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포스트코리아 이승리 기자] 살다보면 ‘이성’은 끓는점 100℃를 즐겨 넘었고, 그때마다 ‘감정’을 불러왔다. 그래서 생각했다. 그 어떤 순간에도 담담할 수 있었으면 좋겠노라고. 그래서 처음부터 그렇지는 못했지만, 지금은 투자를 할 때 내 나름대로 원칙을 세웠다. 어떤 숫자를 보더라도 담담했으면 한다고.

특정 계층의 전유물이라고 생각했던, 투자가 이제 일상화됐다. 저금리 기조로 인해 예·적금 이자가 낮아졌지만 부동산 가격은 급증하며 더 이상 월급만으로는 평생 내 집 마련을 하는 것이 힘들어졌다. 숨만 내쉬어도 돈이 드는, 정확히 말하자면 깨끗한 공기를 마시려면 기꺼이 ‘공기청정기’에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 세상을 살면서 어찌 시류에 ‘돈’을 맡기지 않을 수 있으리. 그렇게 투자는 우리에게 왔다.

그들은 아주 친절하게 자신의 몸을 낮춰 은행과 증권사를 통해 우리에게 인사했다. 고개를 꾸뻑, 숙인 사모펀드는 적격투자에 대한 기준을 낮춰 친구가 되자고 했다. 이보다 훨씬 낮은 금액으로 투자할 수 있는 P2P 등은 원래 친구였던 것처럼 굴었다. 직접 가지 않아도 계좌를 개설할 수 있고 국내주식 거래시 수수료도 무료인 MTS(모바일 트레이딩 시스템)도 트렌드에 맞춰 ‘비대면 친구’가 됐다. 자연스레 ‘예금자보호’가 되지 않는 친구들과 만나게 되면서 ‘투자자’라는 이름을 얻었다.

나 역시 거창하지는 않지만 ‘주식’을 벗 삼아 투자자가 되었다. 이쯤에서 내가 어느 쪽에 포함되어 있는 사람인지를 밝히자면, 나 역시 후자다. 현재 기준 ‘–35.50% 투자자’다. 나의 벗들은 지금 모두 ‘스머프’보다 파랗게 질려 있다.

주식투자자가 되기 전 내게 ‘흑백논리’보다 더 명확했던 것은, 파란색은 좋은 것 빨간색은 위험한 것이었다. 초록색이지만 ‘파란불’이라고 불리는 그 신호에 맞춰 늘 길을 건넜기 때문이다. 빨간불에는 멈춰서야 하고 파란불이면 건너야 하는 이 반복된 생활 속에서 ‘파란불’은 저 너머에 닿을 수 있는 반가운 것이었다.

하지만 투자를 하며 달라졌다. 마이너스가 커지면 커질수록 덩달아 내 얼굴도 파르르 떨렸다. 추워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얼굴은 이성의 끓는점 넘게 감정을 내뱉으며 빨갛게 달아올랐었다. 모조리 파란불이 켜진 채 횡단보도 너머 ‘빨간불 수익’으로 건너지 못한 내 주식 앞에서 담담해지기까지 많은 시간을 보내야 했던 것이다.

나는 현재를 기준으로 투자에 실패한 사람이다. 그래도 여전히 파란색을 증오하지 않고 종종 파란색 머플러를 두르며 저 너머 언젠가 올지 모를 '투자 화양연화'를 기다린다. '내가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의 투자를 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최근 다변화된 투자처와 낮은 최소가입금액으로 각종 투자 문턱이 낮아지면서 ‘투자자’가 늘었다. 높은 수익을 얻었다는 이야기도 가끔 들리지만, 큰 손실을 토로하는 이들의 소식은 더 자주 들린다. 이들은 '지금까지 평생을 모아온' 혹은 '내 재산의 전부'라고 손실의 범주를 말한다.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고수익 가능성을 담보로 너무 많은 원금 손실의 위험을 감내해야 하기 때문이다.  

모두가 자신의 투자 지표가 빨갛게 꽃필 그날, 저 너머 언젠가 올지 모를 화양연화(花樣年華)를 기다리는 내내 담담할 수 있었으면 한다. 자신의 상황에 맞는 적절한 투자가 맞는지를 생각해볼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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