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주년 앞둔 우리나라 1세대 제약업체

수익성 악화 위기 뚫고 글로벌 제약사로 ’퀀텀점프’

산업을 이끄는 여러 업종들은 저마다의 장점과 특색을 가지고 시장에서 치열하게 경쟁한다. 세상에 중요하지 않은 산업이 어디 있겠냐만, 그 중에서도 ‘미래 먹거리’ 분야에서 글로벌 공룡과 치열하게 경쟁하는 기업에게는 상대적으로 더 많은 관심이 쏠린다.

K-POP이 문화컨텐츠를 주도하고 반도체가 세계 시장에서 남다른 점유율을 보이는 요즘, 또 다른 ‘한류'를 꿈꾸며 내일을 준비하는 기업들이 있다. 제약·바이오 기업들이다. 이들은 ‘보건안보 산업’이라는 기존 틀에서 과감하게 벗어나 국가경제를 책임질 미래 주력 산업으로 성장하기 위해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이제는 K-바이오 시대다. 해당 산업을 이끄는 국내 기업의 역사와 최근 동향, 그리고 미래 전망과 리더십을 심층 취재해 연재한다. [편집자주]

[그린포스트코리아 이민선 기자] 창립 100주년을 앞두고 글로벌 제약사를 향해 박차를 가하는 우리나라 토종 제약사가 있다. 바로 유한양행. 고(故) 유일한 박사가 설립한 유한양행은 지금까지도 그의 뜻을 이어오고 있는 1세대 제약업체다.

유한양행이 지금까지 국민의 사랑을 받아온 이유는 뭘까? 유한양행이 처음으로 자체 개발한 의약품인 ‘안티푸라민’에서 알 수 있다.

안티푸라민
올해 출시 86년을 맞은 유한양행의 대표 장수의약품 안티푸라민 (유한양행 제공)/그린포스트코리아

올해로 86살이 된 안티푸라민. 옛 부모님 세대는 자식들이 배가 아프다면 배에, 코가 막혔을 때는 코 밑에 안티푸라민을 발랐다. 안티푸라민은 1933년 유 박사가 의사 출신의 중국인 부인 호미리의 도움을 얻어 발명한 첫 자체 의약품이다. 1926년에 설립된 유한양행은 그전까지만 해도 의약품을 수입 판매했다.

브랜드 명인 ‘안티푸라민’에는 기업 이념도 녹아있다. ‘반대’라는 뜻의 안티(anti)에 ‘불태우다, 염증을 일으킨다’라는 뜻의 인플레임을 합쳐 ‘항염증제’, ‘진통소염제’라는 제품 특성을 그대로 살렸다.

유일한 박사는 1930년대 과대광고가 난무하던 시절에도 신문 광고에 ‘사용 전 의사와 상의하라’와 같은 문구를 넣었다. 안티푸라민이 만병통치약처럼 여겨지는 걸 경계한 것이다.

안티푸라민은 긴 세월을 거쳐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장수 의약품으로 자리 잡았고, 유한양행은 유일한 박사의 일념을 담아 94년 동안 성업 중이다.

 

노블리스 오블리주의 표본, ’기업은 개인 아닌 사회의 것’

올해 출시 86년을 맞은 유한양행의 대표 장수의약품 안티푸라민 (유한양행 제공)/그린포스트코리아
유한양행 창업주 고(故) 유일한 박사 (유한양행 제공)/그린포스트코리아

유일한 박사는 한평생을 나라와 국민을 위해 활동했다. 어린 나이에 미국 유학을 떠나 미국에서 성공한 사업가로 자리 잡았지만, 우리나라가 가장 어려웠던 시기에 돌연 귀국했다.

조국의 비참한 현실에 눈떴기 때문이다. 당시 우리나라는 열악한 환경으로 약 한 알이 없어 죽어가는 이들이 많았다. 그들을 살리기 위해 1926년 유일한 박사의 이름을 딴 ‘유한’과 세계로 통한다는 ‘양행’이라는 뜻을 담아 유한양행을 설립했다.

유한양행의 상징인 버드나무는 독립운동가 서재필 박사가 유일한에게 정표로 건넨 버드나무 목각화에서 따왔다. 무수한 역경 속에서도 꺾이지 않고 싱싱하고 푸르게 성장하라는 서 박사의 뜻이 담겨 있다.

유한양행은 1936년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 주식회사가 됐다. 유 박사의 ‘기업은 개인의 것이 아니라 사회의 것’이라는 일념에서다. 이후 주식의 30%를 사원들에게 배분하고, 종업원 지주제를 도입했다.

1969년 유일한 박사는 공채로 입사한 조권순 사장에게 대표직을 물려주고 떠났다. 당시 한국 기업 최초의 전문경영인 체제 도입이라고 불릴 만큼 획기적 사건이었다.

 

오너가 지분 ‘제로’ ... 최대주주 유한재단은 ‘사회 환원의 아이콘‘

주주
유한양행 주주현황 (그래픽:최진모 기자)/그린포스트코리아

오너가라 할 수 있는 유일한 가족이 보유한 주식 지분은 0%다. 현재 유한양행의 최대 주주는 사회공헌 사업을 주도하고 있는 유한재단이다. 유한재단과 유한학원은 매년 받는 배당금 전액을 사회공헌 사업에 쓰며 사회 환원의 아이콘이 되고 있다.

유한양행이 투명한 경영을 해올 수 있었던 이유도 이 때문이다. 유한양행은 유일한 박사가 조권순 사장에게 대표직을 물려준 이후 51년이 지난 지금까지 평사원 출신 전문경영인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창업주의 과감한 행보가 유한양행을 ‘샐러리맨의 신화’가 가능한 기업으로 만든 것이다. 지금까지도 유한양행 임직원 중 유 박사와 친인척인 직원은 한 명도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내부 직원이 임원이 되고 대표 자리까지 오를 수 있는 시스템이다.

이정희 유한양행 사장 이력 (그래픽:최진모 기자)/그린포스트코리아
이정희 유한양행 사장 이력 (그래픽:최진모 기자)/그린포스트코리아

현재 유한양행의 대표이사 이정희 사장 역시 공채 출신이다. 유한양행에 1978년 입사한 그는 유한양행 영업직 근무 당시 신약 마케팅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는 평을 받았다. 이정희 사장은 유통사업부장, 마케팅홍보 담당 상무, 경영관리본부장을 지내고, 2015년 3월부터 유한양행 대표이사 사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유한양행 연구개발비 추이 (그래픽:최진모 기자)/그린포스트코리아
유한양행 연구개발비 추이 (그래픽:최진모 기자)/그린포스트코리아

대표 취임 이후에는 신약 개발에 적극적으로 투자했다. ‘유한양행은 신약 개발에 소홀하다'는 비판이 더는 안 나오게 하겠다는 그의 의지였다. 이정희 사장은 수익성이 낮은 기존 상품의 비중을 줄이고, 신약 개발 비중을 꾸준히 늘려왔다.

지난해에는 전체 매출의 9.3%에 달하는 1382억원을 R&D에 투자했다. 올해는 역대 최대치인 2000억원을 투입한다. 유한양행은 이처럼 매년 투자 금액과 매출 대비 비중을 늘려나가고 있다. 향후 연구·개발 중심 제약사로 자리매김할 방침이다.

 

마일스톤 ‘427억원‘ 수령 ... 글로벌 연구개발 성과 가시화

상위 5개 제약사 영업실적​(그래픽:최진모 기자)/그린포스트코리아)
상위 5개 제약사 영업실적​(그래픽:최진모 기자)/그린포스트코리아)

2014년 업계에서 처음으로 1조 원 이상의 매출을 기록한 유한양행은 지난해 매출 1조 463억원을 기록하며 1위 자리를 지켰다.

하지만 매출액, 영업이익 모두 마이너스 성장했다. 지난해 효자 품목이던 비리어드의 특허만료로 약가가 인하됐고, 자회사의 원료의약품 수출 부진이 더해졌기 때문이다.

전체 매출 규모보다 ‘내실에 집중하고 있다’며 올해 매출은 나아질 것이라는 게 관계자의 전언. 실제 올해 글로벌 연구개발 성과가 가시화되고 있다.

얀센 경영진은 지난해 초 열린 컨퍼런스콜에서 레이저티닙과 JNJ-61186372 병용에 대한 기대감을 나타냈다 (유한양행 제공)/그린포스트코리아
얀센 경영진은 지난해 초 열린 컨퍼런스콜에서 레이저티닙과 JNJ-61186372 병용에 대한 기대감을 나타냈다 (유한양행 제공)/그린포스트코리아

최근에는 2018년 얀센에 기술수출한 비소세포폐암 치료제인 레이저티닙의 기술료 3500만달러(한화 427억원)를 수령했다. 기술수출 이후 받은 첫 기술료로 국내 제약사가 달성한 개발 마일스톤 중 가장 큰 금액이다.

얀센과 공동개발하고 있는 레이저티닙은 향후 블록버스터급 신약으로 기대를 받고 있다. 마일스톤은 임상 진척에 따라 내년에도 수백억 원가량이 유입될 것으로 보인다.

유한양행은 신약후보 물질 기술수출을 통해 지금까지 1650억원의 계약금을 받았다. 반환 의무가 없는 초기 계약금과 마일스톤 등을 포함한 금액이다. 바이오벤처와의 오픈 이노베이션을 통해 신약후보 물질(파이프라인)을 발굴하고, 이를 글로벌 제약사에 수출하는 전략이 힘을 발한 것이다.

유한양행은 항암제 등 고령화 시대의 질환 치료제 연구에 매진해왔고, 지금까지 총 4건의 기술수출을 성사시켰다. 규모는 약 4조원에 이른다.

지난 2018년 7월 스파인바이오파마에 퇴행성 디스크질환 치료제 ‘YH14618’을 2억1815만달러에 기술수출했다. 레이저티닙은 계약금과 단계별 마일스톤을 포함, 총 12억5500만달러에 계약했다.

지난해에는 길리어드사이언스와 베링거인겔하임에 비알코올성 지방간염 후보물질 두 개를 넘겼다. 계약금액은 각각 7억8500만달러와 8억700만달러다.

 

유한양행, 성공적 100주년 맞기 위한 앞으로의 과제는?

유한양행 중앙연구소 연구원들이 신약개발을 위한 연구를 하고 있다. (유한양행 제공)/그린포스트코리아
유한양행 중앙연구소 연구원들이 신약개발을 위한 연구를 하고 있다. (유한양행 제공)/그린포스트코리아

유한양행은 현재 당장 악화된 수익성을 개선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하지만 지난해 12월을 기준으로 확보한 27개의 신약 파이프라인(합성신약 12개, 바이오신약 15개)이 빛을 발하기 시작할 것으로 보인다.

DB금융투자 구자용 애널리스트는 “기존 의약품의 부진한 판매 실적은 코로나 19의 장기화는 2분기에도 이어질 것으로 판단한다”며 “하지만 2분기부터는 의약품 신규도입, 기술료 유입 등으로 다른 제약사와는 달리 코로나 19를 극복하는 실적을 달성할 것으로 기대된다”고 말했다.

하나금융투자 선민정 애널리스트는 “(올해는) 기술이전 계약 규모 확대로 클래스가 다른 한 해가 될 것”이라면서 “출시 이후 로열티 수취까지 기대해 본다면 유한양행이 해마다 수취할 수 있는 기술료는 2000억~3000억원 대에 도달할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분기별 200억원대 영업이익에 만족하던 국내 제약사가 아닌 글로벌 제약사로 도약할 유한양행. 앞으로도 단기적인 이익 성장에만 몰두하지 않고, 신약 개발 및 시장 방향에 맞는 투자 강화로 100주년을 향해 나아갈 전망이다.

minseonlee@greenpost.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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