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코로나19가 만든 사회적 현상이지만 온 가족이 저녁을 함께 먹는 일이 잦아졌다.

직장인들이 회식을 피하고 야근이 아닌 한 귀가를 서두르기 때문이다. 우리집도 다르지 않았다.

24일 월요일 오후 좀 늦은 시간, 식탁에 둘러 앉은 네 가족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저녁을 먹었다.

식사를 한 후 사과 한 조각을 입에 물 때 였나, 큰 딸아이가 말문을 여는 순간 '일상'은 갑자기 '비상'으로 바뀌었다.

"아빠! 같이 근무하는 학부생 근로장학생이 문제가 생겼어요"

"뭔 소리나?"

"지난 8일인가 청도대남병원에 가 링거를 맞았다나 봐요. 대구 친구인데 외가가 그쪽이라네요"

아내와 작은 딸아이의 눈이 커졌고 '차분하자'고 되뇌이며 다시 물었다.

"그래서?"

"별 일도 없기도 하고 어찌어찌 지내다 혹시 해 그저껜가 보건소에 연락했었대요. 처음엔 알았다 그랬는데 오늘 다시 연락와 검사받으러 갔대요"

머릿속은 갈수록 하얘졌다.

"그걸로 끝이야?"

"내일 대학원 사무실 폐쇄하고 전체 방역한대요. 양성이나 음성 판정 나올 때까지 집에 대기하라네요. 내일밤에는 나온대요"

"작은 딸! 너네 사무실 24시간 상황실 가동한다고 했지? 상황 전파하고 팀장한테도 연락해라"

어떠한 상황에서도 침착하라고 교육받고 가르치기도 했지만 말처럼 쉽지 않았다.

'음성이라면 모르되 양성이라면 이게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되는 것인가'라는 의문으로 다시 한번 머릿속은 구겨진 종잇장이 됐다.

"아빠! 연락했구요 그리구 우리 회사는 내일부터 전 직원 재택근무라는데"라는 작은 애 목소리가 들린 건 밤 10시 쯤이었다. 

 

 

 

O..."당신은 어떻게 해요?"

초등교사라 봄방학중이던 아내가 걱정스럽게 물었지만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상황이 명확히 전개된 것도 아니었고 일단 사무실에 나가 대면 보고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25일 화요일, 매일 아침 갖는 조간 신문 독회가 끝난 뒤 "별 일 아니겠지만..."이란 단서를 괜히 붙여 가며 사정을 설명했다.

대표를 비롯한 회의 참석자들의 얼굴이 일순 굳어졌고 짧은 침묵이 흘렀다.

하긴 지금같은 상황에서 안 그럴 사람은 그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역지사지 아닌가.

"일단 귀가하시고..."라는 완곡한 지시에 따라 자료 몇 개와 용품 몇 가지를 챙겼다.

만에 하나라고 하지만 판정에 따라서는 어쩌면 복귀에 보름이 걸릴 수도, 또 어쩌면 한 달이 걸릴 수도 있는 문제였던 때문이다. 

내 탓이네, 네 탓이네를 논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었고 불필요한 일이었다.

집에 들어가 점심을 가족이 먹는데 그렇게 아무도 말 한마디 없이 밥을 먹은 기억은 없었지 싶다.

삼부녀는 각자의 컴퓨터를 켜고 그렇게 재택근무에 들어갔다.

익숙한 사무실 컴퓨터와 달리 외려 집의 그것은 우선 자판도 하여간 다르고 사양까지 달라 문서 작업에 애를 많이 먹었다.

잘 기억도 나지 않는 기사를 몇 건 정리하고 담배도 피고 했다.

일체유심조라 했다. 그런데 집에 있는데 왜 그렇게 마치 옥살이를 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는지 모르겠다.

가는 듯, 가지 않는 듯 시간은 흘렀고 또 저녁을 먹었고 온 신경은 큰 아이의 문자메시지에만 쏠렸다.

아내는 가끔 보는 TV드라마도 웬 일이지 안 봤다. 볼 기분도 아니었을 것이다.

가족간의 그런 적막감이 너무 싫었고 불편했다. 죄인도 아닌 내가, 우리 가족이 죄인 취급 받을 수도 있다는 공포감이 거칠게 들이닥쳤다.

25일 밤 11시쯤 "아빠!" 하는 큰 아이의 소리가 들렸다.

"그래"

"내일 낮에나 나온다네요" 

내 입에서는 쌍욕이 튀어나왔다.

 

 

O...26일 수요일 새벽 악몽을 꾸었다.

저승에 가서도 잊지 못할 매 타작의 기억이 고스란히 재현됐다.

1980년 10월 어느 날 해안경계부대 소초에서 분대장이던 나는 주간 상황업무에 투입중이었다.

중대본부의 잘 알던 친구가 고맙게도 전화를 주었다. 중대장이 오토바이 타고 갔는데 그 쪽 방향이니 조심하라는 내용이었다.

재빨리 주간 경계 초소에 연락을 넣었지만 두 초병은 전화기를 무음으로 돌려놓은 채 도색 잡지에 심취했던 모양이다.

둘을 거의 반병신이 되게 두들겨 팬 중대장은 소초로 오더니 소대장에게 착탄된 소총을 주면서 이렇게 소리쳤다.

"이 XX 도망가면 그냥 갈겨버려! 이건 명령이다"

소대장도, 선임하사도 어쩔 방법이 없었고 공병 곡괭이 자루, 돌역기 가운데 있는 쇠파이프 등으로 정말 수십대를 맞았다.

엉덩이와 다리는 죄 피멍이 들었고 안티푸라민을 하도 여러 통 바르다보니 내무반은 특유의 냄새로 진동을 했다.

그런 와중에도 허리를 맞으면 병신된다는 무서운 생각이 들었던 기억은 지금도 분명하다. 

꿈이 깨자마자 왜 하필 지금같은 때 이런 꿈이 하는 탄식이 절로 나왔다.

내 팔자에는 직접 잘못하지는 않았지만 뭔가 잘못된다는 무슨 살이 끼었나 등등 별별 생각이 돌아다녔다.

그렇게 밥맛도 없지만 한 술 뜨고 컴퓨터앞에 앉아 있다 잠이 들었던 듯 하다.

꿈인지 생시인지도 아리까리한 상태에서 큰 아이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아빠! 음성이래"   오전 11시 50분이었다. 왠지 모르지만 눈물이 났다.

지금 그야말로 고생하시는 분들에 비하면 정말 아무 것도 아닌 이야기를 주저리 쓴 것은 달리 노고를 위로할 방법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친구가 양성으로 나왔다면 아마 이런 글을 쓰겠다는 엄두도 내지 못했을 것은 분명하다.

아무도 짐작하지 못했던 질병으로 고초를 겪고 있는 많은 분들께 위로를 전하면서 특별히 의료진에 대해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깊은 경의를 표한다.

     [그린포스트코리아 양승현 편집위원]

yangsangsa@greenpost.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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