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르고 편리한 한국사회, 그 내면을 생각하다
속도 높이기 위해 투입되는 '다른 사람의 시간' 문제

[그린포스트코리아 이한 기자] 오래 전 얘기다.

외국계 회사에서 근무하던 한 지인이 ‘본사가 정말 답답하다’면서 신기한 얘기를 들려줬다. 본사 담당자가 휴가를 가면 기간이 2주건 3주건 그 사람과는 전혀 연락할 수 없다는 얘기였다. 그 지인은 이렇게 말했다.

“본사랑 커뮤니케이션 하는 게 너무 힘들어. 5시만 되도 사무실에 아무도 없고 휴가 가면 업무가 완전히 단절돼. 메일 보냈는데 답이 없어서 국제전화 걸었더니 담당자가 휴가중이니까 2주 뒤에 연락하라고 하더라"

"급한 일이어서 사정을 설명하고 ‘미안하지만 그 일을 확인해줄 다른 사람이 없느냐’고 물어봤는데 전화 받은 직원이 사무적으로 얘기하더라 ‘내가 조금 전에 말했잖아. 휴가 갔다니까’라는거야. 황당하지?”

다른 세상 얘기 같았다. 아니, 실제로 다른 세상 얘기였다. 왜냐하면 기자는 “쉬는날 미안한데~” 라는 말로 시작되는 전화나 메시지를 거의 매년 받아봤기 때문이다. 휴가중이어서 일을 처리할 수 없다는 것이 그 시절 기자에게는 당연하지가 않았다. 휴가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잠깐 짬 내서 확인하고 처리하는 것이 당연한 일처럼 여겨지던 시절이었다.

5시만 되면, 휴가를 가버리면 일이 전혀 진행되지 않는 그들이 이상했을까? 아니면 6시가 넘어서도, 휴가를 가서도 필요한 경우 일은 처리되는 우리가 이상했던걸까?

몇 년 전, 기자는 콘텐츠 제작대행 일을 했었다. 광고 홍보용 인쇄물이나 디지털 콘텐츠를 주로 만들었다. 기자에게 일을 의뢰한 사람들 중 어떤 이들은 금요일날 갑자기 이런 부탁(?)을 해왔다. “죄송한데요, 월요일날 아침 일찍 보고를 들어가야 해서요. 혹시 일요일 저녁까지 보내주실 수 있을까요?”

그럴 때마다 화가 났다. “그건 불가능합니다. 저희는 주말에는 일하지 않거든요. 지금 바로 작업해도 수요일 오전은 되어야 완성이 가능합니다. 보고 일정을 뒤로 미뤄주세요” 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기자는 워라밸을 중요시했고 많은 월급보다는 한가한 저녁시간을 더 원했다. 하지만 당시 기자의 상사는, 그리고 기자의 회사는 그걸 용납하지 않았다. 남의 돈 받는 게 어디 쉬운일이냐며 꾹 참았고, 바쁘고 힘들어도 일정 지키는게 ‘프로’ 아니겠냐며 스스로를 다독이기도 했다. 그럴때마다 여러 고민을 했다.

하긴,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기자에게 일요일 오후에 완성물을 전달받아 확인하고 월요일 아침 이전까지 보고 준비를 마쳐야 하는 그 담당 실무자도 어쩌면 기자와 비슷한 고민을 했을 수 있겠다.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났다. 지금은 어떨까?

◇ 빠르고 편리한 한국사회, 그 내면을 들여다보다

한국은 일 처리가 빨라서 매우 편리한 나라다. 물건 사면 다음날 배송되고 음식을 시키면 곧바로 배달된다. 배송이 빠른 것은 ‘당연한’일로 여겨지고 주문한 제품이나 음식이 늦게 도착하면 그것은 ‘죄송한’일이 된다. 기자도 오늘 주문한 물건이 하루 이틀 내로 오지 않으면 답답해한다. 금요일날 주문해서 주말이 끼어 있어도 주초에는 당연히 물건을 받을 것이라고 기대한다. 올챙이 시절 생각 못하는 개구리 같기도 하다.

그래서일까. 우리나라는 밤새도록 택배차가 달리면서 새벽에도 물건을 배송해준다. 빠름을 강조하고 싶어서일까. ‘총알’이나 ‘로켓’이라는 용어도 업계에서는 일상적으로 쓴다.

한국의 속도는 세계적이다 ‘빨리 빨리’가 하나의 브랜드처럼 여겨진 것은 이미 오랜 얘기다. ARS를 예로 들어보자. 상담센터에 전화를 걸면 대개 수초내로 상담사와 연결된다. 전화 연결이 몇 분만 지연되어도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할 터다 “뭐야, 여기 일 안해?” 참고로 일본이나 유럽에서 생활해본 사람들은 한국처럼 관공서나 콜센터 일처리가 빠른 곳이 없다고 말한다.

속도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는 한국 사회는 소비자 입장에서 빠르고 편리하다. “내가 전화를 한게 언제인데 아직도 처리가 안 됐느냐”는 항의가 정당한 것으로 여겨지는 분위기도 있다. 하지만 마치 자동차 운전이 그러하듯, 빠름 뒤에는 리스크가 있다.

배송 일을 갓 시작한 사람이 새벽에 제품을 배송하다 목숨을 잃는 사고가 있었다. 세상 모든 사고가 그렇듯 원인을 명백하게 밝히기는 어렵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최근 늘어난 택배 물량, 배송업계의 치열해진 경쟁 등이 원인이라고 지적한다.

콜센터 근무자들이 코로나19에 대거 감염된 일도 있었다. 바이러스에 감염된 순간이 회식 중 식사자리에서였는지, 아니면 책상에 앉아 고객을 응대하던 순간이었는지 세세하게 밝히기는 어렵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다닥다닥 붙어있는 비좁은 책상 등 콜센터 특유의 근무 환경이 집단 감염을 키웠다고 지적한다. 한정된 공간에 많은 사람이 모여 고객을 응대한 이유는 분명하다. 더 많은 문의를 더 빨리 처리하기 위해서다.

코로나19 사태를 보자. 적극적인 검사가 이뤄졌다. 그 덕분에 감염이 확산되는 가운데에서도 확진자를 빨리 특정해 폭넓은 역학조사를 진행할 수 있었다. 감염 사태에 대한 정부의 대응이 적절했느냐 그렇지 못했느냐는 논의해볼 부분이지만, 적극적인 검사에 대해서는 대체로 긍정적인 평가를 내린다.

그 이면에는 24시간 비상근무 체제에 돌입한 연구진들의 노고가 있다. 뉴스1의 보도에 따르면, 보건환경연구원 감염병 실험실 관계자들은 코로나19 검사를 위해 24시간 근무 후 오전에 잠을 자고 오후에 다시 출근하기도 하는 일상을 두달째 반복하고 있다.

◇ 속도 높이기 위해 필연적으로 투입되는 '다른 사람의 시간' 문제

물론 코로나19는 전 세계적인 비상사태이므로 위에 언급된 다른 사례와 똑같은 관점에서 바라볼 수는 없다. 관련 지식을 충분히 갖춘 검사 전문가를 쉽게 늘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비상 시국인데도 피로도를 감안해 근무시간을 크게 줄일 수도 없는 노릇이니 말이다. 이 자리를 빌어, 코로나19와 최전선에서 싸우는 의료진과 관계자에게 깊은 경의와 감사를 표한다.

다만 이런 경향들 속에서 한가지 짚어보아야 할 문제가 있다. 속도를 높이기 위해 필연적으로 투입되어야 하는 ‘노동력’의 문제, 바꿔 말하면 ‘사람의 근무환경’에 관한 문제다.

거듭 말하지만, 한국 사회는 세계적인 속도를 자랑한다. 그 속도는 IT 강국답게 기술에서 나오기도 하고, 현대사회로서 가지고 있는 제도와 시스템, 또는 우리나라 시민들이 가지고 있는 의지나 성향에서 나오기도 한다. 하지만 상당 부분은 ‘수고로움을 기꺼이 감수하는 사람’에게서 나온다.

개인의 힘과 노력도 중요하지만, 잘 갖춰진 제도와 시스템이 이끌 때 사회는 더 건강해진다. 우리가 가진 속도의 장점을, 인간의 수고로움 대신 다른 방법으로 유지할 수는 없는지 고민이 필요한 시기다. 내가 누리는 속도와 편리함이 속된말로 ‘사람을 갈아넣어서’ 만드는 것은 아닌지 따져보자는 얘기다.

느려지고 복잡해지라는 얘기가 아니다. 바쁜 일을 모두 미뤄두고 그냥 놀자는 얘기도 아니다. 기술과 제도와 시스템이 사람의 몫을 합리적으로 대신하며 서로 공존할 방법을 찾자는 얘기다. 내가 누리는 빠른 속도와 편리 이면의, ‘다른 사람’의 근무 환경도 생각할 때다.

leehan@greenpost.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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