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의 윤리학'이 '선의 윤리학'을 극복할 수 있도록 지식과 각성 필요

2020년은 그냥 새해가 아니라, 새로운 10년이 시작되는 새해다. 정신 바짝 차리고 새해를 맞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진은 2019년 발왕산에서 바라본 해돋이 모습(제공 최기오님)
2020년은 그냥 새해가 아니라, 새로운 10년이 시작되는 새해다. 정신 바짝 차리고 새해를 맞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진은 2019년 1월1일 평창군 발왕산에서 바라본 신년 해돋이 모습(제공 최기오님)

해마다 세밑이면 언론사 등에서 ‘10대 뉴스’를 발표한다. 언필칭 연례행사다. 언론사들은 대부분 국내, 국외를 나눠 각각 10개씩 그해의 중요뉴스를 뽑는다. 반면 시민단체 협회 기관 따위에서 발표하는 10대 뉴스는 거개가 국내로 한정된다. 올해도 예외 없다. 30일자에 나란히 국내외 10대 뉴스를 실은 두 중앙일간지는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전면을 할애해 “이 뉴스들만큼은 잊지 말아야 한다”고 독자들에게 주문을 건다. 선정된 뉴스들은 그 신문이 그 신문이다. 게다가, 두 신문 모두 국내 뉴스에 환경관련은 ‘전무(全無)’라는 점이 똑같다. 그나마 한 신문이 스웨덴의 청소년 기후투사 그레타 툰베리를 국제 10대 뉴스의 하나로 꼽은 게 두 신문 통틀어 환경관련으로는 유일하다. 국내외 10대 뉴스 반열에 오를만한 환경 이슈가 없었단 말이라면 오죽이나 좋을까? 미세먼지, 아프리카돼지열병, 월성원전 폐쇄 등은 10대 뉴스에 끼지도 못했으니, 역으로 보면 대한민국이 얼마나 ‘끔찍한’ 일이 많은 나라인지 확인하는 것 같아 씁쓸하다.

환경이 이처럼 홀대(?)받아도 되나 싶은 섭섭한 기분은, 매머드급 국내 환경단체들이 ‘환경분야 10대뉴스’를 전혀 내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순간에 이르면, 환경의 '괴사(壞死)'라도 목도한 것 같은 낭패감에 휩싸인다. 때로는 환경을 무기로 대한민국의 경제사회를 쥐락펴락하는 그들이기에 더욱 그렇다. 그 단체들 눈에는 2019년 환경분야가 늘 ‘맑음’이었다는 것인가. 환경 이슈로 분류할 수 있는 신재생에너지를 포함, 정부의 환경정책이 100점 만점을 받은 ‘참 잘했어요’ 등급이라는 뜻인가. 그렇다면 그들은 왜 광화문에서 1인 시위를 하고, 왜 낙동강에 몸을 담근 채 피켓시위를 벌였으며, 왜 이 기업 저 기업을 상대로 목청을 높였었는지 이해 할 길이 없다. 감시와 견제가 NGO의 첫 번째 소명이자, 숙명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2019년을 보내면서 정부의 환경정책에 날선 비판 한 줄이나마 남겼어야 옳다.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것은 수만에서 수십만의 회원들을 보유하고 있는 시민단체로서 직무유기에 다름 아니다. 아니면 현 정부의 환경정책이 이들 단체의 입맛에 딱 맞거나. (게을렀기 때문이라고는 도저히 상상하고 싶지 않다.)

문제는 우리가, ‘환경이 시시때때로 좌절하는 세상’을 내년에도 후년에도 여전히 살아가야 할 지도 모른다는데 있다. 아마 내년에도 정부의 환경정책은 올해와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미세먼지와 중국, 원전과 석탄화력, 플라스틱과 쓰레기, 아프리카돼지열병과 조류독감, 4대강과 녹조, 국립공원과 풍력발전 등 수 없는 환경현안을 두고 환경당국은 ‘해 오던 대로’ 정책을 집행할 게 분명하다. 때로는 특정 환경문제와 관련해서는 갈등의 조정자가 아니라 촉발자의 악역을 감당할 수도 있다. 집권 그룹의 원하는 방향에 맞춰서. 거대 환경단체들의 걸음걸이 또한 그대로이리라. 누구와의 공동선인지 때로 카테고리가 헷갈리기는 하지만 ‘공동선’을 추구한다는 그들의 목소리는 미세먼지처럼 광장을 뒤덮을 것이고 자동차 소음마냥 일상의 배경음이 될 것이다. 용역비 몇 푼에 영혼이라도 내줄 듯 한 일부 학자들의 모습도 여전할 테고 ‘환경팔이’ 장사꾼도 경향 각지에서 좀비처럼 떠돌 것이다.

 

장하준 교수(잉글랜드 케임브리지대학 경제학과 교수)는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에서 “우리가 사는 세상은 인간의 힘으로 만들 수 있는 여러 세상 중 가장 나은 세상이 아니다. 우리가 다른 종류의 결정을 내렸더라면 지금 다른 모습의 세상에 살고 있을 것이다”라고 설파했다. 장 교수는 규칙을 정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사람들이 내리는 결정에 따라 일들의 방향과 결과가 결정되는데, (문제는) 그 ‘힘 있는’ 사람들이 내리는 결정이 의도한 결과로 이어질지 장담할 수 없을뿐더러 또 그런 결정들이 불가피한 것(선택)이 아니라는 점을 똑바로 알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를 집권 정부의 정책 결정·집행과정에 대입해 보면 의미가 도드라진다. 7000억원을 들여 수리한 원전을 다시 8000억원 넘게 투입해 해체하는 ‘탈원전’이 과연 불가피한 선택인지, 설악산 케이블카는 안 되지만 백두대간 풍력발전은 왜 되는지, 정부의 참여자들은 명쾌한 논리로 설명하지 못한다. 물론 이후의 결과에 대해서도 책임지지 않을 것이다. (“이 산이 아닌게벼” 하는 사이, 알프스를 넘던 병사의 절반은 죽는다.)

 

그러므로 대한민국 환경문제들의 해법을 전적으로 이들에게 의존해서는 안 된다. 현 정부와, 현 정부의 논리 위에 함께 서 있는 일부 환경단체·학자들은 환경문제에 대한 답을 정해놓고 있다. 이 그룹은 환경문제를 ‘답정너’(답은 어차피 정해져 있고 너는 답만 말해) 수준으로 규정하지만, 인간의 거의 모든 행위와 연관돼 있는 환경문제에 정답이란 결코 있을 수 없다. 또한 정답이 하나만 있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이 문제를 더 이상 목소리 큰 이 그룹의 손에만 맡겨둘 수는 없다. 이들은 진실 보다는 진영논리에 매몰돼 있고, 따라서 어떤 결과가 나오든 최선이었다고 강변할 것이기 때문이다. 조선대학교 문예창작과 신형철 교수가 ‘몰락의 에티카’에서 개념화 한 ‘선(善)의 윤리학’과 ‘진실의 윤리학’이 바로 이 지점에서 충돌한다. 신 교수는 선의 윤리학을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방호벽으로, 진실의 바이러스를 선의 이름으로 퇴치한다’고 지적했다. 반면 진실의 윤리학은 ‘시스템을 다시 부팅하는 리셋버튼으로, 선이라는 이름의 하드 디스크가 말소될 것을 각오한 채 감행되는 벼랑끝에서의 한 걸음’이라고 정의했다.

힘을 쥐고 있는 그룹은 언젠가는 교체되지만, 우리가 살아 숨 쉬는 세계 자체는 변함이 없다. 그 그룹들은 자신들만이 절대적으로 옳다는 지독한 독선(獨善)으로 진실의 바이러스를 퇴치하곤 하지만, 그러나 ‘당분간’일 뿐이다. 단, 전제가 있다. 이들의 ‘선의 윤리학’이 일시적인 것에 그치도록 하려면, 우리의 ‘진실의 윤리학’을 강골로 만들어야 한다. 책임 있는 시민으로서 지금의 ‘독선그룹’이 내리는 결정들이 확고한 증거와 명백한 논리에 근거한 것인지 하나하나 따질 수 있어야 한다. 그러려면 우리는 환경을 포함한 이 세계의 현상과 문제에 대해 정확한 지식을 갖추고, 해법과 실행의지를 단단히 장착해야 한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장하준 교수가 적시한 대로 “힘을 쥐고 있는 그들의 말을 믿었다가 그들의 결정에 희생되는 운명을 피할 수 있다.” 이는 또한 선이라는 이름의 하드디스크를 진실의 바이러스로 완벽하게 리셋하는 길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30일 “세상을 바꾸는 힘은 국민”이라고 한 말은 '진실'이다. 책임 있는 시민으로서 진실의 윤리학을 발휘할 기회가 곧 온다. 정신 바짝 차리고 새해를 맞아야 하는 이유다.

management@greenpost.kr

저작권자 © 그린포스트코리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