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건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정체성 강조하다 사회로부터 분리될 가능성도  

 
버거킹이 선보인 비건 햄버거 '임파서블 와퍼' (버거킹 페이스북 캡처) 2020.3.5/그린포스트코리아
버거킹이 선보인 비건 햄버거 '임파서블 와퍼' (버거킹 페이스북 캡처) 2020.3.5/그린포스트코리아

 

[그린포스트코리아 김형수 기자] 어느샌가 비건은 우리의 일상 가까이로 성큼 다가왔다. 비건 메뉴를 찾아 멀리 떨어진 식당에 갈 이유도 조금씩 사라지고 있다. 패스트푸드 업체들이 속속 비건 메뉴를 선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패스트푸드점에서 출시한 메건 메뉴는 비건(Vegan), 나아가 비거니즘(Veganism)은 무엇인가를 둘러싼 논쟁이 촉발된 지점이기도 하다. 

5일 업계에 따르면 피자헛은 지난해 연말 식물성 재료로 만든 소시지 인코그미토(Incogmeato)를 토핑한 ‘가든 스페셜티 피자’를 선보였다. KFC는 올해 초 닭고기 필레 대신 큐오른 필레(Quorn™ fillet)를 넣은 ‘오리지널 레시피 비건 버거’를 내놨다. 맥도날드도 지난해 9월 독일에서 ‘빅 비건’을 출시한 데 이어 올해 1월 말에는 호주에서 ‘맥베지버거’를 내놓는 등 비건 메뉴를 속속 메뉴 목록에 추가하는 중이다. 국내에서는 롯데리아가 지난달 중순 식물성 패티를 넣은 ‘미라클버거’를 내놨다. 

유명한 패스트푸드 체인들의 연이은 비건 메뉴 출시 러시는 비건이 무엇인지에 대한 논란으로 이어졌다. 비건이 고기를 먹지 않고 야채를 먹는 식습관을 의미하는 데서 나아가 한 사람이 지닌 삶의 철학이나 신념을 뜻하는 용어로 그 개념이 넓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올해 초  영국 고용법원(Employement Tribunal)은 조르디 카사밋자나(Jordi Casamitjana)가 제기한 소송에서 ‘윤리적 비건’을 법에 따라 차별로부터 보호받아야 할 정치적 신념이라는 판결을 내리기도 했다. 비건(Vegan)이 뒤에 사상이나 주의 따위를 뜻하는 접미사(ism)을 붙이고 비거니즘(Venaism)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것이다. 

비건소사이어티는 “동물을 음식, 의류를 얻거나 다른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가하는 모든 형태의 착취와 학대를 가능하고 실행할 수 있는 만큼 최대한 배제하려는 삶의 방식이자 철학”이라고 비거니즘을 정의한다. 이어 “여기서 확장하면 동물, 인간, 환경을 위해 동물을 이용하지 않고 만든 대체품이나 대안의 사용을 홍보하고 개발하는 행위”라고 덧붙인다.

입장이 갈리는 지점은 실천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최대한 동물을 착취와 배제한다는 비거니즘의 정신을 현실에서 어떻게 구현하는가다. 비거니즘의 정체성을 강조하는 이들은 패스트푸드 업체에서 판매하는 비건 메뉴에 부정적 입장을 나타낸다. 지난해 11월 버거킹을 미국 법원에 고소한 필립 윌리엄스(Phillip Williams)의 행동은 이들의 생각을 잘 보여준다.

영국의 저널리스트 차스 뉴키-버든(Chas Newkey-Burden) (차스 뉴키-버든 페이북 캡처) 2020.3.5/그린포스트코리아
영국의 저널리스트 차스 뉴키-버든(Chas Newkey-Burden) (차스 뉴키-버든 페이북 캡처) 2020.3.5/그린포스트코리아

필립 윌리엄스는 버거킹이 비건 패티를 고기 패티와 같은 그릴에 구워 비건 패티에 동물성 기름이나 부산물 등이 묻을 가능성에 노출시켰으며, 이는 비건 메뉴 ‘임파서블 와퍼’를 오염시킨 행위라고 주장했다. 그는 이어 “버거킹은 ‘임파서블 와퍼’가 고기와 함께 조리된다는 사실을 제대로 알리지 않았다”며 “만약 알았다면 주문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차스 뉴키-버든(Chas Newkey-Burden)은 지난해 연말 메트로에 기고한 ‘패스트푸드 체인에서 식사를 하면서 비건이 될 수는 없다’는 글에서 “비건은 거대 체인업체에서 식물성 제품을 사면서 세상을 바꾸지 않는다”면서 “그들은 단지 동물 도살자들을 더 부유하게 만들어 줄 뿐이다”라고 입장을 피력했다. 

또 차스 뉴키-버든는 패스트푸드 업체에서 비건 메뉴를 먹는 사람들의 정체성에 의문을 나타냈다. “비거니즘은 갈수록 트렌디해지면서, 트렌드를 따라잡기 위해서나 소비문화를 향유하는 한 방식으로 비건 행세를 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의심한다”면서 “만약 당신이 그 가운데 하나이고 그러길 원한다면 맥도날드에서 비건 메뉴를 먹어라”라고 했다.
 
5살부터 27살까지는 비건으로 살다가 이후에는 플레시테리언이 됐다는 데이비드 힐러(David Hiller)는 지난달 말 리파이너리29(Refinery29)에 실린 기사에서 비건들이 보이는 이같은 태도가 적절하지 않다는 비건 소사이어티의 의견을 전했다.
 
비건 소사이어티는 “조르디 카사밋자나 판례는 비거니즘에 두 단계(Tier)가 생겼다고 받아들여선 안 된다”고 지적했다. 이어 “영국 인구의 99%가 비건이 아닌 상황에서 비건들이 최선의 실천 방법을 구상하고 사람들에게 영감을 줄 수 있는 모델을 세우는 대신 이런 주장을 내놓은 것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정체성을 중시하다 대중으로부터 멀어지는 상황을 경계한 것이다. 이는 비거니즘만 지닌 위험이 아니다. 사회의 진보를 추구하는 여러 운동은 완론(온건파)와 준론(강경파)의 대립에 빠질 가능성이 높고, 내부적으로는 빠른 변화를 외치는 준론에 힘이 실리는 경우가 많은 까닭이다. 

컬럼비아대학교 인문학 교수 마크 릴라는 저서 ‘더 나은 진보를 상상하라’에서 “돈키호테적 특징들을 가진 그들은 타협을 통해 오염되지 않는 것과 한낱 이익 거래를 초월하는 것을 자기 핵심 이미지로 삼는다”고 지적한다. 

또 마크릴라는“운동 정치에서 작동하는 힘들은 모두 원심력이다. 그 힘들은 점점 더 작은 파벌들로의 분열을 유도한다. 단일한 사안에 강박적으로 매달리고 이데올로기적 우월성을 엄숙하게 내세우는 파벌들로의 분열을 말이다”라고 강조한다. 마크 릴라가 한 이 주장은 정치 영역에서의 진보주의 운동가들을 향하고 있지만, 비건소사이어티가 밝힌 입장과 상당 부분 겹친다. 

레이건주의를 시민 사이의 연대를 줄이고 사람들을 파편화시키는 것이라고 해석한 마크 릴라는 그래서 “정체성은 좌파의 미래가 아니다. 정체성은 좌파의 레이건주의다”라고 일갈한다. 비인간 동물들이 착취와 고통으로부터 해방되는 날을 꿈꾸며 비건을 지향하고, 비거니즘을 확산시키려 애쓰는 이들이 귀기울여 들을 가치가 있는 대목이다.

alias@greenpost.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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