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포스트코리아 김형수 기자] 며칠 전 전화 통화에 신경이 팔린 탓에 지하철역에 들어가면서 마스크 쓰는 걸 까먹고 말았다. 승강장에서 지하철을 기다리는 사람들로부터 따가운 눈총을 받고 나서야 주머니에 넣어둔 마스크가 생각났다. 코로나19가 바꾼 풍경이다. 

27일 0시 기준 코로나19 확진자는 9332명으로 전날보다 91명이 늘어났다. 기자가 사는 서울에서 나온 코로나19 확진자는 어제보다 12명 늘어난 372명으로 집계됐다. 사망자는 없고 격리 중인 사람이 283명, 격리 해제된 사람이 89명이다. 지난달 기준 서울 인구는 973만6962명이니 서울 시민 가운데 0.0038%가 코로나19 바이러스에 감염된 셈이다. 

확진자 비율이 매우 낮지만 서울 길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은 혹시나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바이러스를 퍼뜨릴 수도 있다는 생각에 마스크를 꼬박꼬박 쓰고 다닌다. 남자, 여자,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밖에서 마주친 사람들의 얼굴은 반밖에 볼 수 없다. 인적이 드문 길거리에서도, 혼자 운전하는 자동차 안에서도 마스크를 벗지 않는 사람들을 종종 마주친다. 자신이 ‘코로나19 전파자’가 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며 조심하는 것이다.

26만명. 여성과 미성년자들을 성착취한 영상을 제작하고 유포한 ‘n번방’을 이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사람들의 숫자다. 한국 인구가 5178만579명이니 전체 인구의 약 0.5%에 달하는 사람들이 ‘n번방’과 관계가 있는 것이다. 26만명이란 숫자에 중복 사례가 포함됐다고 하더라도 서울의 코로나19 확진자 비율보다 낮아질 가능성은 높지 않아 보인다. 지금까지 있었던 무수히 많은 성범죄 사건에 연루된 사람들을 더하면 숫자는 더 늘어날 것이다.

‘n번방’ 사건이 불거지자 고장난 라디오처럼 같은 반론이 나왔다. 일부 남성들이 그릇된 행위를 저질렀다고 해서 모든 남성을 잠재적 범죄자로 바라봐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다. 여성을 대상으로 벌어진 범죄가 알려지고, 사회적 관심이 모일 때마다 되풀이되는 소리다. 반면 마스크를 쓰지 않는 사람들을 ‘잠재적 코로나19 바이러스 전파자’ 취급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은 듣지 못했다. 9332명을 감염시킨 코로나19 바이러스를 향한 무서움은 이해가 가지만, 26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연루된 것으로 추정되는 성착취 사건을 두려워하는 마음은 공감하기 힘든다는 걸까. 

코로나19 바이러스 예방을 위해 마스크를 쓰고 다니려면 몹시 답답하다. 마스크를 쓰고 안경을 착용하면 안경 렌즈에 김이 서려 걸어다니기도 꽤나 불편하다. ‘n번방’에 들어가지도 않았는데 ‘n번방’에서 성착취 영상을 본 사람들과 같은 취급을 받는 것은 억울할 것이다. 억울하니 자신은 ‘잠재적 가해자’가 아니라며 목에 핏줄을 세운다. 

억울함을 호소하는 데 들어가는 힘을 좀 더 나은 일에 사용하는 방법이 있다. ‘잠재적 가해자’라는 소리를 더 이상 듣지 않아도 되는 세상을 향해 한국 사회가 나아가는 데 힘을 보태는 것이다. 나 한 사람 더 나선다고 여성을 향한 성범죄가 사라질까하는 의문이 들지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손을 놓으면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는다. 노예제가 폐지되고 여성들이 투표권을 쟁취하는 데도 수많은 사람들의 노력과 기나긴 시간이 필요했다. 

마틴 루터 킹처럼 훌륭한 연설을 할 말주변이 없어도, 로자 파크스 같은 행동력이 부족해도 할 수 있는 일은 있다. 영화 ‘벌새’의 김보라 감독은 이달 22일 본인의 페이스북에 “당신이 당사자가 아니라면, 주변의 남성들에게 불법 동영상을 보지도 공유하지도 말고, 룸싸롱에 가지 말고, 갔던 주변 남성들에게 반성하라고 하고, 여성을 향한 성적 농담이나 비하를 하며 형제애를, 남성성을 과시하는 행동을 멈추자고 말하자”고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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