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포스트코리아 이한 기자] 취재수첩을 정리하다가 2009년 유럽 출장 관련 자료를 발견했다.

당시 기사 제목은 <자전거로 그린 선진국을 가다>

환경 관련 취재였다. 태양열로 전기 쓰고 마을 도로에 자동차를 금지시킨 독일 프라이부르그 보봉 생태마을, 북유럽 최대 공업도시로 과거 환경 파괴를 겪었으나 이산화탄소 배출 줄이고 재활용을 적극 늘려 도시 이미지를 바꾼 스웨덴 예테보리에 다녀왔다. 기자는 탄소 배출 줄이기에 동참하려고 취재하면서 공유 자전거를 타고 다녔다. 서울에는 그런 자전거가 아직 없던 시절이었다.

태양열이나 탄소 저감 같은 단어는 요즘 우리 귀에 너무 익숙하지만, 그때는 11년 전이었다. 마을 전체가 자동차 진입을 막고 태양열로 거의 대부분의 전기를 쓰는 ‘솔라시티’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당시 10년 동안 솔라시티에 살았다던 45세 바스탄트씨는 기자가 집을 방문하자 “자연을 파괴하지 않고 환경을 보호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마음을 아이들 역시 느끼기를 바란다”고 얘기했다. 그 얘기를 들으면서 ‘선진국 사람들은 뭔가 다르구나’ 싶었다.

취재 기억을 되살려보면, 당시 기자는 생태마을이 아니라 현지 기업에서 더 큰 충격을 받았다. 환경에 관심 많은 운동가, 산골에 흙집 짓고 살거나 태양열로 물 데우며 사는 사람들은 이미 한국에서도 만나본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도시 한복판에 친환경 주택이 있다는 건 놀라웠으나, 환경 친화적인 마인드를 가지고 사는 ‘선하고 좋은 사람’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주는 충격은 그렇게 크지 않았다. 하지만 기업을 방문하고서는 매우 놀랐다.

당시 기자는 밀레와 일렉트로룩스를 방문했다. 유럽의 대표 주방가전 기업과 생활가전 기업이었다. 밀레는 산업폐기물 배출량을 줄이고 제품 생산과정에서 발생하는 이산화탄소의 75%를 난방용 에너지로 재활용하는 등 적극적인 ‘그린 비즈니스’ 정책을 시행 중이었다.

일렉트로룩스는 친환경 소재와 재활용 재료를 활용해 만드는 녹색 제품(Green Product) 개발에 열중하고 있었다. 물론 요즘 많은 기업들이 관심 가지고 실천도 하는 일들이다. 하지만 그때는 지금으로부터 11년 전이었다.

당시 일렉트로룩스 본사 환경감독관(environment director) 브루토씨는 “기후 변화 등에 대처하기 위해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은 적다. 자발적으로 실천하고 힘을 보탠다는 측면에서는 중요하지만, 근본적으로 많은 노력을 해야 하는 것은 결국 기업과 국가다”라고 말했다.

아울러 그는 “가전제품 겉면에 전력 소모량을 의무적으로 표시하는 것처럼 얼마나 친환경적으로 생산됐는지 소비자들이 알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기업 관계자가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매출이나 홍보전략을 얘기하는 게 아니라 친환경과 기후 변화를 얘기하는 것이 신선했고, ‘환경감독관’이라는 임직원이 있는 것도 신선했다.

이튿날 밀레 본사를 방문해 환경 사무관 베게트씨와 만났다. 당시 기자가 환경 분야에 투입하는 예산과 투자비 규모가 어느 정도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환경 정책과 제품 개발을 별개의 건으로 분리해서 보는 것은 구시대적인 발상”이라고 말하면서 “예산을 책정하는데 ‘환경 분야에 얼마’라는 식으로 딱 잘라 구분하지는 않는다”고 덧붙였다.

이 사무관은 밀레가 15년 전부터 그룹 본사에 환경 전문 담당 직원을 채용했다고 말하면서 “환경을 고려하는 것은 기업의 윤리가 아니라 매우 당연한 일”이라고도 말했다.

11년이 지났다. 서울에도 독일과 스웨덴처럼 공유자전거가 생겼고 탄소 배출을 줄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쌓여가는 플라스틱이 얼마나 위험한지, 나빠지는 공기질과 높아지는 대기 온도가 지구를 어떻게 위협하는지 다들 과거보다 더 잘 알게 되었다. ‘환경 경영’ ‘친환경 제품’이라는 말도 이제는 (물론 중요하지만) 신선하지는 않다. 국내 주요 대기업 중 한곳도 바로 오늘 “모든 비즈니스 영역에서 환경에 대한 책임을 우선순위로 두겠다”는 메시지를 내놨다.

하지만 11년 전 일렉트로룩스와 밀레 환경 담당관들이 얘기한 가치가 지금 우리나라에서 잘 실현되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기업과 국가가 기후변화에 대처하기 위해 정말로 충분히 노력하고 있는지, 환경 정책이 기업 활동과 별개로 이뤄지는 ‘플러스 알파’식 숙제가 아니라 지구의 기업인으로서 당연히 하는 일이라고 여기는지 말이다.

올해 주요 기업들의 신년사에는 AI, 위기, 도전, 혁신 같은 단어들이 반복적으로 등장했다. 그리나 우리가 숨쉬는 공기, 마시는 물에 대한 얘기는 찾기 힘들었다. 우리를 둘러싼 환경이 안전하지 않다면, 세상 그 어떤 도전과 혁신이 의미가 있을까?

"그동안 경제 성장의 부산물로서 환경 문제를 해결하는 데 집중해왔다면, 앞으로는 환경을 기본에 두고 성장을 도모하도록 패러다임을 전환해야 한다"는 환경부 장관의 신년사를 다시 떠올릴 때다. 그냥 떠올리기만 해서는 안 된다.

2009년 유럽 출장 주제는 ‘그린 비즈니스’였다. 환경을 보호하는 일반인 얘기보다는 환경 이슈를 다루고 산업적인 시선으로 연결시키는 기업과 그것을 이끄는 정부 정책 얘기가 주된 화두였다. 그린과 비즈니스라는 두 단어의 조합이 매우 낯설었지만 유럽에서는 그게 낯선 조합이 아니라고 느꼈다. 대한민국에서도 그린과 비즈니스가 하나의 키워드가 될 날을 상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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