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르멘 히요사(Carmen Hijosa) 어내너스 아남 설립자가 파인애플을 들고 있다. (피나텍스 페이스북 캡처) 2020.3.25/그린포스트코리아
카르멘 히요사(Carmen Hijosa) 어내너스 아남(Ananas Anam) 설립자가 파인애플을 들고 있다. (피나텍스 페이스북 캡처) 2020.3.25/그린포스트코리아

[그린포스트코리아 김형수 기자] 비건이 지닌 의미는 동물성 음식을 먹지 않은 ‘먹는 비건’에서 동물성 소재로 만든 옷을 입지 않는 '입는 비건’으로 넓어졌다. 동물성 재료가 들어가지 않은 ‘식물성 고기’가 나온 것처럼 동물성 재료가 쓰이지 않은 ‘식물성 가죽’도 속속 나오고 있다. 동물과 환경을 보호해야 한다는 인식이 널리 퍼지면서 생긴 변화다. 

◇닥나무・파인애플 소재 ‘식물성 가죽’

24일 업계에 따르면 신세계톰보이에서 운영하는 여성복 브랜드 스튜디오 톰보이는 이달 중순 아틀리에 라인을 선보였다. 친환경 소재로 만든 ‘한지(HAUNJI)’ 시리즈 제품도 선보였다. 외투, 셔츠, 반바지, 스커트 등 다양한 제품군으로 이뤄진 한지 시리즈는 한원물산이 5년 연구 끝에 내놓은식물성 가죽을 소재로 제작됐다. 

한원물산이 2014년 선보인 비건 가죽 ‘한지’는 동물의 가죽 대신 닥나무의 인피를 자연섬유와 접목시켜 만든 친환경 식물성 가죽이다. 섬유성분으로 이뤄진 닥나무 껍질로 만든 한지와 목화로 만든 원단을 합하고 실리콘베이스로 코팅해 가죽과 같은 질감을 구현했다. 신세계톰보이 관계자는 “모든 원료가 식물성 소재라 동물성 가죽에 비해 가벼워 착용감이 좋다”면서 “눈으로 보거나 손으로 만져보면 동물성 가죽 못지 않은 질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동물성 가죽과 비교하면 오염도 적다. 닥나무 등을 재배하는 과정에서 비료를 쓰지않을 뿐만 아니라, 동물성 가죽 가공 과정에 쓰이는 화학물질도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가죽을 무두질하는 과정은 약 20개의 단계로 이뤄져있으며, 여기에 필요한 화학물질은 250개에 달한다. 그중에는 6가크롬, 알데하이드, 시안화물, 아연 등 자연은 물론 인간에게도 치명적인 물질도 여럿 포함됐다.

한지를 개발한 한원물산은 한지를 땅에 묻으면 생분해되고, 소각과정에서도 독성물질이 나오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반면 경제성은 동물성 가죽보다 뛰어나다. 신세계톰보이는 동물성 가죽에 비해 한지로 만든 에코 레더는 가격이 1/6~1/4 정도로 낮다고 설명했다. 한원물산이 개발한 식물성 가죽은 의류 외에도 다이어리, 가방, 파우치, 지갑 등 다양한 잡화를 만드는 데도 쓰이고 있다. 

‘한지’가 세상에 나온 2014년 영국 런던에 본사를 둔 '어내너스 아남(Ananas Anam)' 식물성 가죽 ‘피나텍스(Pinatex)’를 내놨다. 피나텍스의 원료는 파인애플 농장에서 재배하면서 나오는 파인애플 잎이다. 피나텍스의 재료로 쓰이기 전까지 파인애플 잎은 버러지거나 소각됐다. 파인애플 잎에서 섬유질을 뽑아내 고무 성질을 없애는 등의 과정을 거치면 섬유질은 직조되지 않은 메쉬 형태를 갖게 된다. 이것이 특별한 공정을 통과하면 가죽같은 모습을 지닌 피나텍스가 완성된다.

파인애플을 키우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파인애플 잎을 원료로 하는만큼 피나텍스 제작에는 파인애플 재배를 위해 필요한 것 이상의 물이나 기타 자원은 필요하지 않다. 섬유질을 뽑아내고 남은 파인애플 잎 부산물은 비료나 바이오연료로 쓰인다. 어디에도 사용되지 않고 버려지는 쓰레기가 없는 셈이다.

피나텍스는 휴고 보스와 폴 스미스의 신발, H&M의 의류 콜렉션 등 다양한 패션 아이템 제작에 쓰이고 있다. 비건 먹거리가 조금씩 대중화되는 길을 걷고 있듯이, 식물성 가죽도 점차 우리의 일상 속에 자리를 잡아가는 모양새다.

◇식물성 가죽을 입으면 세지는 ‘비건 의식’

사람은 생각에 따라 행동한다고 여기기 쉽지만, 때로는 행동이 생각을 바꾸기도 한다. 식물성 소재로 만들어진 의류는 그 옷을 입은 사람의 겉모습뿐만 아니라 머릿속에도 변화를 일으키는 것으로 나타났다. 주변에 비건 패션을 알리는 행동을 하는가하면, 패션이 아닌 다른 분야에서도 비건을 추구하게 되는 모습을 보였다.

모델 겸 방송인 안젤리나 다닐로바가 비건타이거의 옷을 입고 있다. (안젤리나 다닐로바 인스타그램 캡처) 2020.3.25/그린포스트코리아
모델 겸 방송인 안젤리나 다닐로바가 비건타이거의 옷을 입고 있다. (안젤리나 다닐로바 인스타그램 캡처) 2020.3.25/그린포스트코리아

“우선 저는 비건을 알리는 목적을 구매했고, 이런 제품을 입고 사람들이 봐줬으면 좋겠다. 비건을 가시화하자 이런 마음으로 산 게 큰 것 같아요…옳은 행동을 나는 하고 있고 잘 살고 있다는 걸 보여주면서 사람들도 같이 연대할 수 있도록 이끌고 싶어요.” (참여자 H)

“점점 동물성 원재료나 동물실험을 하지 않는 제품을 찾게 되고, 구입하게 되고. 화장품도 그런 브랜드에 관심이 더 가고, 그래서 (그 브랜드에서) 실제로 제품고 구입하게 되고.” (참여자 E)

지난해 8월 발표된 서울대학교 대학원 의류학과 최서연의 석사학위 논문 ‘근거이론을 활용한 비건 패션 소비에 관한 탐색적 연구’에 실린 대목이다. 최서연은 연구 과정에서 비건 패션제품을 2회 이상 구매한 경험이 있는 20대 여성 소비자 10명을 대상으로 면담을 실시했다.  

최서연은 논문에서 “참여자들은 비건 패션을 지인들에게 홍보하는 구전행동이 확인됐으며, 아직까지 우리 사회에서 작은 부분으로 형성하고 있는 비건 패션을 사회 전반으로 확대하기 위해 연대를 형성하고자 하는 모습이 확인됐다”고 분석했다. 이어 “비건 패션 소비를 통해 비건을 추구하는 것이 일상이 돼 비건 정체성이 확립됐으며, 패션 외 영역에서도 비건 소비를 행함으로써 비건 의신이 확대돼 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고 썼다.

◇비건 패션, 소재가 아닌 사회변화 이끄는 트렌드

비건 패션은 스키니진이나 네온 컬러 같은 패션 트렌드와 달리 그 옷을 입는 사람들이 추구하는 사회적 가치가 담겨있다. 서승희 서강대학교 의상학과 교수와 서경아는 지난해 10월 서울 홍익대학교에서 열린 ‘2019 한국패션비즈니스학회 추계학술대회'에서 “비건 패션은 동물권을 바탕으로 종차별주의를 반대하며 국내뿐만아니라 국외에서도 다양한 캠페인과 퍼포먼스 등을 통해 사회 이슈화하며 꾸준히 사회 참여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면서 “윤리적 소비와 지속가능성을 바탕으로 사회 참여적 성격을 강하게 띠며 디자인과 행동주의가 결합해 적극적인 사회 변화를 이끌고 있는 사례로 현대 마이크로 트렌드에서 주류 트렌드로 발전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동물보호 캠페인 '슈퍼 애니멀 퍼' 동영상의 한 장면 (이노션 유튜브 캡처) 2020.3.25/그린포스트코리아
동물보호 캠페인 '슈퍼 애니멀 퍼' 동영상의 한 장면 (이노션 유튜브 캡처) 2020.3.25/그린포스트코리아

식물성 가죽을 사용한 옷을 내놓으며 비건 패션을 선보인 패션업체들이 단순히 비동물성 소재로 옷을 만드는 것으로 그쳐선 안 된다는 주장이 나오는 배경이다. 서승희와 서경아는 옷을 제작하면서 동물성 소재를 기피하는 수준에서 머물러 있는 국내 비건 패션 브랜드들이 한계를 극복하고 적극적으로 사회에 참여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다. 

서승희와 서경아는 “비건 패션의 특성인 윤리성과 지속가능성은 단순히 비동물성 소재의 사용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참여를 통해 다양한 형태로 드러나는 것”이라면서 “향후 한국 시장에서 비선 패션 산업에 대한 접근 방향은 비건 소재가 아닌 비건 패션의 다양한 사회적 참여를 중심으로 이뤄져야 한다”고 했다.

비건 패션 브랜드 비건타이거는 올해 초 현대차그룹 계열 광고회사 이노션과 손잡고 ‘슈퍼 애니멀 퍼’ 동물 보호 캠페인을 시작했다. 인조 모피가 지닌 매력을 돋보이게 함으로써 소비자들의 인식에 변화를 일으키겠다는 취지다. 

캠페인의 일환으로 제작된 동영상에는 뱃속에 바다빛 털을 품고 사는 용인 `천마`, 구름을 닮은 고양이 `색묘림`, 꽃과 새가 결합된 `화화` 등 상상 속 동물(슈퍼 애니멀)들이 나온다. 이노션 관계자는  "유명 일러스트레이터 장콸 등 다양한 분야 크리에이터들과 머리를 맞대고 슈퍼 애니멀들을 창조했다"며 "잔혹하게 사냥하지 않아도 털을 얻을 수 있다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alias@greenpost.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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