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 실패'의 원인은 정치인의 무지와 무능 때문
마스크대란은 국가실패의 상징적 사건
정치인의 이합집산, 퓨전 아닌 '짬뽕'...국가실패의 시발점

 

타인의 목소리로 말하는 정치인의 무지와 무능

아무리 후하게 쳐줘도, 정치인의 언설은 개살구다. 그것들에게 박하디 박한 점수를 줄 수밖에 없는 것은 그 안에 신뢰라곤 없기 때문이다. 뒤집어서 탈탈 털어도 티클만큼도 없는 신뢰의 완벽한 부재가 개살구의 이유다. 손바닥 뒤집듯 말을 바꾸는 것은 절대적으로 당연하고, 자기모순 심지어 자기부정의 언사에도 거리낌이 없다. 오로지 국가와 국민을 위해 봉사하겠노라는 정치인의 다짐(?)은 그래서 개 풀 뜯는 소리와 다르지 않다. 숫제 말도 아니고 막걸리도 아니다. 그러니 정치인에게 조롱이 쏟아지고 모욕이 퍼부어지는 것은 뉴턴의 운동의 법칙과 같은 원리다. 제1법칙이든 제3법칙이든.

문화인류학자 김현경은 그의 책 ‘사람 장소 환대’에서 이렇게 지적했다. 정치인에 대한 조롱은 그의 인격이 아니라 그가 수행하는 공적 역할을 향하고 있으며, 그러므로 그것은 (인간의) 존엄에 대한 공격으로서의 모욕과 구별돼야 한다고. 그렇기에 달걀을 맞거나 허수아비 모양으로 불태워지는 것은 정치인의 ‘얼굴’이 아니라 그가 입은 ‘옷의 역할’이라고 했다. “정치인의 경우, 그의 공적 가면 뒤에 있는 것은 얼굴이라기보다는 목소리들이다. 정치인은 타인의 목소리로 말하는 자인 것이다.(김현경, 같은 책)

김현경이 밝혀낸대로, 정치인은 타인의 목소리로 말하는 자이기에 거짓말과 말바꾸기를 그토록 쉽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완벽한 유체이탈의 경지이기에, 신뢰를 표백한 언설을 거침없이 뿜어낼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정치인이 가면 뒤에서 타인의 목소리로 말하는 이유는 무지와 무능 때문이다. 알지 못함과 능력 없음을 감추고자 하는 것, (그래서 어떻게든 자리를 보존해야 하는 것, 설령 영혼을 파는 한이 있어도 권력의 ‘밥그릇’ 만큼은 빼앗길 수 없는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더불어 없는 더불어, 통합 없는 통합, 정의 없는 정의. 앞은 그들의 가면이고, 뒤는 그들이 내는 타인의 목소리다.

정파적(또는 당파적) 이해관계로부터 자유로운 일반 국민들로서는 정치인의 무지와 무능이 가져올 국가의 실패가 끔찍하다. 말할 것도 없이, 국가의 실패에 따른 고통을 아무런 죄 없는 국민들이 고스란히 짊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언필칭 현실적이며 직접적이고 급박한 고통이다. 정파적 이해관계에 썩은 동아줄이나마 붙잡고 있는 사람들이야 댓글부대로, 도심게릴라 같은 시위대로 ‘활약’하느라 그 고통을 짐짓 모른 척 하며 참아낼 수도 있겠으나, 죄라고는 참정권을 행사한 것 뿐인 보통 사람들은 진저리가 난다. 우리는 왜 이렇게 번번이 국가의 실패를 경험하고 있는가.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

대런 애쓰모글루(MIT 경제학과 교수)와 제임스 A. 로빈슨(하버드대 정치학과 교수)이 함께 쓴 책,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는 이에 대한 일말의 해답을 보여준다. 두 교수는 국가가 실패하는 이유를 제도에서 찾았다. 한 국가의 경제제도가 포용적이냐 착취적이냐에 따라 부유한 국가와 그렇지 않은 국가로 운명이 갈린다는 것이다. 국민 모두를 끌어안는 포용적인 제도가 발전과 번영을 불러오는 원리를 세계 각국의 사례를 통해 증명한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남북한을 보면 된다. 국가가 채택한 체제, 그 체제에 따른 경제제도로 인해 빈부의 운명이 갈린 것으로 치자면 남북한은 가장 으뜸으로 꼽히는 실증사례다. 

두 저자의 통찰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한 나라의 빈부를 결정하는데 경제제도가 핵심적인 역할을 하지만, 그 나라가 어떤 경제제도를 갖게 되는지를 결정하는 것은 정치(제도)다. 결국 정치와 경제제도의 상호작용이 한 나라의 빈부를 가른다고 저자들은 진단한다. 72년전 민주주의와 공산주의로 나뉜 남한과 북한의 체제가 빈부를 결정지은 원초적인 분기점이라면 그 이후 남한에서 전개된 정치경제제도의 변천은 남한의 부의 규모와 부의 질적 수준을 갈랐다. 제도를 만드는 것은 정치이고 정치는 사람이 하는 것이기 때문에 한 나라의 흥망성쇠의 열쇠는 정치인이 쥐고 있는 것이다. 간단하게 정리하자면 정치할 사람 잘 뽑아야(뽑았어야) 한다는 뜻이다.

책에서 두 교수는 정치인의 무지는 국가 실패의 결정적 변인이 아니라고 했다. 제도만 잘 갖춰져 있으면 정치인이 다소 무지하더라도 국가의 번영에 큰 지장이 없다는 분석이다. 하지만 ‘작금의 현실’은 이같은 분석이 보기 좋게 빗나갔음을 보여준다. 한 국가를 이끄는 정치지도자가 국가의 존재 이유에 무지하면 아무리 좋은 제도를 갖추고 있는 국가라도 실패한다. 자신이 왜 정치지도자로 ‘다수의 국민들로부터’ 선택됐는지를 제대로 통찰하지 못하는 정치인은 국가의 운명을 실패의 구렁텅이로 끌고 간다. 이 책에 등장하는 이집트의 사례를 보면 ‘혁명을 일으킨 세력이 반대 세력으로부터 정권을 찬탈한 뒤 유사한 체제를 재창출한 탓’에 이집트의 실패가 반복된다고 했다. 과거 정권을 무너뜨린 혁명이 보통 사람들에게 번영을 가져다 줄 수 있는 제도적 기틀로 이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렇듯 변혁을 통해 정권을 잡은 정치인들이 '다수의 국민들'의 열망에 무지할 때, 국가의 존재이유에 무지할 때 최악의 참사를 낳는다. 구체적인 사안에 대해 무지한 게 차라리 낫다.

받아들이기 어려운 현실, '마스크 하나 살 수 없는 세계11위 경제대국'

이번 코로나19 사태에서 국민들은 대한민국이 마스크 하나 제때 살 수 없는 나라가 된데 절망한다. ‘흔해 빠진’ 마스크 몇 장을 손에 쥐려고 서너 시간씩 장사진을 치고 기다려야 하는 현실이 현실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명색이 OECD 국가이고 세계11위 경제대국이고 제조업으로는 글로벌 넘버원이 즐비한 강국인데, 천 원짜리 한 장이면 언제 어디서든 살 수 있었던 그깟 마스크 때문에 이 난리를 겪다니! ‘마스크 대란’을 비상상황에서 수요와 공급의 원칙에 따라, 즉 경제원리로만 바라보면 안되는 것이 충분히 예측 가능한 수요-공급의 불균형에 대비하지 못한 정부의 인재(人災)이기 때문이다. 지난 1월20일 국내에서 ‘우한폐렴’(코로나19) 첫 환자가 발생했을 때 대규모 확산의 가능성에 대비해 마스크 생산과 유통을 관리했더라면 지금 이런 난리를 겪지 않아도 된다. 국내 일일 생산량 1300만장 가운데 절반만 ‘공적마스크’로 비축했다면 2억~3억장을 창고에 쌓아 뒀을 것이다. 이 정도의 비축물량을 적절하게 공급하면서 일일 생산량을 1000만장 수준으로 유지한다면 “며칠씩 써도 지장 없다”는 어느 ‘올드보이’의 헛소리도 나오지 않았을 터이다. 

이제 와서 그런 얘기를 하는 것은 결과론에 불과하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을 예측하고 대비하는 것이 국가(정부)의 임무다. ‘국가는 주어진 영토 안에서 합법적이고 독점적으로 물리력을 사용할 권리를 인정하는 국가공동체’(막스 베버의 정의)라고 할 때, ‘독점적 물리력 사용 권리’의 전제는 그 권리를 위임해 준 국민들의 안전(생명)을 최우선 해 보호하는 것이다. 그것보다 선순위에 둘 것은 없다. 그래서 대만은 지난 2월4일부터 마스크 수출을 전면 금지하고 사실상 배급에 들어갔다. 그래서 베트남은 ‘박항서아버지’로 한층 가까워진 나라지만 가차 없이 대한민국 국적기의 입항을 잘랐다. 그래서 전세계 1백 곳이 넘는 나라가 대한민국의 입국을 금지 또는 제한한다. 국가 운영의 책임을 지고 있는 정치인들에게 내 나라 내 국민의 안전보다 귀중한 것은 결코 없음을 모든 나라들이 선언하고 있다. (우리가 대만과 베트남을 부러워하게 될 줄은 몰랐다.)

그런데 이 와중에 대한민국 정부는 한가하게 들리는 남북 보건협력을 제안한다. ‘저능한 청와대’라는 김여정의 조롱에 이어 다음날 김정은으로부터 ‘위로 친서’를 받자 남북교류의 청신호가 밝혀졌다고 반색한다. 대한민국 국민들이 각국의 입국제한으로 국제미아신세가 돼 오도가도 못하고 발을 동동 구르는데, 외교부장관은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유엔인권이사회에서 연설을 한다. 우리나라와 인적 물적 교류가 많은 나라들을 찾아다니며 입국제한조치를 늦추거나 막아야 될 국가(정부)의 책임자인데. 국민의 생명과 안전 보다 다른 가치를 우선시하는 것은 무지하고 무능하기 때문이다. 국가의 유지를 위한 공동선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이며, 설령 알고 있더라도 그것을 실현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신천지 교주 이만희처럼 뜬금 없는 ‘박근혜시계’로 이목을 돌리는데 골몰할 뿐이다. 핵심은 교묘하게 비껴가고 우군들을 동원해 곁다리에만 집착하도록 만든다. 그렇게 국가의 실패는 누적되는 중이다.

미국 존스 홉킨스대학교 석좌교수인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저서 ‘강한 국가의 조건’에서 사하라 이남아프리카의 정권들은 일반적으로 ‘신세습주의’라는 특징을 갖는다면서 이를 이렇게 설명했다. 신세습주의란 ‘국가 지도자의 지지자로 구성된 의존적 네트워크의 편익을 위해 정치권력을 사용하는 정권’을 뜻한다고. 그러면서 신세습적 정권은 ‘일반적으로 대통령 집무실을 중심으로 세력이 형성된다’고 지적했다. 후쿠야마 교수는 20세기 마지막 25년 동안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정권들의 특징이라고 했지만, 최근에 많이 본 현상 같지 않은가. 권력을 쥔 정치인의 무지와 무능은 바로 여기, 신세습주의에서 출발한다. 지지자로 구성된 의존적 네트워크, 대통령 집무실 중심, 여기에서는 다수의 국민을 번영하게 할 지혜는 애초부터 폐기된다. 

짜파구리는 새로운 맛의 퓨전, 정치인의 이합집산은 마구잡이 '짬뽕'

짜파구리는 퓨전이다. 사전적으로 ‘서로 다른 두 종류 이상의 것을 섞어 새롭게 만든 것’을 퓨전이라 하니까, 짜파게티(자장면)+너구리(우동)의 조합은 그냥 마구잡이로 뒤섞은 ‘짬뽕’이 아니라 우아하게 ‘퓨전’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 종종 썬 대파와 채끝살을 고명으로 얹었으니 음식으로서의 효용가치는 더욱 상승한다. 영화 속 설정이야, 가진 자들은 짜파게티 하나를 먹어도 다르다는 점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것이지만, 청와대에서 만들어 박장대소하며 먹으나 초등학생들이 모여 낄낄대며 끓여 먹으나, 이미 물오른 유명세를 또 하나의 고명으로 얹어 먹으니 묘한 맛이라고 혀가 먼저 감탄하기는 매한가지다. 짜파구리 뿐 아니라 우리는 음식으로 다양한 실험을 한다. 주로 여러 음식물의 조합을 통한 새로운 맛의 창조를 추구한다. 때로는 아주 이질적인 음식재료인데도 뜻밖에 전혀 새로운 맛으로 태어나기도 한다. 섞어서 새로운 효용가치를 만들어 내는 것, 퓨전의 매력이다.

그럼, 생장에 유용한 유전자를 뽑아 다른 생물체에 삽입하는 유전자변형은 어떤가. 본래 갖고 있지 않던 유전자를 섞어 병충해 등에 강한 새로운 품종을 만들었으니 경제적 관점에서만 본다면 효용가치의 극대화를 꾀한 것이므로 반대할 일이 아니라 할 수 있다. 문제는 이렇게 유전자를 뒤섞어 새롭게 개발한 작물이 전적으로 인간 또는 동물에게, 생태계 전체에 이롭기만 한 것이냐는 점이다. 이런 작물들이 예기치 않은 독성을 드러내 인체에 해를 끼칠 수 있기에 우리는 경계심을 늦추지 않고 있다. 특히 인간이 GMO(유전자변형작물) 생산을 위해 동식물 뿐 아니라 박테리아, 바이러스 등을 활용하는 반작용으로 바이러스 역시 생존을 위해 끊임없이 변이한다는 점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은 지구온난화 등으로 농업생산량이 급감할 것에 대비해 작물들의 유전자변형을 계속 시도하고, 바이러스 또한 살 궁리를 찾아 쉬지 않고 변종을 만들어내는 굴레에 갇혀 있는 셈이다. ‘기-승-전-기(후변화)’ 하자면 우리가 기후변화의 시계를 늦추기 위해 대오각성에 이은 비상행동에 나서지 않는 한 코로나19 같은 바이러스는 수시로 우리의 호흡을 위협할 터이다.  

정치인들의 이합집산은 어떤가. 그들의 그것은 다른 종류의 것을 섞어 새롭게 만드는 것이 아니므로, 우선 퓨전이 아니다. 유용한 유전자를 뽑아내 새로운 품종으로 재탄생하는 것이 아니므로 유전자변형 또한 아니다. 표에 따라, 이권에 따라, 정파의 머릿수에 따라 마구잡이로 뒤섞이니 그냥 짬뽕이다. 세계 11위 경제대국에서 마스크대란을 야기한 정치의 무지와 무능은 바로 여기에서 잉태된다. 국민의 안녕 보다는 정파적 편익에 모든 것을 걸고 뭉쳤다 흩어졌다를 반복한다. 결국 ‘비례대표당’이라는 꼼수로 한몸이 된 그들, ‘봉담멘더링’을 합의하고선 뻔뻔스럽게 기념촬영하는 그들, 바로 그들이 국가 운명의 키를 쥐고 있다는게 절망스럽다. 환경하는 한 사람으로서, 그런 그들에게 기후변화를 기후위기라고 외치는 것은 우이독경(牛耳讀經) 일 뿐이다. 대한민국 정부의 실패가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실패로 누적될까 두려움에 열이 오르고 몸이 떨린다. (2020.3.8)

 

사족. 정치인, 정치가라는 단어만 있고 ‘정치자(者)’는 왜 없나? 이 대목에서 더 열이 오른다.

(※칼럼에서 쓴 짬뽕이라는 단어는 음식물 짬뽕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마구잡이로 뒤섞었다는 의미일 뿐이라는 점을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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