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정 결핍 텀블러가 보낸 편지, ‘어차피 그놈이 그놈입니다’
애정 결핍 텀블러가 보낸 편지, ‘어차피 그놈이 그놈입니다’
  • 이한 기자
  • 승인 2020.03.13 1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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텀블러는 환경적이지만, 텀블러 여러개를 돌려쓰는 것은 환경적이지 않을 확률이 높다. 용맹하지만 '애정 결핍'에 걸린 가상의 전사 텀블러와 그 동료(?)들의 사진. 저 텀블러의 주인이 기자인지 아닌지는 프라이버시상 비밀이다. (이한 기자)/그린포스트코리아
텀블러는 환경적이지만, 텀블러 여러개를 돌려쓰는 것은 환경적이지 않을 확률이 높다. 용맹하지만 '애정 결핍'에 걸린 가상의 전사 텀블러와 그 동료(?)들의 사진. 저 텀블러의 주인이 기자인지 아닌지는 프라이버시상 비밀이다. 텀블러 제품의 브랜드 등은 기사 속 특정 내용과 관계없다. (이한 기자)/그린포스트코리아

[그린포스트코리아 이한 기자] 텀블러는 커피와 싸우라는 임무를 받고 이 세상에 파견된 특수부대다. 뜨거운 커피도, 차가운 커피도 모두 이길 수 있으며 힘 세고 체력도 무한대인 ‘일당백’ 용사다. 뜬금없이 무슨 만화 같은 소리냐고? 아래, 텀블러가 보낸 메일을 읽어보자. 가상의 편지지만 내용은 현실이다.

안녕하세요. 나는 텀블러입니다. ‘별다방’에서 태어났어요.

내 생일은 크리스마스입니다. 나를 만든 분들이 산타랑 루돌프 그림을 그려줬어요. 분홍색 바탕에 귀여운 겨울 장식. 나는 태어나자마자 ‘아이고 고놈 참 귀엽네’ 소리를 많이 들었죠. 키도 커서 인기가 많았어요.

귀여운 외모에 속지 마세요. 우리 텀블러 종족의 주특기는 ‘애교’가 아니라 ‘전투’입니다. 힘세고 오래가는 전사들이죠.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참전하신 ‘수통’ 전사가 우리 종족의 시조새입니다. 저는 우리 종족 중에서도 전투력이 특히 강한 ‘스뎅’ 전사에요. 은빛 갑옷을 속옷으로 입고 있는 애들이 제 동료들입니다.

우리는 무슨 전사냐고요? 커피랑도 싸우고 주스랑도 싸워요. 제 키가 큰 이유는 짧은 애들 말고 ‘벤티’한 애들이랑도 싸울 수 있기 위해서입니다. 인간들이 커피랑 싸우는데 물자가 부족하다고 해서 지원을 나왔어요. 귀여운 외모로 전투력을 숨기고, 인간들 몰래 전쟁을 돕는 임무죠.

저는 잠실의 한 별다방 매장으로 배송됐고, 거기서 하루 만에 지금의 주인님을 만났습니다. 나를 데려온 주인님은 패셔니스타는 아니지만 취향이 확고한 분이에요. 저를 처음 봤을 때도 ‘남자는 핑크지’를 외치면서 망설임 없이 신용카드를 꺼내더라고요. 검은색 가죽지갑, 카드지갑도 검정 가죽, 그런데 패션템은 핑크? 명확한 취향에 망설임 없는 지름, 멋있어 보였어요.

신났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스뎅’으로 만들어져서 뜨거운 커피도, 차가운 주스랑도 다 싸워서 이길 수 있거든요. 별다방에 저랑 같이 온 플라스틱 애들은 저보다 약하고 비실비실해요. 얘들도 음료랑 잘 싸워요. 문제는 한번 싸우면 은퇴를 합니다. 그래서 무조건 인해전술, 머릿수로만 밀어붙여요. 무식하죠. 저는 몸값이 비싼 대신 한번 물면 안 놓아요. 커피 녀석들이 하루에 몇 번을 덤벼도 끄떡 없죠. 그렇게 몇 년을 싸워도 이길 자신 있거든요. 핑크색 좋아하는 우리 주인님 덕분에 맨날 커피랑 싸울 수 있을 것 같아서 신났어요. 자, 마음 단단히 먹고, 덤벼라 이 뜨겁고 차가운 커피들아!

◇ 선택받지 못한 자의 슬픔

어제는 주인님이 모처럼 외출하는 날이었어요. 가방에 담겨 잠실에서 종로까지 다녀왔습니다. 오전 내내 정수기 물이랑 싸우고 점심에는 김이 솔솔 나는 라떼랑 한바탕 뜨거운 시간을 보냈어요. 너무 신났어요. 댕댕이들은 산책이 중요한데, 우리는 자주 나가서 뜨겁고 차가운 놈들이랑 한바탕 치고박고 뒹굴러야 신나거든요.

그런데 그거 아세요? 사실 어제의 전투는 한 달 만이었어요. 코로나19 때문에? 아니요, 그것도 있지만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어요. 저는 매장에서 주인님한테 선택 받았지만 집에 오자마자 ‘선택받지 못한 자’가 되거든요. 용맹한 스뎅, 벤티 커피도 무찌르고 산타 장식으로 멋까지 낸 제가 왜 그랬냐고요?

우리 주인은 착하긴 한데요, 지름신과 낭비벽이 심해요. 그래요, 그런 건 참을 수 있어요. 주인이 뭘 지르든 저는 제 할 일만 하면 되니까. 그런데 일거리가 없어요. 우리 집에서는 청년취업난보다 훨씬 치열한 텀블러 사이의 치열한 내전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어이, 이봐요, 인간 주인! 나를 좀 데려가!”하는 전쟁이에요. 왜 커피랑 안싸우고 텀블러랑 싸우냐고요? 우리 집에는 텀블러가 20명도 넘게 살거든요.

‘별다방’에서 온 애, ‘콩다방’에서 온 애, ‘어디야’에서 온 애, 얼마전에 ‘둘이 썸타’에서 온 애도 있고. 며칠 전에는 ‘내안에 천사 있다’에서도 한명이 왔어요. 어제는 주인이 자이언트 펭귄 그려진 텀블러를 인터넷에서 보고 “아, 딱 하나만 더 살까?” 하더라고요. 손만 있으면 당장 날아가서 등짝 스매싱을 날리고 싶었어요. 차마 그러지는 못하고 소리만 질렀죠. “야! 그만 좀 해!” 주인한테 그게 무슨 말버릇이냐고요? 그러면 어떻게 해요. 옛날에는 바다 건너 섬나라에서 벚꽃 텀블러도 데려왔고, 남쪽 섬나라에서 팬더 텀블러도 데려왔거든요. 서랍장이 터질 지경인데 저걸 그냥 놔둬요?

◇ 공들여 태어났고 없애기도 어려운 일당백 전사

질투가 나서 그러는 게 아닙니다. 이제 곧 봄이니까 우리 주인이 산타보다 다른 그림 더 좋아하는 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어요. 봄이면 벚꽃, 여름에는 수박, 가을에는 단풍..그런 그림에 마음 가는 건 이해해요. 그런데 사람들이 나를 만든 이유는 ‘예쁘게 보이라고’가 아니에요. 저는 음료와 싸워 이기라는 목적을 가지고 이 세상에 온 특수부대 요원이란 말입니다.

저를 만드는 분들은 ‘출산의 고통’이 심합니다. 저 하나 만들려면 온실가스가 종이컵의 25배, 플라스틱컵의 15배 정도 나와요. 저는 죽을 때 ‘장례비’도 비싸요. 저를 세상에서 없애려면 종이컵의 12배, 플라스틱컵의 8배나 되는 온실가스가 나오거든요. 굉장하죠?

그런데 왜 굳이 저를 만들었을까요? 이유는 딱 하납니다. 공들여 만들고 없애기도 어려우니까 오래 오래 무병장수 하면서 인류가 마시는 그 많은 음료들을 소화해내라는 임무에요.

주인이 하루에 한 번씩 카페에서 커피를 사먹으면, 한달이 지나야 제가 종이컵보다 온실가스를 덜 뱉어요. 두달, 석달...그렇게 오랫동안 주인 따라 카페에 가야 제 몸값을 한다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제가 분홍색 산타옷 예쁘게 입었다고 주인한테 팔려와서 서랍장에 계속 들어가 있으면 어떻게 될까요? 게다가 저 같은 애가 옆에 또 있고 그 옆에 또 있고? 오 마이 갓! 왓더...?

말 나온 김에 하나만 더 얘기할께요. 이 사람 집에는 커피 원두 찌꺼기로 만든 에코백이 있어요. 귀여운 거북이가 그려져 있는데 보기만 해도 예쁘죠. 주인이 그러더라고요. “동네 편의점 같은데 갈 때 간단하게 들고 다니면 되겠다”라고.

개뿔, 그림은 다른데 모양은 비슷한 에코백이 집에 열 명도 넘어요. 하얀색에 때탄다고 잘 들고 다니지도 않아요. 주인이 그래도 나쁜놈은 아닌게요, 그나마 비닐봉투는 안 써요. 장바구니 들고 다니거든요. 근데 그거 알아요? 장바구니도 7개에요. 이 정도면 정말 병원 가봐야 되는거 아닌가요?

◇ 친환경 제품의 역설, 리바운드 효과를 아시나요?

‘쪼끄만 텀블러가 뭘 안다고 떠들어? 어디 인간한테 감히’ 그런 생각 하는 분들 계시죠? 에이, 그러지 마세요. 저 이래봬도 유식해요. 지금 저 무시한 당신, ‘리바운드 효과’가 뭔지 아세요? 뭐라구요? 농구할 때? 센터가? 아이 참 그 리바운드 말구요. 뭐라는거야 정말.

리바운드 효과는요, 친환경 제품을 구매하는 행위가 오히려 환경에 나쁜 영향을 미치는 현상을 말해요. 사람들이 ‘어~ 환경 중요하잖아’ 라고 이미 알고는 있어서 그런 제품들을 구매는 하는데, 사놓고 효율적으로 쓰지 않아서 결국 환경에 좋은 영향을 못 미치는 걸 뜻해요. 나랑 똑같은 애를 스무명이나 입양해 온 무개념 우리집 주인 녀석처럼 말이에요. 절전형 가전제품을 사는데, 가전제품의 절대적인 숫자가 줄지는 않아서 저기 사용량이 줄어들지 않는것과 비슷한 이치죠.

일회용품 안 쓰는 거 좋아요. 그러니까 나 같은 애를 데려가라고요. 그런데 유행 따지고 외모 따지면서 우리들을 로테이션 돌리고 자주 바꿔쓰면 뭐하러 우리를 데려왔나요?

그거 아세요? 우리 텀블러 특수부대원들은 매년 20%씩 늘어납니다. 친구가 많아서 좋겠다구요? 든든하겠다고요? 까먹지 마세요. 저는 만들기 어렵고 없애기도 힘듭니다. 대신 튼튼하고 오래 간다구요.

우리는 인테리에 소품이나 패션템이 아니에요. 이봐요 인간, 당신도 혹시 오늘 별다방에 가서 나 같은 애들을 고를건가요? 텀블러의 도움으로 커피와 싸우고 싶은 마음이 있다면 응원합니다. 그런데 이미 데리고 있다면 그 녀석을 데리고 나가세요. 어차피 그놈이 다 그놈이에요. 집에 있는 걔도 나만큼 튼튼합니다. 혼자서도 잘해요. 우리 텀블러 종족은 팀전보다 개인전에 강한 ‘독고다이’ 스타일이거든요. 그러니까 지름신은 접어두시고, 서랍장에서 혼자 풀죽어있는 텀블러를 꺼내서 같이 나가보세요. 리바운드 효과, 꼭 기억하시고요. 알겠죠?

 

 

leehan@greenpost.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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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진이 2020-03-13 20:39:31
    생각해 볼 만한 글이네요. 리바운드효과 꼭 기억해야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