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디오 이기고 미디어 시장 독주한 TV...스마트폰에는 진다?
미디어 환경 변화에 따른 새로운 사회적 논의 필요

[그린포스트코리아 이한 기자]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1981년에 케이블 TV채널 MTV가 설립됐다. 81년생이면 한국 나이로 마흔이니까 벌써 오래 전 얘기다. 갑자기 오래전 얘기를 꺼내는 이유는 TV를 둘러싼 매우 상징적인 장면이 그 해에 있었기 때문이다.

MTV는 첫 방송에서 영국 밴드 버글스의 뮤직비디오 ‘Video killed the radio star’를 틀었다. 그저 신나고 유명한 노래라는 것 만으로 그 곡을 선택한 것 같지는 않다. ‘영상(비디오)이 라디오 스타를 죽였다’는 내용의 가사와 제목에 주목해보자. 이 노래는 1980년대를 지나면서 TV가 라디오를 꺾고 인류 최대의 미디어가 됐다는 사실을 드러내고 있다.

정확하게 말하면,'80년대에 들어서야 TV가 본격화됐다'고 해석할 수는 없다. 1969년 닐 암스트롱이 달에 착륙하는 장면도 TV로 중계됐으니까. 하지만 그때는 라디오의 힘이 TV만큼 쎈 시절이었다. 그러나 80년대라면 TV가 라디오보다 영향력이 더 커졌다고 봐야 한다. 아마도 MTV는 '새로운 시대가 왔다'는 메시지를 노래로 선언한 것 아닐까?

TV의 전성기는 길었다. 포크 세대는 물론이고 X세대와 밀레니엄도 ‘테레비’를 보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토요일 밤에는 새벽까지 영화를 보고 일요일 아침에는 만화를 보는게 공식처럼 여겨지던 시절이 있었다. 그런 경향은 불과 10여년 전까지도 남아있었다. ‘무한도전’은 토요일날 보고 ‘1박2일’은 일요일날 보던 시절 말이다.

그렇다면 지금은 어떨까.

며칠 전 평소 친하게 지내는 미디어 종사자들과 단톡방에서 ‘요즘 뭘 보는지’ 얘기했다. 패션매거진 기자는 ‘이태원 클라쓰’에 뒤늦게 빠졌다고 말했고 방송 기자는 ‘킹덤’ 시즌 2가 첫 번째 시리즈보다 훨씬 재밌다고 했다. 응답하라 시리즈의 열성팬인 작가 한명은 ‘슬기로운 의사생활’을 꼽았고 IT 기자 한명은 ‘미스터 트롯’을 보면서 아버지가 예전에 왜 트롯트를 좋아하셨는지 알게 됐다고 말했다.

이날 그래픽 디자이너 한명은 ‘종이의 집’을 본다고 했다. 누군가 그게 뭐냐고 묻자 스페인 드라마라고 했다. 일드나 미드, 중드, 영드도 아니고 스페인이었다. 우리나라에서 비행기 직항 기준으로 가장 먼 나라중 하나. 스페인에서 만든 드라마를 ‘정주행’ 하면서 자란 세대가 과거에도 있었을까?

◇ 본방과 재방의 경계가 사라지는 시대..."요즘 누가 TV봐?"

기자의 기억 속 드라마는 주로 요일과 관련이 깊었다. 개인적으로 살면서 가장 재밌는 드라마였던 선덕여왕은 MBC창사특집극으로 ‘월화'드라마였고 언제 봐도 기본적인 재미를 보장하는 꿀잼드라마, 기자 뿐만 아니라 부모님 세대도 재밌게 보던 드라마는 대개 KBS ‘주말’에 몰려 있었다.

그러나 요즘은 누구도 내가 보고 싶은 컨텐츠가 수목드라마인지 아니면 주말드라마인지 얘기하지 않는다. 왜 그럴까? 이유는 분명하다. 그날 단톡방이 아니라 이미 작년 여름에 한 지인이 기자에게 이런 말을 한 적 있었다. “요즘 누가 TV봐요?”

‘동네 사람들이 마당에 모여 앉아 TV를 같이 봤다’는 얘기를 기자도 들어본 적 있다. 하지만 40대인 기자에게도 그런 기억이 머릿속에 실재하는 건 아니다. 전해져 내려오는 얘기를 들어보았을 뿐이다. 이제 몇 년만 지나면 '가족들이 TV리모컨 가지고 싸웠다'는 얘기가 점점 낯설어질 터다. 주말 저녁에 식구들이 다 같이 모여 예능을 함께 보는 장면도 줄어들 것이다. (어쩌면 이미 낯선 장면일 수도 있겠다) TV가 가족의 공유물이 아니라 개인의 것이 되어가는 시대기 때문이다.

월화드라마나 수목드라마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소비 시장에서는 컨텐츠가 방영되는 요일과 시간의 영향력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본방과 재방의 구분이 흐릿해지고 있다는 의미다.

KT 구현모 대표이사는 작년까지 커스터머&미디어부문장이었다. 그는 지난해 가을,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누구에게나 똑같은 콘텐츠와 같은 화면을 보여주는 기존의 방식은 경쟁력이 없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영상 콘텐츠는 각자의 공간, 각자의 취향, 각자의 단말로 소비하는 시대”라고 말했다.

◇ 일상생활에서 가장 필요한 매체, 스마트폰? 아니면 TV?

이날 단톡방에서 얘기를 나눈 사람들은 드라마나 영화를 TV로 보지 않는다. 넷플릭스나 왓챠플레이, 유튜브에서 본다. 시청료 대신 구독료를 내고 스마트폰이나 노트북으로, 아니면 태블릿PC로 본다.

기자는 요리 레시피가 궁금하거나 꼭 필요한 정보가 있으면 네이버 또는 구글에서 텍스트를 검색한다. 하지만 Z세대들은 유튜브에서 영상을 찾아본다. ‘영상은 한번에 요약해서 빨리 보기가 어려워. 정보 찾을때는 글이 더 좋아’라고 말한다면 당신도 ‘요즘 세대’에서는 멀어졌다는 의미다.

그렇게 영상에 익숙한 세대들이 늘어날수록, 유튜브와 넷플릭스, 왓챠플레이 같은 새 미디어의 힘은 점점 세지고 거실에 모여 TV를 보는 시간은 점점 줄어들 것으로 예상된다.

방송통신위원회가 조사한 ‘2018년 방송매체 이용행태 조사’에 따르면 여전히 TV이용 시간은 전 연령대에서 골고루 높았다. 하지만 ‘일상생활에서 필수적인 매체’를 고르라는 질문에서는 스마트폰이라고 응답한 사람이 57.2%로 TV(37.3%)를 앞질렀다.

큰 차이가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미래에는 그 간격이 벌어질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그런 추세를 보여왔기 때문이다. 2013년까지는 TV응답자가 더 많았고 2014년에는 거의 비슷한 응답률을 보였다가 2015년부터 역전됐고 이후 간격이 더 벌어졌다.

세대별로 나눠서 보면 그 차이는 더욱 확실해진다. 10대 소비자의 경우 스마트폰(82.5%)과 TV(7.6%)의 격차가 압도적이었고, 20대 소비자에도 스마트폰(81.5%)이 TV(11.4%)보다 크게 높았다.

거실에서 전화가 사라지는 시대, 공중전화의 필요성도 과거에 비해 크게 줄어든 시대다. 그 물결에서 TV도 자유롭지 않다. 고화질 대화면 TV를 거실 한복판에 걸어놓는 것은 여전히 ‘경제적인 성공’을 의미하는 상징적 행위 중 하나지만 TV의 영향력은 줄어들고 있다.

사람을 만나는 대신 집에서 다양한 정보를 검색하려니 여러 대의 정보통신 기기가 필요하다. 그런데 저 작은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것 만으로도 이산화탄소가 발생한다. 무슨 까닭일까. (독자 제공)/그린포스트코리아
스마트폰이나 노트북 등 개인용 IT기기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많다. 어떤 소비자들은 2개 이상 사용하기도 한다. TV의 시대가 저물어가는 이유 중 하나다. 스마트폰이 TV이 역할을 대신하는 경우가 늘어난다면 그에 따른 새로운 사회적 논의도 필요하지 않을까? (독자 제공)/그린포스트코리아

◇ 시청료 대신 구독료 내는 소비자...콘텐츠제공사업자 망 사용료는?

이 지점에서 몇가지 짚어볼 것들이 있다. 첫째로는 유튜브와 넷플릭스 등 해외 콘텐츠제공사업자들의 망 사용료 문제다.

최근 넷플릭스 한국법인 넷플릭스서비시스 코리아가 서울중앙지방법원에 SK브로드밴드에 대해 민사 소송을 제기했다. 넷플릭스가 트래픽과 관련해 망 운용·증설·이용에 대한 대가를 지급할 의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채무부존재 확인의 소'다. 쉽게 말해서 망 사용료를 내지 않겠다는 의미다.

양측은 이 문제로 이미 지난해 11월 방송통신위원회에 중재를 요청하는 재정신청을 하는 등 갈등을 빚은 바 있다.

망 사용료란 인터넷망이나 통신망 등을 사용할 때 내는 돈을 뜻한다. 통신사마다 접속료, 네트워크서비스이용료, 인터넷 접속서비스 이용료 등 각자 다른 단어로 부르지만 쉽게 말하면 망을 사용하기 위해 내는 돈이다.

인터넷 데이터를 많이 사용하는 국내 주요 IT기업들은 국내 통신사에 망 사용료를 낸다. 그 가운데 해외 기업들이 사용료를 내지 않는 문제를 두고 지난해 국정감사에서도 논란이 제기된 바 있다.

지난해 방송통신위원회 국정감사에서는 존 리 구글코리아 대표가 여야 의원들로부터 집중적으로 질문을 받았다. 당시 존 리 대표는 “시장의 지배적 사업자로 트래픽을 많이 발생시키는데, 망 사용료를 내야 햐지 않느냐”는 질문에 대해 “구글은 인프라와 글로벌 네트워크에 막대한 투자를 하고 있다” 면서 즉답을 피했다.

실제로 구글코리아는 수년째 국정감사에서 망사용료 관련 질문을 받아왔고 페이스북과 방송통신위원회가 망사용료를 둘러싸고 행정소송도 벌인 바 있다.

양측의 입장은 분명하다. 통신사는 “글로벌 콘텐츠제공사업자들도 정당한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입장이고 글로벌 사업자들은 “한국 시장과 인프라에 많은 투자를 해왔고, 우리는 한국법을 적용받지 않는 외국 기업”이라고 주장해왔다. 이 가운데 망 사용료를 내는 국내 일부 기업들이 역차별을 주장하는 등 각자의 주장이 팽팽히 맞서고 있다.

소비자들은 시청료 대신 구독료를 낸다. 유튜브 프리미엄에 가입하고 넷플릭스 계정을 가족과 공유하면 월 구독료만 2만원이 훌쩍 넘어간다. 그렇다면 유튜브와 넷플릭스는 통신사에 돈을 내지 않아도 괜찮을까? 곰곰히 따져봐야 할 문제다.

◇ 가족 모두가 각자 스마트폰으로 따로 콘텐츠를 본다면?

개인 디바이스로 각자 원하는 영상을 보는 시대가 된다면 한가지 더 따져볼 것이 있다. 환경적인 영향에 대해서다.

사람들은 환경 위험요소에 대해 생각할때 화석원료를 사용하는 전통적인 굴뚝산업만 떠올린다. 하지만 인터넷을 포함한 정보통신 기술도 여기서 자유롭지 않다. 비디오 스트리밍으로 1시간 동안 동영상을 보면 자동차로 1Km를 주행하는 것과 비슷한 효과가 난다.

소비자들이 스마트폰이나 노트북 등으로 사용하는 데이터는 플라스틱이나 일회용 비닐처럼 눈에 보이는 공간을 차지하면서 쓰레기로 쌓이지는 않는다. 하지만 데이터도 인류의 기후위기 등과 적잖은 관련이 있다. 데이터를 처리하기 위해서는 데이터센트 등 실제 공간도 필요하다. 스마트폰은 TV보다 훨씬 작지만, TV는 오래 쓰고 스마트폰은 1~2년 주기로 바꾸는 문제도 있다.

노트북이든 스마트폰이든, 화면 안에서 빠르게 오가는 정보들은 결국 화석원료 에너지 기반이다. 정보가 오가려면 서버가 필요하고, 서버를 운영하려면 충분한 전기가 필요하며. IT기업 데이터센터는 하루 종일 열기를 식히고 냉각시켜야 한다. KBS 보도에 따르면, 독일의 경우 지난 9년간 컴퓨터 센서 등으로 사용한 전기가 지난 9년 동안 40% 늘었다.

TV는 여전히 힘이 세다. 하지만 또 다른 ‘센 녀석’들이 소비자들의 삶 속에 빠르게 침투하고 있다. TV의 시대에 유효하던 제도 또는 질서가 앞으로는 ‘시대에 맞지 않는 것’이 될 가능성도 높다.

미디어 환경의 변화에 따른 새로운 사회적 논의들이 시작되어야 할 때다.

leehan@greenpost.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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