람을 가져본다. 위기 속 빛나는 금융권 리더들의 '부드러운 리더십'을 멀리서 바라본 한 사람으로서, 보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그런 따스한 손길이 당도했으면 하는 그런 막연한 바람이다.

곧, 모두에게 따스한 봄바람이 불어오기를 진심으로 바라며 '대한민국의 모든 직장인분들, 힘내세요!'라는 말을 남기고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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