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판지 박스...일회용품 아니니까 마구 써도 괜찮을까?
대형 마트서 연간 1억 5천만개 발생, 하루 수천억원 규모 택배도
재활용과 재사용 쉽지만, 너무 많이 생산되는 것은 문제
꼼꼼한 분리배출 넘어, 박스 사용 줄이기 노력도 절실

요즘 재택근무를 권하는 기업이 많습니다. 기자도 개인 위생에 신경쓰기 위해 며칠간 집에서 근무하기로 했습니다. 하루 종일 집에만 있어보니 평소 눈에 잘 띄지 않던 ‘생활 속 환경 요소’들이 보입니다.

나와 가족들이 집에서 하루 종일 먹고 쓰고 입고 버리는 것들은 우리 환경에 어떤 영향들을 미칠까요. ‘쓰레기 없이 살기’가 버리는 것을 최대한 줄여보자는 기자들의 ‘미션 임파서블’한 노력이라면, 이 칼럼은 집에서 가족들이 당장 실천할 수 있는 게 뭔지, 제도와 시스템이 마련되어야 할 부분은 무엇인지, 제도적인 뒷받침과 아울러 내가 지금 당장 해야 할 숙제는 뭔지 한번 더 짚어보는 기사입니다. [편집자 주] 

경기도의 한 대형마트 자율포장대 근처에 쌓여있는 박스 더미 모습. 만약에 이 박스더미를 모두 분리배출하면 재활용이 잘 이뤄질까? 그러려면 테이프를 모두 깨끗하게 제거해야 한다. 사진은 기사 이해를 돕기 위한 이미지로, 사진 속 매장과 박스 브랜드 등은 기사 속 특정 내용과 관계없음 (이한 기자)/그린포스트코리아
경기도의 한 대형마트 자율포장대에 쌓여있는 박스 더미 모습. 골판지 박스는 재활용과 재사용이 비교적 쉽지만 너무 많이 만들어진다는 문제에 대해서는 따져봐야 한다. 게다가 박스라고 다 같은 박스가 아니다. 사진은 기사 이해를 돕기 위한 이미지로, 사진 속 매장과 박스 브랜드 등은 기사 속 특정 내용과 관계없음 (이한 기자)/그린포스트코리아
 

[그린포스트코리아 이한 기자] 예전에 살던 집은 목요일, 작년에 이사온 집은 월,수,금 재활용품을 배출한다. 오늘(금요일)도 1층에 재활용 쓰레기를 내놓는 날이다. 외출을 가급적 자제하고 필요한 물건들은 주로 택배로 시켰기 때문인지 크고작은 박스가 여기저기 쌓여있다. 택배송장과 테이프를 뜯어내고 차곡차곡 내다놓아야겠다.

박스를 보면 옛날 생각이 난다. 기자의 첫 직장은 ‘비디오 잡지’였다. Z세대들은 기억이 잘 안나겠지만, 2000년대 초반까지는 동네마다 비디오 대여점이 남아있었다. 대여점에 가면 이달에 무슨 비디오가 나왔는지 모아서 보여주는 얇은 책이 쌓여 있었다. 가게 곳곳에는 큼직한 영화(가 아니라 비디오)포스터도 붙어 있었다. 당시 기자는 그 잡지와 포스터를 만들었다.

취재하고 기사 쓰는 게 본업이지만 한 달에 한 번 인쇄소에도 갔다. 큰 대여점에서는 책을 많이 주문하고, 작은 가게는 소량으로 주문했다. ‘이달 발주 30만권, 박스당 500개씩 600박스’ 이렇게 주문하면 편할텐데 사정이 그러지 못했다. 어떤 대리점은 100권짜리 1박스, 다른 대리점은 250권짜리 1박스, 또 어떤 대리점은 500권짜리 2박스가 필요했다. 그걸 일일이 확인하고 구분해 숫자를 맞춰 박스에 담아야 했다. 인쇄소 직원이나 유통 담당 직원이 그 일을 하면 좋았겠지만, 영세한 잡지사였던 그 곳에서는 물량 확인과 박스 포장을 기자가 직접 했다.

◇ 플라스틱, 비닐 아니니까 마구 써도 괜찮았을까?

책을 100권 단위로 묶어 노란색 노끈을 감은 다음 커다란 박스에 차곡차곡 넣었다. 책을 꽉 채우면 너무 무거워 들기가 어려운데, 박스를 쌓을 때는 각이 잘 잡혀 좋았다. 반대로 책이 조금만 담기면 옮길 때는 가벼워서 편한데, 쌓아놓으면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찌그러져 불편했다. 무거운 박스만 무조건 아래 두고 가벼운 박스는 전부 위로 올릴 수도 없었다. 빨리 배송되는 물건이 위에, 나중에 배송되는 물건이 아래 쌓여야 했다. 가까운 대리점이 조금 주문하고 먼 대리점은 많이 주문하는 즐거운 기적 같은 건 일어나지 않았다. 대리점별 주문량에 따라 때로는 허리가 아프고 때로는 머리가 아팠다. 둘 다 아픈 날이면 마음 속으로 사직서를 열 번쯤 쓰고 지웠다. 

인쇄와 박스 포장은 밤을 꼬박 넘겼다. 주문이 많거나 인쇄기에 종이가 자주 걸려 작업이 더뎌지는 달에는 2박 3일 동안 구로공단(현재 구로디지털단지) 지하에서 종이가루와 씨름했다. 그 시절 기자에게는 52시간 근무제나 야근수당 같은 것은 없었다. 인쇄소 직원들은 주간조와 야간조로 나뉘어 있었으나 잡지사에서 하루 일하러 온 우리는 그냥 전원 투입이었다.

새벽 2시는 야간조의 점심시간이었다. 야간조 아줌마가 목살 두툼하게 넣은 김치찌개를 끓여 머슴밥 한 대접을 퍼줬다. 구내식당이 따로 있는 게 아니어서 인쇄기 옆에 아무렇게나 주저 앉아 밥을 먹었다. 바닥이 차면 조립하지 않은 새 박스를 방석과 식탁보 삼아 깔고 앉았다. 두툼한 박스는 한기를 완벽하게 차단했다.

포장 박스가 부족할까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책을 포장하다 박스가 부족한 것 보다는 남아서 버리는 게 더 효율적(?)이었으므로 박스는 늘 넉넉하게 주문했다. 회사 총무과장님은 “박스 모자르면 안되니까 많이 주문할게. 그거 안 비싸”라고 말했다. 그 얘기를 들어서일까. 밤을 꼬박 새워 책을 포장하다 문득 ‘내가 지금 왜 이러고 있나’ 싶을때면 새 박스 하나를 꺼내 흠씬 두들겨 패고 찢고 부수면서 화를 달랜 적도 있다.

밥먹을 때 두겹씩 깔고 이래저래 버리는 게 나와도 박스는 매달 수십장씩 남았다. 포장과 발송이 모두 끝나면 인쇄소 사장님에게 “그냥 버려주세요” 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퇴근하던 생각이 난다. 박스가 아깝거나 재사용을 어떻게 하는지는 관심 없었고, 그냥 얼른 집에 가서 푹 자고 싶었다. 철없던 25살 시절 얘기다.

◇ 대형 마트서 연간 1억 5천만개, 매일 2560억원 규모 온라인쇼핑 결제

이런 생각을 해 본다. 그 박스는 모두 어디서 와서 무엇이 되어 어디로 갔을까. 커다란 트럭 두 대 반 분량, 혹시라도 책이 빠질까 걱정돼 테이프를 두겹 세겹씩 발랐던 골판지 박스 천여개다. 이튿날 아침 대리점에서 곧바로 개봉되어 버려졌거나. 제 몫을 해내지 못하고 김치찌개 받침으로 쓰였거나, 그마저도 쓰이지 못하고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한 박스들.

그런 박스가 지금 기자집에도 여러개 있다. 옆집에도, 윗집에도 있을거다. 환경부에 따르면 지난 2018년 기준 이마트·롯데마트·홈플러스 등 대형마트 3곳에서만 400g 박스가 8900만개, 500g 박스가 7100만개 발생했다. 1억 5천만개다.

한국은행이 5일 발표한 '2019년 중 지급결제동향'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온라인쇼핑 등 전자상거래에서 하루 평균 신용카드 결제액이 2560억원이다. 종합소매(2천240억원)보다 더 많다. 이 규모의 상품이 대부분 박스에 담겨 지금도 어디론가 배송되고 있다는 얘기다.

사람들은 박스를 쓰는데 거리낌이 없다. 과거의 기자도 그랬고 지금도 박스를 버릴때는 마음의 부담이 적다. 종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서울 송파구에 거주하는 주부 임모씨(39)는 “테이프와 택배 송장만 제거하면 재활용이 가능하니까 플라스틱이나 비닐을 버릴때보다 마음이 편하다”고 말했다. 임씨는 “기본적으로 박스를 많이 쓰는 것 같다고는 생각하지만, 포장과 배송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발생하는 부분이고 골판지 종이로 제작된 박스라면 괜찮은 것 같다”고 말했다. 

차곡차곡 쌓여 재사용을 기다리는 박스들의 모습. 사진 속 박스의 제품이나 기업명 등은 기사 속 특정 내용과 관계 없음(이한 기자)/그린포스트코리아
차곡차곡 쌓여 재사용을 기다리는 박스들의 모습. 사진 속 박스의 제품이나 기업명 등은 기사 속 특정 내용과 관계 없음(이한 기자)/그린포스트코리아

◇ 재활용과 재사용 쉽지만, 너무 많이 생산되는 것은 문제
 
기자가 보기에는 박스 역시 문제가 있다. 환경 오염과 기후변화의 ‘주범’ 취급을 받을 필요는 없다. 그러니까 ‘박스만’ 문제인 것은 아니지만 ‘박스도’ 일부 문제가 있다는 얘기다.

박스는 종이다. 재활용이나 재사용이 비교적 쉽다. 그러나 종이를 만드는데도 탄소는 필요하고 인류는 이미 너무 많은 종이를 생산하고 있다. 사람들이 사용하는 박스를 모두 플라스틱으로 대체하는 건 안될 말이지만. 일회용으로 쓰이는 많은 박스들을 일부 다회용 등으로 전환해야 할 숙제는 있다. 종이박스는 재활용이 가능하지만 포장을 위해 사용한 자재들이 재활용을 어렵게 만든다는 점, 그리고 집에 박스가 도착한 순간 현실적으로 처치하기 귀찮은 대상이 된다는 점도 문제다.

환경부와 한국환경공단이 쓰레기 분리배출 방법을 알려주기 위해 만든 어플 ‘내 손안의 분리배출’에 따르면, 골판지 상자 등 상자류는 비닐코팅 부분과 테이프 등은 물론이고 일부 모서리에 사용된 철핀 등을 모두 제거해서 배출해야 한다. 상자 모양대로 접힌 상태가 아니라 모두 펴서 압착한 다음 운반이 쉽도록 묶어서 배출해야 한다.

평소 택배를 자주 사용하는 직장인 이모씨(44세)는 “크고 작은 박스가 여러 개 집에 쌓이면 솔직히 처치곤란인 경우가 많다”고 했다. 이씨는 “크기가 제각각이라 한 공간에 쌓아두기도 어렵고, 일일이 펴서 차곡차곡 개어놓으려고 해도 솔직히 집안에 먼지가 날려서 꺼려진다”고 했다. 이씨는 “포장과 배송 과정에서 여러 사람의 손을 거친 물건이라, 요즘 같은 시기에는 박스를 적극적으로 만지는 것도 솔직히 좀 찝찝하다”고 덧붙였다. 

이와 더불어 중국의 폐지 수입 축소로 국제 폐지가격이 하락한 것, 종이 상자 등의 재활용 과정에서 상당 부분의 비중을 차지하는 폐지 수집 어르신들의 열악한 노동 환경 등도 따져볼 문제다.

◇ 박스 줄이기에 나선 기업, 골판지 박스 업사이클링 사회적 기업도

유통업체와 대기업 등에서도 이 문제 해결을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삼성전자가 지난 1월, 내부 완충재와 외부 포장재를 하나로 결합해 재사용 포장박스에 대한 특허를 출원했고 최근 자원선순환프로젝트 계획을 발표한 롯데는 올해 설 굴비 선물세트에 특허 기술이 접목된 종이 골심지 등 내외부에 모두 100% 재활용이 가능한 종이 포장재를 사용했고 재활용 종이로 만든 방수 기능이 있는 가방에 담았다.

CJ ENM 오쇼핑부문은 지난해 11월 환경부에서 추진한 '재사용 순환택배포장 적용성 평가'에 참여했다. 택배 포장재 재사용의 적정성을 다각도로 평가하는 프로젝트다. 한국 P&G는 최근 11번가를 통해 자사 상품 2개 이상을 묶음배송으로 구매하는 소비자 1만명에게 배송비 금액에 해당하는 '슈가랩 친환경 지퍼백'을 사은품으로 제공한바 있다. 슈가랩 지퍼백은 사탕수수 당밀에서 유래된 식물성 바이오 플라스틱으로 제작된 환경친화 제품이다.

올해 초 대형마트 자율포장대 규제가 이슈로 떠올랐을 때도, 논란의 중심은 포장끈과 테이프였지만 일각에서는 종이상자 재사용 관련 논의도 더 폭넓게 이뤄져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된 바 있다.

박스 등 폐지를 상대적으로 비싼 가격에 매입해 적극적으로 업사이클링하는 사회적기업도 생겼다. 어르신들에게 폐박스를 시세보다 비싼 가격에 구입해 페이퍼 캔버스 작품을 만들었다. 폐박스를 가로 23cm, 세로 15cm 크기로 재단을 해 겹겹이 쌓은 후 헝겊으로 뒤집어씌워 캔버스를 만들고, 재능기부 작가들이 그림을 그려 캔버스 아트로 만든다. 그 작품을 정기구독자 등에게 판매하고 수익은 다시 어르신을 위한 지원금으로 사용하는 형태다. 해당 업체는 최근 언론 등에 자주 소개되며 주목을 받았다.

환경부와 한국환경공단이 쓰레기 분리배출 방법을 알려주기 위해 만든 앱 ‘내 손안의 분리배출’에 따르면, 골판지 상자 등 상자류는 비닐코팅 부분과 테이프 등은 물론이고 일부 모서리에 사용된 철핀 등을 모두 제거해서 배출해야 한다. (앱 화면 캡쳐)/그린포스트코리아
환경부와 한국환경공단이 쓰레기 분리배출 방법을 알려주기 위해 만든 앱 ‘내 손안의 분리배출’에 따르면, 골판지 상자 등 상자류는 비닐코팅 부분과 테이프 등은 물론이고 일부 모서리에 사용된 철핀 등을 모두 제거해서 배출해야 한다. (앱 화면 캡쳐)/그린포스트코리아

◇ 소비자의 숙제, 좋은 박스·나쁜 박스·이상한 박스 꼼꼼 구분

골판지 상자는 비교적 재활용이 잘 된다. 분리수거가 꼼꼼하게 이뤄지지 않아 여러 가지 종이가 마구 뒤섞이는 상황에서도 상자류는 재활용 가치가 더 높다. 하지만 그 부분을 감안해도 사용을 줄이거나 배출시 주의를 더 기울일 필요가 있다.

종이로 만들어진 라면상자가 35리터다. 박스 덮개를 닫지 않고 세우면 55리터 정도가 담긴다. 이론상 56리터짜리 대형 장바구니를 사용하면 그만큼을 담을 수 있다. 넓적한 모양의 큰 상품을 담으려면 종이상자가 더 편리하지만 무거운 물건을 옮길 때는 손잡이 달린 장바구니가 더 편리할 수 있다.

모든 박스가 다 재활용이 쉬운 건 아니다. 흔히 생각하는 누런 골판지 상자는 괜찮지만, 비닐 코팅이나 방수코팅이 되어 재활용이 안 되는 경우도 있다. 테이프가 붙어 있지 않더라도 이런 경우를 잘 살펴야 한다. (재활용이 잘 되는) 좋은 박스인지, 그렇지 않은 상자인지를 꼼꼼하게 살펴봐야 한다는 의미다. 묶음 배송을 활용하거나 박스 대신 종이백, 또는 다회용 박스에 담겨 배송되는 상품을 찾아보는 것도 박스를 줄이는 방법 중 하나다.

이와 더불어 상자를 버릴때는 이물질을 꼼꼼히 제거해서 모두 펴고, 철심 등이 박혀있지 않은지 확인해야 한다. 물론 그 과정에서 먼지가 날리고 옷에는 상자 부스러기가 달라붙겠지만, 그만큼의 불편도 감수하지 않는 것은 환경에 대한 유죄다.

leehan@greenpost.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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